[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9) - 부라노 섬, 그리고 베네치아 셋] 보기 낭만적인 파리나 외로운 베네치아처럼 어떤 장소에 어울리는 꼭지를 제 나름대로 붙여 보는 건 여행자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선 그 권리를 행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자고 했을 때, 딱히 어울리는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 큰 감동을 받는 바람에 말문이 막히는 경우와는 달랐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중간 어디쯤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 가까웠다. 발음조차 애매한 분위기를 띠는 '모호하다'란 형용사나, 어쩐지 책임을 저버리는 느낌이 드는 '알 수 없는'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상태 말이다. 물론 빈을 수식하기에 좋다고 널리 알려진 단어들은 많다. 일반적으로 '음악'이 애용..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8) - 베네치아, 둘 그리고 무라노 섬] 보기 Faro 선착장에서 LN선을 타고 부라노 섬으로 향했다. 부표와 아스라이 보이는 섬 마을의 기척을 느끼며 배 안에서 한숨을 돌렸다. 모터보트의 항해는 30분 남짓 이어졌다. 그 동안 앉아서 쉴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몸이 지쳐 감각과 마음을 좀먹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색채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 한 시간이라도 머물고 싶을 만한 곳, 알고 있는 색 이름이 몇 가지 안 되는 나 같은 사람이라도 똑같이 황홀해 질 수 있는 곳으로 가는 중이니까. 부라노로 가는 길. 몇 년 전, 처음으로 부라노 섬을 찍은 사진을 보고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구나'며 감탄을 한 적이 있다. 그곳의 풍경은 너무나 매혹..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7) - 베네치아, 하나] 보기 여행을 돌이키다보면 작은 순간도 크게 느껴지곤 한다. 특히 좋은 기억은 남고 나쁜 기억은 잊히는 경우가 많다. 여행 중 느꼈던 피로와 실망, 날씨를 향한 불만들은 제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지만, 사소한 감탄이나 미묘한 감동은 뻥튀기 기계에 넣은 곡물처럼 부풀려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너무나 매혹적이라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항공기 좌석표 결제 버튼 앞에서 서성이게 만든다. 똑같은 공식을 적용하여 베네치아에서의 둘째 날을 열자면, 그날의 나는 베네치아에서 눈을 떴지만 전날의 베네치아에 있지 않았다. 파리의 호텔에선 제공받지 못했던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컨의 등장은 하루의 시작을 경쾌하게 열어줬다. 밀가루 위주의 탄수화물 식단에 단..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6) - 파리, 넷] 보기 기체는 작았다. 아담한 기내 분위기와 종종 작은 동체가 요동칠 때 느낄 수 있는 스릴은 마음에 들었으나 이런저런 불편한 점도 많았다. 우리는 맨 뒷자리(35E, 35F)였는데 하나 뿐인 화장실을 가기 위해 몰려 든 사람들이 28번 좌석까지 줄을 서고 있었다. 만약 이륙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저 앞까지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새삼스러운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콜라를 먹으려면 1유로인가 2유로를 더 내야하는 룰이야 사소한 불편에 속했다. 무엇보다 나빴던 건 기내식이었다. 비행기가 제 고도에 오르자마자 배가 고파진 나는, 기대도 안한 푸드 카트가 등장했을 때 내심 감사해 했었다. 게다가 뚜껑을 열자 나타난 짙은 녹색의 음식은 이..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5) - 파리, 셋 그리고 하나 더] 보기 딸깍. 전화가 끊겼다. 그녀에게 이제 곧 베네치아행 비행기를 탄다고 말한 참이었다. 샤를 드 골 국제공항 터미널 2-F. 나는 12시 35분 출발 예정인 에어프랑스 1726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지금껏 심술 맞게 굴었던 태도가 미안했던지 격자형의 철골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파리에서 본 것 중 가장 밝고 힘이 넘쳤다. 터미널은 거의 만원이었다. 게이트 앞 좌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자신이 왔던 곳으로,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떠날 준비에 한창이었다. 수면 부족을 만회하거나, 인터넷 존에서 노트북을 이용하거나, 잡지를 보거나, 또는 무언가를 쓰면서 말이다. 사실 탑승을 기다리는 승객이 터미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4) - 파리, 셋] 보기 Saint-Michel 역 앞에 다시 섰을 때 나는 차라리 울고 싶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오르내리느라 배가 무지막지하게 고팠고, 비에 젖어 축 가라앉은 옷 때문에 몸은 으슬으슬했기 때문이다. 일단 뭣 좀 먹자는 심정으로 정처 없이 남서쪽으로 걸었다. Saint-Michel 역에서 Saint Germain des prés 역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좁은 골목길엔 정말 수 없이 많은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도 많았는데 한쪽 테라스에 앉은 사람이 반대편 테라스의 손님에게 말을 걸 수도 있을 정도였다. 카페의 조명은 습기에 찬 대기 속에서 차분하고 농도가 짙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을 오랫동안 쬐며 걷고..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3) - 파리, 둘 그리고 하나 더] 보기 겨울이 되면 프랑스는 우기에 접어든다. 특히 북부 지방에 비가 자주 내리는데 파리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파리 사람들은 가벼운 비 정도는 그냥 맞고 다닌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흐린 하늘을 보게 되면 이곳 사람들은 우산을 챙겨 나갈까 아님 곧 세탁을 해야 할 두터운 코트를 입고 나갈까. 파리에 머물렀던 나흘 내내 날씨가 맑은 적이 없지만, 우산을 들고 나온 이들을 본 적도 없다. 그런 걸 보면 우산은 그들의 가방 안에 숨어있거나 집안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아침부터 비가 올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우산도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동행인의 우산은 그의 배낭 안에 있었고, 내 것은 한국에 있는 내 방 내 책..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2) - 파리, 둘] 보기 전편 요약 : 무거운 가방을 들고 루브르 박물관을 거쳐 퐁피두 센터까지 걸어가다가 결국 체력 고갈. 뮤지엄 패스의 또 다른 활용법을 발견했다. '화장실 이용권'이다. 파리의 많은 공중 화장실과 식당 화장실은 유료지만 미술관은대부분 무료다. 게다가 시설도 좋다. 퐁피두 센터에 오르며 파리의 전경을 보다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화장실이었다. 거울 있고물 나오고. 화장실 찾기가 쉽지 않은 만큼 반갑기 그지없는 만남이다. 화장실 찾기 어려우면 뮤지엄 패스를 적극 활용하자! 퐁피두센터가 화장실과 동의어가 된 것 같아 좀 미안하긴 하지만. 쇼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감히 작품을 볼 엄두가 나지않았다. 동행자가 관람에 큰 뜻이 없고, 나 역시 한국에..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1) - 파리, 하나] 보기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보이는 기분은 묘하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깜빡깜빡 형광등이 켜지는 것 같다. 그 때는 잠시 시간도 멈춘다. 점차 내가 눈을 뜬 곳이 호텔의 한 객실이고 이 땅이 이국의 도시라는 걸 깨닫는다. 아, 여행을 왔지. 여기는 파리고. 시간은 오전 7시 30분. 알람을 끄고 옆 침대를 보니 친척 동생도 깨어 있었다. 파리에서 맞는 첫 아침이다. 엄청난 일정의 시작이다. 샤워 후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 로비가 0층이고 우리나라로 치면 2층이 여기서는 1층인 구조가 생소하다. 미니바에선 벌써 나갈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지만 봉주르, 봉주르, 인사를 나눴다. 처..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0) - 여행, 시작] 보기 샤를 드골 공항은 조용했다. 오후 6시가 넘어서인지 더욱 그래보였다. 한숨도 안자 멍한 기분을 안고 여행의 시작점에 섰다. 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낯선 향기를 맡았다. 파리의 커다란 손과 악수를 하는 기분이었다. 반갑다고, 오는 길 어땠냐고. 입국심사는 간단했다. 드디어 여권에 스탬프가 하나 더 늘어나는구나. 무뚝뚝한 직원을 지나 짐을 찾고 인터넷에서 본대로 RER-B선부터 찾았다. Paris by Train이라는 안내판을 좇고 또 좇았다. 캐리어는 제 주인이 살짝 긴장했다는 것도 모르고 경쾌하게 굴렀다. 드르륵, 드르륵. 도대체 열차는 어디서 타는 거야? 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고 나서야 드디어 기차를 타는 곳이 보였다. 초행길이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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