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누키코지 5초메 옆에 있는 카페 랑방(カフェ ランバン)은 웹서핑 중 발견한 곳이다. ‘삿포로 카페’라는 아주 원초적인 검색어로 찾아낸 게 용할 정도로 사진만으로도 꼭 한 번 가봐야겠다 싶었던 카페다. 이는 거리를 걷다가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길 곳을 우연히 발견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카페 앞에 섰을 때, 황망히 지나치려다 다시 발길을 돌리고야 말았을 당위 비슷한 걸 읽어냈으니까. 삿포로 TV 탑에서 다누키코지까지 걸어오면서 몸이 많이 지쳤다. 여행 가방과 함께 챙긴 숙취는 그럭저럭 해소됐지만, 잠은 여전히 부족했다. 홍콩이나 마닐라 같은 곳에선 어떻게 새벽까지 놀았던 걸까. 역시 내 몸속 기관은 알코올이 들어가야 피로를 잊고 작동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엔 같이 마실 사람이 없으..
내가 쓰는 디지털 카메라에 필름 카메라 단렌즈를 붙여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금 화각은 뭔가 부족하다. 표준 화각 이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미 그런 렌즈가 있다. 그것도 세 알씩이나. 뷰파인더가 없기 때문에 수동 초점 맞추기가 쉽지 않겠지만, 어차피 본연의 자동 초점 기능도 시원찮으니 그 밥에 그 나물이겠거니 했다. 삿포로에 가서 뭘 보고 어딜 가야겠다는 공부도 제쳐놓고 인터넷 검색질을 했다. 과연 쓸 만하면서 가격도 만만한 렌즈 컨버터가 있었다. 삿포로의 양대 전자상가인 빅 카메라와 요도바시 카메라 중 후자 쪽이 세일 중이라 저렴하다는 정보까지 확보했다. 좋아, 이거다. 그래도 일본 여행인데 카메라 용품 하나 정도는 사야 하지 않겠나. 그리하여 오래된 렌즈를 캐리어에 던져 넣고 나..
내가 묵은 호텔은 다누키코지 6쵸메에 위치한 도미 인 삿포로 아넥스(Dormy Inn Sapporo Annex)였다. 해산물이 포함된 뷔페식 아침 식사에 대중탕까지 딸려있는 곳인데 가격은 부담 없이 저렴했다. 십 층에 있는 싱글룸은 예상했던 대로 작았지만, 냉난방 시설도 완벽했고 공기 청정기 또한 갖춰져 있었다. 게다가 건물 안에서 입기 좋은 실내복을 제공하고 로비엔 공용 제빙기까지 있으니 숙박비를 낸 건 내 쪽인데 오히려 내가 고마워지는 역설이 일어났다. 이런 곳에서 한 달만 딱 살아보는 건 어떨까. 평소 욕탕이나 사우나를 좋아하진 않지만, 매일 들어가 줄 수도 있는데. 책상에 만년필과 공책을 배치하고 그 공백을 매일 같이 채워나갈 수 있을 텐데. 마침 장기 투숙자를 위한 가격 안내표가 붙어 있었다. ..
멀어지면 더 가까워진다는 말엔 어폐가 있지만, 이 문장은 한편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는 아포리즘이기도 하다. 미비한 준비 탓에 스마트폰 속 지도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그 틈을 타 메시지도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떠나기 전에는 되도록 연락 두절 상태로 남겠다고 공언했으나 혼자 온 여행엔 유혹이 따른다. 어쩌면 메시지가 나에게 온 게 아니라 내가 메시지를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이 정경을, 이 분위기를, 여기 이 기분을 누군가에게 당장 전하지 않고선 못 배길 지경이었다. 혼자 있으려는 심보와 혼자 있음을 확인하려는 심보 사이엔 차이가 있다. 내가 어떤 타입의 인간인지 알게 된 순간, 모든 걸 다 버리고 떠날 위인은 못 된다는 것도 더불어 알았다. 소중한 것과 아쉬운 것이 많아서 그런 모양이다. 이를 ..
삿포로 역부터 내가 묵을 호텔에서 가까운 스스키노 역까지는 지하철 난보쿠선(南北線)으로 두 정거장이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이제 막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면 택시나 지하철로 숙소까지 이동하는 게 상식이겠다. 나 역시 비행기를 탈 때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혼잡한 대기실로 내려와 출구를 찾아 헤매다 북쪽 입구 앞에 섰을 때, 유리문 밖으로 새카만 하늘과 어둑어둑하게 꺼져가는 빌딩의 불빛을 보았을 때, 생각이 달라졌다. 저 어둠 속으로 당장 사라지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걸어서 이 도시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지하철 두 정거장 정도는 걸어가도 된다는 것 역시 여행자의 상식 중 하나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나가려니까 너무 추운 것이다. 그래서 삿포로 역부터 스스키노 역을 잇..
내가 외국의 공항에 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흡연 중이라면 담배를 피우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물을 사는 것이다. 그 나라 돈을 처음으로 쓰며 어떤 심드렁한 얼굴이 지폐에 그려져 있나, 물가는 얼마나 차이가 나나, 또는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 같은 자판기의 사용법은 어떻게 되나 알아보기 위해서다. 습관적으로 따던 페트병 뚜껑인데 이곳에서는 드르륵하는 소리도, 플라스틱 고정핀이 뜯기는 역치도 조금은 다른 것 같다. 상점에서 면대 면으로 샀다면 돈 그릇에 거스름돈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이 나라의 감사 인사를 전하면 대체로 점원 역시 활짝 웃으며 답례해 준다. 그 짧은 대화만으로도 이 나라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다. 게다가 뭐라 논리적인 이유를 대기는..
신치토세 공항에서 날 반겨준 건 삿포로 맥주 포스터였다. 북해도에서만 판매한다는 삿포로 클래식의 하얀 거품을 보며 어떤 곳에선 랜드마크도 아름다운 모델도 아닌 알코올음료가 먼 길 온 손님을 반겨줄 수도 있다는 새로움을 맛봤다. 열차를 타기 위해 건너간 국내선 청사에 있던 수많은 매장도 그랬다. 북해도의 온갖 먹거리들이 다 모여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여행을 끝낸다고 해도 이 동네에서 어떤 먹거리가 유명한지 남들에게 자랑할 순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건 공항의 의무나 다름없었다. 당신, 열심히 보고 듣고 돌아다니느라 기념품 살 시간도 없었을 테니까 여기서 전부 챙겨가세요. 인천 공항의 면세점에도 한국 특산품인 김이나 홍삼, 제주도에서 건너온 초콜릿이 있지만, 신치토세 공항의 기념품점은 더욱 다양한 것..
이륙하는 창 너머로 내 그림자가 보였어. 나처럼 생기지는 않았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건 알게 해 주는 새를 닮은 그림자를 보았어. 그건 미련없이 세상을 가로지르며 저를 한 번 흉내 내 보라고 권하는 것 같았어. 아니면 어림도 없지 않으냐며 약을 올리는 중이었거나. 이륙하는 창 너머로 내 그림자가 보였어. 그것은 한참을 따라오다가 기체가 고도를 높이는 순간, 구름으로 들어가 영영 보이지 않았어. 보이지 않아도 발밑으로 뻗어있는 그림자를 느낄 수는 있었어. 그건 여전히 미련없이 세상을 가로지르며 저를 흉내 내 보라고 권하고, 또 권하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겠니? 재료가 똑 떨어져 더 받을 수 없는 주문처럼 나는 듣고도 어쩔 도리가 없었어. 비행기는 이렇게 가볍게 비상했는데 내 짐과 내 자리..
여행 전날 과음하면 안 된다는 지극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어겼다. 대가는 초 단위로 밀려오는 두통으로 톡톡히 치른다. 버스에 오르기 전 숙취 해소 음료를 마셨지만, 괄목할 만한 효과를 보기엔 역부족이었다. 기대를 못 이겨 마신 술은 아니었다. 다음 날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것도 잊을 만큼 엉뚱한 이야기에 푹 빠져 마신 술이었다.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거울을 보며 묻고 싶었으나 어쩌면 이건 실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백한 고의다. 여행이 여자라면 일부러 관심 있는 척하지 않으려고 그 앞에서 딴짓을 하는 농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여행은 여행이고, 술은 술이지. 문제는 이래 봤자 잘 보일 수 있는 대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런다고 낯선 도시가 내 관심을 끌기 위해 어마어마..
시월 말, 삿포로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늦은 휴가 목적지로 염두에 두고 있던 곳은 원래 교토였다. 하지만 아주 저렴한 가격에 삿포로 왕복 항공권이 올라와 있는 걸 보고, 게다가 딱 네 장 남아 있는 걸 보고, 예약 버튼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11월 말,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였다. 실은 이 가격일 만한 시기인 것이다. 가이드북에서 홋카이도 추천 여행시기로 일 년 중 아홉 달을 꼽았는데 11월은 나머지 불운한 석 달 중 하나다. 단풍은 지나갔고 눈은 잘 오지 않는 어중간한 달. 삿포로 시내 호텔 가격이 서울 모텔 가격보다 싼 걸 보면 말 다 했다. 그래서 오히려 내겐 최적의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제철이 아닌 도시엔 분명 사람을 유혹하는 면이 있다. 한산하다 못해 허전한 거리를 떠올리면 누구라도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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