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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나는 택시를 타고 파리 시내를 가로질렀는데 운전사가 무척이나 말이 많았다. 그는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만성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중략)

  "제 뒤에는 당신보다 삼 분의 일은 더 긴 인생이 있습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더 가진 그 삼 분의 일로 뭘 할 겁니까?"

  "글을 쓰지요."

  나는 그가 쓰는 게 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자기 인생에 대해 쓰고 있었다. 바다에서 사흘 동안 헤엄을 치며 죽음에 맞서 싸웠고, 잠은 잃어버렸으나 여전히 살고자 하는 힘은 간직한 남자의 이야기.

  "자식들을 위해 쓰는 겁니까? 가족 연대기처럼?"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제 자식들이오? 그런 데 관심 없을 겁니다. 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택시 운전사와 나눈 이 대화는 내게 불현듯 작가 활동의 본질을 밝혀 주었다. 우리가 책을 쓰는 건 우리 아이들이 우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아내가 귀를 틀어막기 때문에 우리는 익명의 세상에다 말을 하는 것이다.

  택시 운전사는 글쓰기광이지 작가는 아니다. 따라서 개념들을 먼저 정확히 정립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루에 애인에게 편지를 네 통씩 쓰는 여자는 글쓰기광이 아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일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연애 편지를 언젠가 출간할 수 있도록 복사해 두는 내 친구는 글쓰기 광이다. 글쓰기 광증이란 편지나 일기나 가족 연대기를 쓰려는 욕망(다시 말해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책을 쓰려는 욕망이다.(즉 알지 못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택시 운전사의 열정과 괴테의 열정은 같다. 택시 운전사와 괴테를 구분 짓는 것은 다른 열정이 아니라 열정의 다른 결과다.

  글쓰기 광증(책을 쓰려는 강박증)은 사회 발전이 세 가지 기본 조건을 충족할 때 전염병의 차원이 된다.


  1)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져서 사람들이 무익한 활동에 전념할 수 있을 것.

  2) 사회 생활이 많이 세분화되어 전반적으로 개인의 고립화가 깊어졌을 것.

  3) 국가의 내적 삶에 큰 사회적 변화가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을 것. (중략)


  그런데 반동에 의한 충격으로 결과가 원인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 전반적 고립은 글쓰기 광증을 낳고, 일반화된 글쓰기 광증은 다시 고립을 심화한다. 예전에 인쇄술의 발명은 인간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보편적인 글쓰기 광증 시대에 책을 쓴다는 사실은 전혀 상반된 의미를 갖는다. 저마다 거울 담을 쌓듯이 자기 말을 담처럼 쌓아올려 바깥의 어떤 목소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중략)


  정치인, 택시 기사, 임산부, 연인, 암살자, 도둑, 창녀, 도지사, 의사, 환자 들 사이에서 글쓰기 광증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자신 안에 작가의 잠재성을 품고 있으며, 그래서 누구라도 거리로 나가 "우리는 모두 작가다."라고 외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제 말이 들리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않은 채 무심한 세계 속으로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면 누구라도 고통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말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세계로 변하고 싶은 것이다.

  언젠가는(곧 닥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작가로 깨어날 것이며 전 세계적인 난청과 몰이해의 시간이 도래할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웃음과 망각의 책' 중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예언대로 그런 세상은 도래했다. 나는 전 세계적인 글쓰기 광증이 블로그와 SNS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디와 프로필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린 수천만 개의 거울 담. '바닐라 스카이'라고 쓰인 이 작고 생채기투성이의 유리 벽.





웃음과 망각의 책 (양장)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1-11-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쿤데라 전집 05 웃음과 망각의 책역사는 망각으로 이어지고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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