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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후병처럼 주변 정탐을 마친 우리는 전리품으로 얼음을 사가지고 왔다. 한낮의 축배를 위해서였다. 짐을 마저 풀고 음료수로 드라이 진을 한 잔 마신 다음 호텔의 공중정원에 가 보았다. 방에서는 와이파이가 되지 않지만, 로비와 공중정원에선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 도심 속 테라스는 엘리베이터 버튼 옆에 붙은 황금색 안내판에서 읽으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장소였다. 커피 머신이 준비되어 있고, 매일 메뉴가 바뀌는 과일 바구니도 있었다. 나나 D 같은 사람들에겐 수분과 무기질, 비타민 따위가 절실하다는 충고를 에둘러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작 나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몇 개 집어 먹지 않았지만 말이다.





  누구든 편하게 와서 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돌아가곤 했다. 책을 읽는 사람도 있었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으며, 일행과 대화를 나누거나 노트북 또는 태블릿 PC를 만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시도때도없이 그랬다. 이 시간이면 밖에 나가 뭘 둘러 라도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들은 그냥 이곳에 머물렀다. 그게 조금 의아했다. 여기가 휴양지 리조트도 아닌데 굳이 좁은 호텔 안에서만 시간을 보낸다는 게 말이다. 나와 D는 이번이 세 번째임에도, 웬만한 곳은 다 둘러봤다 해도 과언이 아님에도, 매일 오랜 시간 외출하여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이것이 외국인 - 대부분 서양인이었다. - 들이 휴가를 보내는 방식이구나 싶자, 가끔 휴양지에서 보는 그 여유로움이 굳이 휴양지라서 생겨나는 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여유가 배우고 싶은 미덕이긴 하다. 아, 그러나 홍콩에서는 아니다.







  홍콩이란 도시가 꽤 인터내셔널하듯, 호텔 투숙객도 꽤 인터내셔널 했다. 특히 북미나 유럽 사람들이 많았고, 본토 중국인들도 제법 있었다. 며칠째였는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여느 때처럼 늦게 일어나 전날 마신 술을 머릿속으로 헤아리며 의자에 널브러져 있을 때 처음으로 한국 사람을 보기도 했다. 외국인 남자친구와 함께 투숙한 젊은 여자였는데 그녀의 스마트폰에선 간헐적으로 "카톡!"하는 알림음이 울리곤 했다. 뜨거운 이국의 열기가 머리를 어지럽히는 와중에 듣는 그 외침은 제법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photo by D


  그리고 다시 호텔을 나섰다. 완차이에서 코즈웨이 베이로 이어지는 혼란한 거리를 두 눈으로 보고 두 발로 즈려밟고자 하는 목표가 우리에겐 있었다. 완차이는 홍콩에서 제일 번화한 상업 지구이고, 코즈웨이 베이는 홍콩 최대의 쇼핑 거리다. 사실 두 번째 여행 때 완차이와 코즈웨이 베이를 스치듯 본 적이 있었다. 빅 버스를 타고 홍콩섬 북부를 일주하던 중이었는데, 국지적인 인구밀도가 몽콕보다 훨씬 높은 코즈웨이 베이 쇼핑가 풍경에 완전히 넋이 나갔었다. Y는 전혀 느끼는 바가 없는 것 같았지만, D와 나는 본능적으로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홍콩에 다시 와야 할 이유가 생겼는데?"

  "다음엔 이쪽에 호텔을 잡아야겠어."

  그리고, 우리는 그 대화를 실현시켜 오늘 이 자리에 섰다.







  호텔에서 중심가로 나가려면 지하보도를 하나 지나야 했다. 한쪽 출구 가까이에 누군가의 거처가 있었는데, 매번 주인을 보진 못했다. 침구가 깨끗하고 상자 별로 소지품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우리는 느긋하면서도 깔끔한 성격의 주인을 상상한다. 그가 무슨 연유로 이곳에 머물게 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도시라는 걸 떠올리면 실마리가 잡히기도 하지만 - 자신이 살던 방식의 일부를 여기서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학자라면 그를 밀어낸 체제에 집중할 것이고, 작가라면 그가 이곳에서 다른 집 속의 인간이 그러하듯 삶을 살아내기 위해 추구하고 행동하는 바에 집중할 것이다.






photo by D


  연다홍색의 빌딩 병풍과 황금 용상이 제법 잘 어울린다. 저런 조화라면 나도 부자가 될 기운을 받을 것 같다. 그러나 이후 황금 용상은 우리에게 호텔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이정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photo by D


  지하보도를 지나 황금 용상이 있는 작은 교차로 광장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홍콩의 본모습, 상점과 광고와 사람의 홍수가 시작된다. 한 건물의 몇 개 층을 저렇게 광고판으로 막아두면 심각한 일조권 침해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정체를 알고 보니 호텔이라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갑자기 밀라노에 갔을 때 두오모를 보수하며 친 대형 가림막에 명품 브랜드 광고가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던 걸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럽의 고딕 성당 중 아름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건축물이 한 기업의 - 아마 그것도 디올이었던 것 같다. - 사옥이 되어버리다니. 그래, 그 장면보단 차라리 이게 낫다.







  그나마 골목엔 이런 풍경도 숨어있다. 인간의 시각을 향한 자본주위의 전방위적인 투사가 그 손길을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 뭐랄까,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 던지고 거실 의자에 무방비 상태로 앉아있는 게으른 벌거숭이가 떠오른다. 나는 그 벌거숭이가 좋다.







  과일 주스가 단돈 15 홍콩 달러.

  빌딩 숲 그루터기에 자리 잡은 구멍가게와 그 주변에는 무엇 때문인지 볼 일 있는 사람들이 많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의 흐릿한 윤곽은 어쩐지 고성을 연상하게도 한다. 영광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가난한 성주의 후예들이 거기에 있을 것만 같다.






photo by D


  코즈웨이 베이에서 이정표를 본다. 오다가 타임 스퀘어에 들르고 싶었는데 걷다 보니 한참 지나친 후였다. 그래서 호텔로 되돌아갈 때 찍고 가기로 했다.

  나도 그렇지만 D도 이정표 찍기를 좋아한다. 우리에겐 방향과 목적을 제시해 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당신도 이 사진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그런 게 필요한 사람일 터다.







  리 가든스라는 쌍둥이 쇼핑몰에도 잠깐 들렀다. 거리가 너무 후텁지근해 에어컨 바람을 쐬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중 통로를 통해 두 건물을 오갈 수 있었는데, 공간이 부족한 홍콩에선 이런 구조물을 자주 볼 수 있다. 화려한 상점 구경보단 한국에선 흔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간을 활용하는 솜씨가 더 재미있다. 사진 찍을 구도도 잘 나오고.







  저 모든 마네킹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홍콩의 인구 밀도는 지금보다 훨씬 높아지겠지.

  쇼윈도에 큼지막하게 쓰여있기도 하지만, 마침 홍콩은 여름 세일 기간이었다. 동남아 뺨을 칠 정도로 더운 도시라 여름엔 추천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잘 찾아보면 여름에 홍콩에 와도 좋은 이유가 제법 있었다. 막상 리 가든스 실내는 길거리에 비해 턱없이 한적했지만.






photo by D


  완차이에서 코즈웨이 베이까지 관통하는 거대한 도로 헤네시 로드 부근이었다고 기억한다. 정말 엄청난 인파 때문에 걷기조차 쉽지 않았다. 인식의 한계를 넘어가는 수의 타자는 불쾌감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무서운 혼란을 준다. 어쩌면 이곳이 홍콩이라서, 그 분위기에 취해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 풍경은 한 해가 저무는 시기의 주말 명동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이 사진 자체는 명동의 이미지와 제법 흡사해 보인다.







  헤네시 로드를 건너편, 지하철 코즈웨이 베이 역 뒤로도 바둑판 같은 상점 거리가 있다. 여기선 건물 간의 높이와 형식 차이가 너무 두드러져 일종의 반소격 효과가 일어날 정도였다. 그냥 필요에 의해 무작위로 이루어졌을 건물들의 배치가 마치 액자처럼 보이며, 그 사이의 신식 건물이 우리를 빼꼼히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운데가 뻥 뚫린 그 건물은 또 하나의 프레임이 된다. 나는 이 비현실적인 빌딩화畵에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photo by D


  홍콩섬엔 주룽 반도의 네이선 로드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적인 크기의 네온사인이 적은 편이다. 그래서 안정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론 좀 심심하기도 하다. 옛날 홍콩 영화 속 야경은 몽콕까지 올라가야 볼 수 있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두 여행에선 지겹게 보았던 몽콕의 야경을 이번엔 한 번도 보지 않고 돌아왔다.







  길 건너편만 해도 사람이 그렇게 많건만, 이 거리는 커다란 사냥개를 산책시킬 수 있을 정도로 한적하다. 그 어느 도시보다 도회적인 홍콩에서 넓은 정원 딸린 집에서나 키울 수 있을 법한 동물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늘씬한 검은 원피스의 여인과 더위 때문에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춰 헥헥 거리던 개의 뒷모습으로 인해 공간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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