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사람에 치이고 건물에 깔보이며 꽤 오랜 시간을 코즈웨이 베이 근방에서 보냈다. 그래도 견딜 만은 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실로 여름의 홍콩은 사람을 몹시 지치게 만드는 괴력을 갖고 있었다. 온도와 습도가 동시에 높은 것은 물론, 에어컨 실외기와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적인 열기까지 더해져 힘들다는 인식 이전에 몸이 나자빠질 정도였다. 그러나 나와 D는 꾸역꾸역 걸었다. 우리는 마치 밀려오는 파도에 맞서 바다 한가운데로 걸어나가려는 사람, 이유도 없이 그냥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사람 같았다.





  물론 거리의 인파도 피로에 한몫했다는 점을 부정할 순 없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름도 모르는 타자의 홍수에 휩쓸려 허우적거릴 수 있음이 이 도시의 매력이자 피로 요인이라는 게 말이다. 하지만 이 도시의 인구밀도가 이렇게 높지 않았다면 우리도 이렇게 자주 오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린 분명 완벽한 익명의 존재가 된다는 쾌감을 즐기고 있었다.







  꼭 완차이 지역의 랜드마크여서는 아니다. 그냥 목적이 불투명한 여정에 밑그림이라도 그려넣고 싶어서 굳이 타임 스퀘어를 찾아 길을 돌아왔다. 건물 앞 광장이 넓다는 점을 제외하곤 다른 쇼핑센터에 비해 특이한 면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다.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그 이름에 있었다. 그렇다. 뉴욕에 있는 그 유명한 때문에 친숙했던 것이다.







  마침 곧 개봉할 픽사의 유명 애니메이션 홍보가 이뤄지고 있었다. 저 커다란 인형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사진을 찍었다.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게 매력인 그들의 캐릭터는 과연 국가, 언어, 인종과 문화를 초월해 사랑을 받는다.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앞에선 일단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최근엔 어른이 어른이 되면서 잊은 것들을 그대로 놔두고 가지 말라며 챙겨 주는 게 그들의 철학이라 더욱 반갑다.







  타임 스퀘어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문득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생각이 났다. 두 번째 왔을 때 그걸 찾아 헤매다가 실패했었지. 우습게도 삼박사일 대부분을 홍콩섬에서 보낸 이번 여행에서도 결국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보지 못했다. 어떤 것은 볼 생각이 없어도 보게 마련이고, 어떤 것은 보고 싶어도 못 보게 되기 마련인 모양이다. 사실, 이번엔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가운데가 뻥 뚫린 타임 스퀘어는 각 층의 둥근 회랑을 따라 상점이 늘어서 있었다. 이렇게 무리다 싶을 정도로 공간을 낭비한 이유는 타임 스퀘어라는 이름의 정체성, 즉 광장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다른 백화점처럼 어디에 무슨 매장이 있는지 한참을 찾아야 하는 불편이 없었다. 난간을 따라 한 바퀴 돌며 경치 구경을 하다 보면 어느 층에 어떤 브랜드가 있는지 모두 알 수 있다.

  무심코 들어갔던 자라 매장에서 나와 D는 옷을 몇 벌 사기도 했다. 매대에 널려있던 가을용 니트와 당장에라도 입고 다닐 수 있는 반바지 두 벌이 합해서 사만 원 조금 넘는 가격이었다. 한국에선 사만 원으로 한 벌조차 제대로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좋아졌다.







  나름의 쇼핑을 마친 우리는 급격한 체력의 저하를 느끼고 급히 호텔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룽 반도에선 볼 수 없었던 노면 전차가 홍콩 섬에선 참 자주 보였다. 이번 여행의 계획에 노면 전차를 타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또한 한 번도 타지 않았다. 그냥 노면 전차를 따라 인도를 걸었을 뿐이다. 이미 홍콩 여행에서 계획은 아무 의미도 없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그건 처음부터 일관되게 저의 자리를 지키고 우리를 인도하는 명령이 아니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즉흥적으로 실행하는 게 우리의 계획이었고, 과연 그걸 계획이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었다.







  완차이나 코즈웨이 베이의 화려함을 뒤로 하고, 호텔 가까운 골목에서 재래시장도 발견했다. 정육점은 항상 그렇지만, 홍콩의 정육점은 특히 섬뜩한 면이 있다. 그런 섬뜩함이 어디서 오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창백한 붉은 등 때문에 그럴까? 가게 입구에 온갖 부위가 앞다퉈 걸려있기 때문일까? 거의 녹색으로 빛나는 금속재질 냉장고의 차가움이나 호러 영화에 영감을 줄 것 같은 반쯤 열린 문 때문일까?

  물론 여기서 고기를 사서 불판에 구워 먹으면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리라는 걸 안다.







  그래도 우리가 택한 저녁 메뉴는 일식이었다. 아까 낮의 산책 때 눈여겨 봐둔 식당이었는데 가격도 비싸지 않았고, 음식도 아주 맛있었다. 미식가의 천국 홍콩에서 우리는 일식의 매니아가 되기로 했다.

  "역시 일식은 우릴 배신하지 않아."

  내가 예전 여행기에 썼던 대사를 우린 직접 입으로 되풀이하며 초밥과 장어 덮밥을 먹었다. 생맥주도 곁들였다. D가 앞선 두 번의 여행기의 주인공이자 열혈 독자였기 때문에 여행기에 쓴 감상들을 실제 여행에서 다시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일종의 우리만의 정서적 가이드북이랄까. 문득 당사자인 우리뿐만 아니라 여행기를 읽은 (있긴 있을까?) 이름 모를 다른 사람의 여행에도 그 기록이 영향을 미쳤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됐다. 그러면 많은 시간을 취한 채로 보내게 될지도 모르지만.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하고 밥도 먹은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공중 정원에서 커피를 마시며 밤을 준비했다. 우리에겐 술과 시간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커피 바에서 만난 귀여운 친구를 보며 술 마실 생각만 할 순 없었다. 아이는 바에 있는 거의 모든 것에 호기심을 느끼며 이것저것 부모에게 묻고 있었다. 이 반가운 만남에 나는 가만히 서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으악 소리가 날 정도로 천진난만하면서 귀여운 꼬마였다. 한편으론 지친 나머지 성의 없이 대답하는 부모의 태도에도 공감했지만 말이다.







  밤의 호텔은 혼란스럽다. 이곳엔 안락한 집에선 볼 수 없는 불면의 기운이 감돈다. 늦은 시간 호텔 로비 - 우리 호텔에선 공중 정원 - 에 가보면 그걸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책이든 LCD 화면이 달린 기계든 뭔가에 의지해 잠들지 못하는 밤을 조금씩 갉아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호텔은 이 도시에 나처럼 깨어있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를 채집하기 좋은 장소다. 우리는 그 증거를 통해 외로움이 일상적인 감정임을 확인하고, 그걸 한결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밤의 호텔엔 또한 관음증적인 면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 소리에 매혹당한다. 어떤 점에선 청음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 엘리베이터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전자음과 복도의 발소리 등이 나와 비슷한 구조의 객실에 머물고 있는 타자를 상상하게 한다. 노크만 하면 잠시나마 그들의 삶에 끼어들 수 있겠지만, 또한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기에 평행한 삶을 열어젖히고 싶은 욕망은 더욱 커진다. 아마 우리가 호텔 방에 앉아 그렇게 많은 술을 마셨던 이유는 그런 가눌 길 없는 호기심을 지우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호텔에 팽배한 고독에 관한 많은 글이 있고, 나도 그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그러나 고독이 발현되는 방식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철저한 무관심이요 다른 하나는 표현할 수 없는 호기심이다.







  그리고 우리는 꽤 흔들렸다.





Leica Minilux

portra 160

 

iPhone 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