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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샹젤리제 거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도중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거리지만, 내가 만약 이 거리라면 나에게서 이물감을 느낄 것 같았다. 이물감은 예상치 못한 존재에 대한 거부반응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아름다움을 향유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거부반응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척 피곤한 상태였고, 날씨는 너무 추웠다. 맑은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 빛깔만큼 서늘했다.





  내가 본 파리의 야경 중 개선문 전망대에서 봤던 야경이 가장 인상 깊었다. 헥헥거리며 나선 계단을 올라 싸늘한 옥상에 섰을 때, 그때부터 나는 파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막 그치고 시내 전체에 뿌연 안개가 꼈던 밤이었다. 에펠탑 이 층 전망대 높이까지 구름이 내려온 그런 시 같은 밤이었다. 그 순간에 내가 한국이 아닌 다른 땅에서 살아야 한다면 바로 이곳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 이후로 세 번을 더 왔지만, 그 정도의 감흥을 다시 느끼지는 못했다. 밤이 되면 개선문에 다시 올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샹젤리제 거리엔 벤치가 많고 카페테라스도 많아서 앉아 있기에 좋다. 워낙 많은 관광객과 소비자들이 뒤엉켜 있는 곳이라 거리 자체의 매력이 퇴색될 수 있는 건 흠이다. 벤치 위의 두 여자는 딱 봐도 파리지엔의 이미지를 풍겼고, 남자는 전형적인 프랑스 청년처럼 보였다. 파리와 프랑스는 정서적으로 분리된 공간이 아닐까 싶었다. 물리적으로 겹쳐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로가 만나게 되는 것이고, 그게 사람들로 하여금 이 도시에 미치게 하는 것이라고.







  음악을 틀어놓고 연습 겸 놀이 겸 공연을 하고 있는 비보이들도 있었다. 서로 노는 꼴을 보면 딱히 남들 보라고 하는 건 아닌 듯한데 하필 샹젤리제 거리에서 한다는 건, 역시 관객의 시선을 기대하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파란 겨울 속 회색빛 해 질 녘. 같은 곳을 끊임없이 서성대다가 문득 양쪽 건물에 그늘이 진 걸 보았고, 한 번 더 내가 파리에 있음을 실감했다. 파리를 여행하는 재미는 여기에 있다. 체류하는 내내 내가 파리에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는 순간이다. 아마 파리에 사는 사람도 가끔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그런 순간이 한 번 찾아오고 나면 다시 주위 풍경에 관심이 생기고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물감이 조금씩 사라진다.







  이 거리 이름이 발자크가街라는 걸 알게 된다. 손에 헬멧을 들고 있는 남자의 오토바이는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진다. 눈앞을 오가는 파리 시민과 타지인의 비율이 알고 싶어진다.







  로버트 드 니로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관광객을 위한 10유로짜리 삼륜차. 그런데 노트르담 성당과 루브르, 샹젤리제 거리와 에펠탑을 돈다니. 순전히 인간 동력으로만 움직인다면 꽤나 힘 빠질 거리가 아닌가. 정작 이걸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이 여자, 사피아에 관한 이야기는 좀 묘하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 한쪽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그녀가 다가 와 담배를 한 대 달라고 했다. 워낙 담뱃값 비싼 대륙이라 종종 있는 일인데(서구보다 훨씬 저렴하게 담배를 피우는 아시아인들이 담배 인심이 좋다는 걸 모두가 아는 것 같다.), 담배를 나누고 불을 붙여주고 나서 그녀에게 동행자 - 유모차를 탄 아이 - 가 있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한국에 여성 흡연자가 많아도 자기 아이 앞에서 피우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이게 잘한 짓인가 싶었다.

  그녀는 자신을 사피아라고 했다. 아이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대화 내내 그녀의 담배 연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바람은 아이를 지켜주었다.) 그녀의 이름도 겨우 기억했다. 아이가 날 유심히 쳐다보길래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되겠느냐고 묻자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부적절한 셔터 타이밍 때문에 사피아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아이는 이상한 동양 남자의 카메라만 바라보고 있었다. 작별 인사를 나눈 그녀는 다시 유모차를 끌고 거리를 내려갔다. 담배를 피우며 유모차를 끄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자, 담배 인심 좋은 게 항상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이미 아이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익숙한 사람일 것이다. 결국 문제는 아무 생각 없이 담배를 준 나에게 있었다. 두 사람을 보내고 나서야 진상이 드러나며 마음이 불편해졌다. 여행을 가면, 저도 모르게 들뜬 나머지 근본적인 걸 잊을 때가 있다. 담배를 한 개비 주고받으며 현지인과 대화의 물꼬를 튼다는 데 - 그곳 사람들과 뭔가 접점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 열중한 나머지 내 행동의 결과를 예상치 못했다. 유모차와 동행한 엄마라는 걸 몰랐다고 해도, 무지의 결과가 옳지 못하면 무지 또한 죄다. 게다가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묻기까지 했으니! 부끄러운 이야기는 글로 옮겨 전시해 두어야 재발의 싹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







  택배 아저씨, 제 심란함도 함께 가져가 주세요.







  아니면 매혹적인 란제리를 보며 달래야 하는 걸까.







  같은 길을 반복해 걸었다. 들쑥날쑥한 기분 탓인지 아니면 해가 져서 그런지 몇십 분만에 더 추워진 느낌이었다.







  바람이 찬 맑은 겨울의 하늘은 특유의 빛깔을 띤다. 아주 먼 거리에서 짙은 청색 물감 통이 쏟아진 듯한 그라데이션은 사람이 채색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있다. 결국 장소도 기분도 원점으로 돌아온 채 나는 몇 분을 더 기다렸다. 묘한 불편함이 다시 찾아왔고, 사라질 뻔했던 이물감이 여전히 입안에 맴돌았다.



Leica Minilux

portra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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