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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닐라는 교통체증이 심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교외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이 엄청나게 막혀서 짧은 거리에도 몇 시간씩 소비해야 했다. 하지만 여행의 가장 큰 묘미가 걷기에 있을지언정 차를 타고 보는 풍경도 허투루 볼 수만은 없다. 인도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차도 위에선 드러나기도 한다. 특히 고속도로, 휴게소, 교외 풍경 등은 차를 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이국의 정취, 평범한 삶의 조각은 주거지역의 골목길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간식을 사서 시골로 내려가는 고속버스에 올랐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본다. 집과 학교가 있는 익숙한 동네에서 일탈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던 곳은 바로 그 고속도로 위, 등유 냄새 코를 찌르는 휴게소였다.





  버스를 더 많이 타 본 탓인지 나는 기차역보단 고속도로 휴게소가 더 편하다. 여기엔 온갖 음식, 기념품, 편의 시설이 다 모여있다. 주변엔 인가 한 채 없이 황량한 평야뿐이라 마치 섬에 온 듯한 기분도 든다. 인위적이라 거북스러운 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미를 느낀다. 휴게소는 대체로 자연을 거스른다기보단 자연과 타협했다는 뉘앙스를 준다.





  군것질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상하게 군것질거리가 많다는 점도 좋다. 나는 사 먹지도 않을 거면서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을 보며 즐거워한다. 휴게소를 찾은 사람들은 필요하지도 않은 데 돈을 쓰는 바보가 아니라 나름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을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누구도 사치를 부리기 위해 와이퍼를 사거나 종이봉투에 담아주는 작은 밀가루 덩어리에 돈을 쓰진 않을 테니까.





  어딘지도 모를 이 휴게소엔 심지어 여행사도 있었다. 아무래도 시외 버스표 따위를 파는 것 같았지만.





  우리도 서브웨이에서 점심을 먹고, 필요한 사람은 담배를 피우며 마음껏 피로를 풀었다. 마침 D가 좋은 포즈를 취했다. 아니, 그의 좋은 포즈를 운 좋게 담아낼 수 있었다.







  B와 Y. 항상 불을 붙이고 나서야 그곳이 금연 표지판 주위(LNG 탱크 옆 같은)라는 걸 깨닫는 모양이다. 나는 어떻게든 참았다고 기억하지만. 그런데 Y도 금연 아니었나?





  단 한 가지, 땡볕에 세워둔 차 안에 다시 들어가는 것만은 끔찍하게 괴로웠다. 하늘이 푸르면 푸를수록 주차장엔 가마솥 지옥이 가득해진다. 그 속으로 들어가며 비명을 지르는 일도 나름 재미이지만.





  장소가 좀 바뀌어 마닐라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창문이 없는 건지 에어컨이 고장 나 바람은 쐬되 햇볕은 가리고 싶었던 건진 어쨌든 기가 막힌 블라인드였다. 회사 로고와 색깔이 딱 맞는 걸 보니 유니폼일 수도 있겠다.





  이번 여행에선 돌아다닌 곳이 얼마 되지 않기에 차에서 보는 거리의 풍경은 간절하리만치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칠이 다 벗겨지고 시멘트 구조가 다 드러나도 살아가는 덴 전혀 지장이 없다. 온통 돌이나 죽은 나무뿐인 풍경이지만, 난 끝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했다. 저 커다란 글씨체의 간판은 화룡점정 격이었다.





  삶의 적나라한 현장을 포착할 때 오히려 힘을, 역동하는 기운을 느낀다. 내가 슬퍼지는 지점은 그 휴지기다. 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멍하니 걸터앉아 산산조각난 의식을 주워 맞추는 그 순간이다. 무거운 목제 기둥이라도 함께 들 사람이 있다면, 감히, 그들의 발걸음이 흥겨웠다고 기억하겠다.





  모든 건물이 회색이기에 이 도시 사람들은 유독 원색의 간판을 달고 원색의 차를 몰고 원색의 옷을 입는 것일까?





  어딘가에서 상수도관이라도 터졌는지 거리가 온통 물바다였다. 빽빽하게 밀린 자동차들은 보트처럼 도로 위를 천천히 미끄러졌다. 단층 짜리 건물들은 수상 가옥이라도 된 양 그들을 배웅하고 마중하기를 반복하며 이 뜨거운 여름날을 기념했다.




Canon EOS-M + 2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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