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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전날 과음하면 안 된다는 지극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어겼다. 대가는 초 단위로 밀려오는 두통으로 톡톡히 치른다. 버스에 오르기 전 숙취 해소 음료를 마셨지만, 괄목할 만한 효과를 보기엔 역부족이었다. 기대를 못 이겨 마신 술은 아니었다. 다음 날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것도 잊을 만큼 엉뚱한 이야기에 푹 빠져 마신 술이었다.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거울을 보며 묻고 싶었으나 어쩌면 이건 실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백한 고의다. 여행이 여자라면 일부러 관심 있는 척하지 않으려고 그 앞에서 딴짓을 하는 농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여행은 여행이고, 술은 술이지. 문제는 이래 봤자 잘 보일 수 있는 대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런다고 낯선 도시가 내 관심을 끌기 위해 어마어마한 일을 벌여 놓을까? 턱도 없는 소리다.






















 혼자 가는 여행은 생각보다 여유롭고, 예상보다 덤덤하다. 아니, 알고는 있었다. 혼자든 둘이든 넷이든 여행이라는 단기 행사로는 인생을 뒤흔들 묘안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아주 미미한 작용으로 그 방향을 살짝 비틀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리라는 걸.
 나는 며칠 동안 혼자 시간을 보내고 서울보다 훨씬 일찍 내리는 눈을 보며 글을 쓰고 싶어 삿포로행 비행기에 오른다. 지난 몇 개월은 어땠는가. 평일은 출퇴근만 하고 나면 불붙인 종잇조각처럼 날아가 버리고 주말은 며칠 굶은 사람 앞에 던져놓은 음식처럼 탐욕스럽게 허비됐다. 출구 없는 미로였으며 어느새 미로가 익숙해지고 있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속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동굴 밖 존재라고 확인하기 위해,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확신하기 위해 혼자 있어야 했다. 그뿐이었다. 잔뜩 흥분하지 않는다고 나쁠 것도 없었다.














 모처럼 가방 안에 새 노트를 넣었다. 표지엔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이 얹어져 있고, 내지는 선 없는 무지다. 자, 누구를 배려할 일도 신경 쓸 일도 없으니 솔직하게 이곳을 채워 보자. 솔직하게 걷고 솔직하게 멈춰 서도록 하자. 욕심을 덜고, 마음은 흔들리게 놓아두자. 다만 눈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 만은 끝까지 져버리지 말자. 일기예보는 영상 언저리의 화창한 날씨를 예고하지만, 그래도 운을 한 번 믿어보기는 하자.






Canon EOS-M + 2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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