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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 역부터 내가 묵을 호텔에서 가까운 스스키노 역까지는 지하철 난보쿠선(南北線)으로 두 정거장이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이제 막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면 택시나 지하철로 숙소까지 이동하는 게 상식이겠다. 나 역시 비행기를 탈 때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혼잡한 대기실로 내려와 출구를 찾아 헤매다 북쪽 입구 앞에 섰을 때, 유리문 밖으로 새카만 하늘과 어둑어둑하게 꺼져가는 빌딩의 불빛을 보았을 때, 생각이 달라졌다. 저 어둠 속으로 당장 사라지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걸어서 이 도시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지하철 두 정거장 정도는 걸어가도 된다는 것 역시 여행자의 상식 중 하나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나가려니까 너무 추운 것이다. 그래서 삿포로 역부터 스스키노 역을 잇는 길고 긴 지하도를 통해 가야겠다는 절충안을 찾았다. 지하철역 세 곳을 잇는 지하상가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춥지도 않고 볼거리도 많다. 게다가 (실상 일직선으로 이어져 길을 잃은 위험은 적지만) 지리를 파악하는 데 도움도 될 것이다. 어차피 오늘 저녁엔 시간에 구애받는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숙소까지 걷기로 했다.
 처음엔 지하상가로 빠져나가는 길을 못 찾아 좀 헤맸지만, 방향을 잡으니까 앞으로 걷기만 하면 됐다. 십오 분 넘게 걸리는 이 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삿포로 에키마에도리(札幌駅前通)의 지하보도였다. 초록빛이 살짝 감도는 어둡고 탁한 황색 불빛 아래 넓은 공간이 열려있고, 그 안에 좌측보행을 하는 인파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쪽 길로는 노천카페처럼 꾸며진 식당이나 카페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매장 위로 차양이 처져 있고 야외용으로 디자인된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있는 광경이 새로웠다. 하긴 여긴 시월부터 눈이 내릴 정도로 강설량이 폭발하는 도시다. 일 년 내내 쾌적한 야외에서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기분을 내려면 이런 아이디어가 나올 만도 하겠다. 꾸밈도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스름 즈음의 거리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지하보도엔 십일월 중순부터 시작한 삿포로 아트 스테이지도 열리고 있었다. 이건 한국에서 관광청 홈페이지를 통해 알고 온 사실이었으나 각종 아트 작품이나 퍼포먼스가 열리며 프리마켓이 큰 인기라는 설명이 다소 부끄러울 만큼 인상적이진 않았다. 그나마 비닐로 만든 거대한 덴구(天狗. 일본의 전설 속 괴물로 코가 긴 게 특징이다.)가 제일 볼 만 했다. 사우나에 모인 남자들이 서로 배꼽 아래를 흘끗거리며 자존심을 겨루는 소극 같았다. 제작자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나는 위트를 보았고, 위트는 언제나 기쁨을 준다.



























 스스키노 역 주변까지 가는 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도리 역을 지나 폴 타운 상가로 들어갈 즈음엔 제법 지쳐있었다. 어깨에 멘 가방이 불어난 체중처럼 내 몸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고, 캐리어는 모터가 회전하는 듯한 소리로 제 무게를 사방에 떠벌렸다. 게다가 더럽게 더웠다. 팔에 걸쳐둔 코트는 접촉면을 덥히다 못해 그 열기를 온몸으로 전달했다. 카메라 들 기력도 없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지하상가를 걷는 기분을 망치지는 못했다. 어릴 적부터 지하상가는 내게 별세계였다. 한여름이든 한겨울이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이곳은 변함없이 제 쾌적한 혈관을 내어주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지하상가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웨스틴 조선 호텔 주변에서 시작되는 소공동 지하상가는 지금은 롯데 영플라자가 들어선 자리에 있던 미도파 백화점을 거쳐 명동 들머리까지 이어졌다. 아버지의 회사가 그 부근이라 어머니와 자주 놀러 가고는 했었는데 어느 날은 아버지가 백화점에 급히 볼 일이 있다고 먼저 가 버려 혼자서 당신을 쫓아간 적이 있다. 처음엔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연말이라 사람도 많았고 꼬맹이 주제에 보통 사람보다도 빠른 아버지의 걸음을 따라가기가 힘에 부쳤다. 점점 멀어지는 등을 보며 이대로 가면 당신을 놓칠 거라는 걸, 느즈막이 오시는 어머니와도 멀리 떨어져 있어 길을 잃고 말리라는 걸 깨달았다. 매 걸음마다 예감이 현실이 되어가던 무기력함이 생생하다. 어릴 때 귀가 따갑도록 듣던 말이 차조심 하라는 것과 길을 잃어 미아가 되면 안 된다는 거였다. 그런데 교통사고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 다시는 집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니! 바싹 겁이 났다. 처음엔 울다가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일단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화장품 매장 점원을 붙잡고 길을 잃었다며 하소연을 했다. 혼자 지하상가를 뛰어 백화점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던 기억은 또렷하지만, 이상하게 그 이후의 기억은 희미하다. 아마 부모님의 성함을 알려준 다음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을 것이다. 화장품 코너의 조명은 유난히 희고 밝았다. 삼십 분 정도 후에 - 훨씬 짧은 시간이었을 테지만 나한텐 그 정도로 느껴졌다. - 방송으로 내 소식을 들은 부모님이 나를 찾으러 왔다. 처음엔 혼쭐이 났으나 나중엔 점원을 통해 이런 칭찬을 들었다. 애가 침착하게 부모님 이름이며 주소며 잘 늘어놓더니 울지도 않고 얌전히 기다리더라고. 아, 그 격려의 달콤함이란. 미아가 될 뻔한 공포를 칭찬 한마디가 웃돌아 버린 것이다. 이후로 지하상가는 두려운 기억으로 남기는커녕 기쁨 주는 놀이터 정도로 각인되었다. 참 단순한 놈이 아닐 수 없다.
 그때 일은 내게 두 가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하나는 길을 잘 찾아야 한다는 필요 때문에 얻어진 방향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빠른 걸음이다. 다시는 아버지를 놓치지 않아야겠다고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걸음이 완성되고 나니까 아버지와 함께 걸을 일은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배운 방향감각과 속도로 나는 이곳을 걷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삿포로 역에서 스스키노 역까지 이어진 지하보도는 일자 일변도라 샛길로 빠지지만 않으면 절대 길을 잃을 위험이 없는 곳이다.) 누군가 쫓아갈 사람도 없고 급하게 걸을 일도 없지만, 나는 이후로 쭉 이 지하 세계를 걸어온 기분이다. 유달리 희고 밝은 조명 역시 여전하다. 그 빛은 나를 여태 세속의 세계로 매혹해 풀어줄 줄 모른다.












Canon EOS-M + 22mm / 5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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