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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홀짝이며 생각할 시간을 가져. 내가 어디에 있었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6층에서 맞는 바람은 엄청났다. 호텔 사이로 달려드는 바람, 운하를 스쳐 바다로 불어가는 바람, 정신없이 건물을 오르내리는 바람. 폐쇄된 수영장을 따라 건물 한 바퀴를 돌면서 머리카락이 멋대로 춤을 추는 느낌을 즐겼다. 이대로 날아오른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매일 밤 난 너에 대해 갖가지 생각을 해."

 

  밤은 화려하지 않았다. 호텔방마다, 을씨년스러운 주차장마다, 건물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간간이 소음이 들려오는 거리마다 백열등 몇 개가 섬처럼 반짝일 뿐이었다. 커튼이 쳐진 건너편 호텔 창문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누군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들은 뭘 먹었을까? 창밖을 보며 마시고 있는 술은 맥주일까 보드카일까? TV에 틀어 둔 프로그램이나 전등 아래 펼쳐준 책의 제목은 무엇일까? 그들 중 외로운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야밤에 낡은 호텔의 황량한(더불어 공사 중인) 야외 수영장을 서성이는 나를 보고 비슷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 촌스러운 형광 하늘색 반바지는 잠옷인가, 머리에 뒤집어쓴 헤드폰에선 무슨 노래가 나오고 있을까, 설마 지금 저 몸동작 더러 춤이라는 건 아니겠지. 우리가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이런저런 관성적인 호기심들.

  그의 추측대로 나는 잠옷에 상의를 걸치고 있었고, 피가 어떻게 내 몸을 돌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알코올에 취해 음악에 맞춰 또는 바람에 떠밀려 몸을 흔드는 중이었다. 밤이 되자 갑자기 찾아온, 태생을 알지 못하는 외로움이 나의 파트너가 됐다. 그런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때로는 가슴 서늘해지는 감정도 이렇게 사람을 위로하는 아군이 되곤 한다. 난간에 서서 술에 취해 찧고 까부는 무리를 보고, 이어폰을 낀 채 끝도 없이 달리는 낯선 이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 바람이 어둑어둑한 밤을 정복했을 때, 그 노래가 나왔다.

 

“은행엔 돈이 쌓여있고 차도 새로 뽑았어. 난 모든 걸 가졌지, 너만 빼고 말이야.”

 

  여행을 하며 들었던 재생 목록을 이야기하며 히트곡을 거론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밤에 나를 사로잡은 노래는 제삼 세계나 인디씬의 음악도, 흘러간 명곡도, 학창 시절에 들었던 발라드도 아닌 엘엠에프에이오의 원 데이였다. 이미 수십 번은 들은 곡인데 전자음으로 시작하는 도입부가 이렇게 강렬했던 적은 없었다. 지금 들리는 음악이 헤드폰에서 울리는 소리인지 아니면 바람이 연주하는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서서히 보이지 않는 파티에 초대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밖에 이 흥분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디제이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 때가 진짜 좋아.

다들 노래를 따라 부르고, 풀엔 예쁜이들이 가득하지.”

 

  대체로 성에 관대하고 자의식 과잉이며 재력이든 명성이든 안 갖춘 게 없는 클럽 음악의 화자들은 그렇지 않은 청취자들에게 환상을 들려보여준다. 흥겨운 비트와 절정 같은 믹싱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모두 세상의 중심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물론 어떤 식으로 세계 지도를 펴든 하와이를 세상 한가운데 있는 섬이라 보긴 어렵다. 마찬가지로 어떤 잣대를 집어들든 나 역시 성공의 변두리에서 헤매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하지만 바로 지금처럼, 모두가 주목하는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할리우드 뷰를 가진 언덕 위의 집도, 도장이 가득 찍힌 여권도, 뿌리고 다녀도 남을 정도로 많은 돈도 없지만 아무도 없는 그늘진 건물 구석과 시원한 바람과 냉장고에서 식어가는 술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널 갖게 될 그날, 난 그날을 기념할 거야.”

 

  볼륨을 높였다. 밤과 비트와 바람과 알코올의 합주가 나를 높이 날아오르게 했다.




canon A-1 + 24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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