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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으로부터의 피로인지도 모른 채 그냥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날을 거듭할수록 늘어가는 욕심과 날이 거듭되어도 변할 줄 모르는 두려움이 공모하여 빚은 피로일 것이다. 나무 그늘에 몇 시간씩 누워있는 오후를 상상한다. 책을 읽다가, 무거운 눈꺼풀 아래 쓰인 꿈을 읽다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 분명 읽긴 했을 텐데 생소하기만 한 문장을 다시 읽어도 좋겠다. 실수로 한 곡 반복을 하는 바람에 한 시간 내내 같은 곡을 들어 놓고선 눈을 뜨자마자 앨범이 한 바퀴 돌았구나 착각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잔뜩 달궈진 아스팔트 위를 달려온 바람이 나한테 걸려 넘어지길 기다린다. 그러면 길고 뾰족한 잎이 몸을 흔들며 그늘의 가장자리를 흩트린다. 사라락 옷깃 스치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이파리와 이파리 사이로 태양의 지문이 어지럽게 흔들린다. 부러 누렇게 만든 책장에도 부정형의 하얀 빛이 몇 점 떨어진다. 이러고 있은 지 한참이나 지난듯한데 시간은 아직도 저 뒤에서 꾸무럭거리고 있다. 그게 참 안심이 된다. 쫓길 일이 없다. 그러다 음악을 끄고 책을 덮어도 내 몸 하나 가릴 그늘은 그대로 남아있으니, 난 애초부터 무언가를 듣지도 보지도 않았던 셈이다.


  하와이엔 그런 그늘이 참 많았다. 하지만 난 그곳에서도 무거운 가방을 지고 어딘가로 또 어딘가로 계속 걸어나가기만 했다. 이 모퉁이만 돌면 이 횡단보도만 건너면 놓쳐선 안 될 장면, 만나야만 하는 사람, 누려야 마땅한 시간과 맞닥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엔딩은 정해져 있었는데도 말이다. 마치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 안심하면서도 결국 하찮은 결과물만 받아드는 매일매일을 꿈속에서도 재탕하는 기분이었다. 보라, 무위無爲 불안한 영혼은 쉬고 싶어도 쉬는 법을 모른다. 여유를 찬양할 수는 있되 자기 것으로 만들 줄도 모른다. 아마 더 지치다 못해 본능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이 어느 쪽인지 깨닫게 될 때야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세상이 먼저 곁에 올 수 있다는 이치를 배우게 되리라. 그렇게 짐을 내던지고 그늘에 눕는 법을 알게 되리라.



canon A-1 + 24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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