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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 아일랜드로 떠나는 이른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네 시 반에 눈을 떴다. 하늘이 아직 짙은 남색을 게워내지 못한 시각이었다. 헐레벌떡 준비를 마치고 호텔 로비로 내려오자 지나치게 부산을 떤 탓인지 갑자기 힘이 쭉 빠지고 울적해졌다. 마우이 섬이나 빅 아일랜드로 떠나는 낯선 이들과 함께 15인승 밴에 구겨 앉아 공항으로 향했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사람이 이런 기분일 거란 생각이 들자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워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새로운 장소에 대한 막연한 기피는 이렇게 약속이라도 한 듯 여행 당일 아침에 찾아온다. 이런 곤혹스런 증후군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할 수 있는 만큼 빨리 터미널에 들어가 할 수 있는 만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2층짜리 낡은 건물이 길게 이어진 호놀룰루 공항은 동네 토박이 의원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가벼운 보안 심사를 받고 주내선 출발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자 의사 어르신이 볼기에 주사라도 놓은 듯 감정의 다이얼이 정반대로 돌아갔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날 들뜨게 했다. 지나치게 서두른 덕에 관광객과 현지인이 뒤섞인 대기실에서 죽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하늘에 연보라와 분홍을 혼합한 빛이 천천히 펼쳐지더니 커다란 창을 투과해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터미널엔 예상보다 사람이 많았다. 타일에 기름 떼가 묻은 스낵바는 아침을 먹지 못한 승객을 고무하려는 사명감을 띠고 인스턴트 요리를 조리 중이었다. 반대로 주내선 대기실 양쪽에 하나씩 자리 잡은 스타벅스는 정신을 일깨우려는 임무를 맡고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있었다. 하루의 시작을 구경하며 천천히 터미널을 걸어 다녔다. 그러다가 에이프런과 활주로가 보이는 창가 자리에 그냥 앉아있어 보기도 했다.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사연은 이 작은 공간 속에도 혼재해 있으며, 그걸 지켜보는 덴 혼자가 제격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영미 단어 중에 solitude가 있다. 사전의 안내를 따르면, 이 [살:러튜:드]는 기꺼이 받아들 일수 있는 외로움, 긍정적인 고독을 뜻한다. 쓸쓸하다, 외롭다, 고독하다처럼 감정의 강도에 따라 표현을 나눈 한국어는 좀 더 정확하고 풍부하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화자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외로움을 따로 정의해 놓은 영미권의 언어에도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나도 ‘낭만이 있는 외로움’, ‘사색을 위한 고독’, ‘영혼이 기뻐하는 쓸쓸한 시간’ 따위의 의미를 간결하게 표현할 낱말을 만들어 지금 이 순간을 기념하고 싶었다.

 

  꿈속에서 꿈을 꾸듯 여행 중에 여행을 떠난다. 게이트 앞에 줄을 섰을 즈음엔 애초에 하와이로 올 때보다 더 많이 설렜다. 단순히 이웃 섬에 가는 것뿐인데 낯선 곳에서 더 낯선 곳을 찾아, 마치 영영 길을 잃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canon A-1 + 24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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