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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종종 뚜껑이 열리는 기분을. 글자 그대로 카메라 뚜껑(사실 뚜껑이겠지만)이 열리는 바람에 감겨 있던 필름이 홀라당 타버릴 때의 그 기분을. 오 년이면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닌데 아직도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그런 실수를 한다. 그것도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씩 저지른다. 필름을 교체할 때 물려있던 놈을 감지도 않고 필름실을 여는 경우가 제일 흔하고, 노출 보정 다이얼의 노브[각주:1]가 가방 끈에 걸려 빠지는 바람에 뒤판을 덜렁덜렁 열고 다닐 때도 있었다. 물론 여분의 필름을 몇 통씩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디지털만 사용해 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몸은 피곤하고 정신은 딴 데 팔리기 일쑤인데 꼭 중요한 순간에만 물려있던 필름을 다 써버리는 징크스를.

  , 어쨌든 하와이에선 이랬다. 



  빅 아일랜드에 도착해 안내원을 만나 두 명의 신혼부부와 같은 차에 올랐다. 두 커플이 보내는 시선 - 남자 혼자 여기서 뭘 하는 걸까 - 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받아내며 하루짜리 투어를 시작했다.

  차를 타고 얼마 달리지 않아 빅 아일랜드가 오하우 섬과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건물은 낡았고 사람은 적었으며 숲은 비할 데 없이 더 우거졌다. 이곳은 급속히 개발된 섬보다 야생에 가까웠다. 여기에 비하면 와이키키는 일종의 세트장이며 거리를 오가는 이방인들은 희극만 연기하려는 배우나 다름없었다.

 

  새벽에 내린 비가 마르지 않은 허름한 도로 위로 해풍이 불었다. 습하고 서늘했다. 안내원은 밤까지 있으면 꽤 추울 거라고 일러주며 비도 워낙 자주 오는 곳이니까 미리 우의를 준비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말 잘 듣는 다섯 명의 남녀는 게이 커플이 운영하는 상점에 들러 우의를 집어들었다.

  우의를 사고 들른 첫 번째 코스가 릴리우오칼라니 가든이었다. 일본 정부가 이 정원을 만드는 비용의 상당 부분을 투자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릴리우오칼라니 가든은 완벽한 동양풍이었다. 일본과 중국의 분위기가 혼합된 정원엔 아직 빗물을 털어내지 못한 이파리들이 회색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잔디를 밟으면 땅이 숨을 쉬는 것처럼 발 언저리로 물기가 튀었다. 그 차가운 감촉이 좋았다. 산책을 하라고 이 길이 있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오게 된다. 일본 신사에서 볼 수 있는 도리이鳥居 지나 동양화 속으로 들어온 기분을 내고 있는데 마침 물려놓았던 필름이 끝났다. , 그때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수백 년은 자란 것 같은 거대한 나무의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길 하나 너머에 펼쳐진 북태평양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다급하게 찍어야 할 장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 옆에서 재촉했던 것도 아닌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카메라의 뒤판을 열었다. 그때 필름 베이스의 표면에 발라진 감광유제가 일순간에 휘발되는, 햇빛이 그 연약한 막을 할퀴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릴리우오칼라니 가든의 사진은 그렇게 증발했다. 하루의 시작, 새로운 장소, 제법 고즈넉했던 산책길에서조차 저도 모르게 열지 말아야 할 (어둠) 상자를 열어버렸으니, 그저 웃음 밖에 나오질 않았다.

 

  여행 중 필름으로 찍는 사진은 이미지 센서에 박아넣는 것보다 한장 한장이 더 소중하다. 필름엔 무한정의 미학이 없다. 그런데 꼭 여행 중에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걸 보면 실수 역시 어떤 필연에 의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릴리우오칼라니 가든의 사진엔 화로에 던졌다 꺼낸 것처럼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은 너무나 선명해서 건드리면 손을 델 것만 같았다. 화상을 입은 사진은 눈으로 직접 보았던 장면과 충돌했다. 나는 아예 처음 보는 곳을 보는 것처럼 기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몰의 정원, 세상 마지막 순간의 정원에 들렀다가 온 게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canon A-1 + 24mm

iPhone 4



  1. 노출 보정 다이얼에 달려있는 작은 손잡이로, 필름을 감거나 잡아당겨서 카메라의 필름실을 여는 용도로 사용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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