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네 시간도 채 자질 못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남부터미널에서 6 30분경에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달렸다. 버스를 타러 가며 전날 홍콩행을 기념한답시고 들이부은 술의 양을 가늠해 보았다. 다행히 두통이 아니라 속 쓰림의 형태로 찾아온 숙취는 기념주로 테킬라를 마셨던 선택이 탁월했음을 증명했다. 부족한 잠은 공항으로 가면서 보충하면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버스에 올라도 잠이 오지 않았다. 텅 빈 새벽 도시는 잠들기보단 저를 봐주길 원했다. 푸른색 필터를 끼운 것처럼 선명한 날 빛을 등진 건물들이 감은 눈 저편에서 끝없이 아른거렸다. 그나마 풍경이 단조로워지는 올림픽대로에 진입하고 나서야 비로소 잠들 수 있었다.



 

  D는 이번 여행의 동반자다. 누군가와 둘이 여행을 하는 게 참 오랜만인데, 그 마지막 파트너도 팔라우를 함께 갔던 D였다. 같이 홍콩을 간다고 결정한 순간부터 우리에게 관광이란 단어는 의미가 없었다. 놀 수 있을 만큼 놀고 온다. 서로 포기와 합의가 빠르다는 공통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번 여행이 기대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둘 다 상당한 애연가와 애주가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제의 기념주도 D와 마신 술이었는데 여행 전날임에도 자중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걸 보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대충 감이 왔다.

  버스에서 먼저 잠든 건 D였고, 공항에 도착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 나였다. D가 나를 깨웠을 때 여행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은 채로 눈을 떴다. 새벽 도시는 꿈의 일부인 것 같았고, 침대가 아니라 딱딱한 시트 위에서 일어났다는 게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다 차에서 내려 차가운 아침 바람을 맞고 나서야 비로소 현실감이 돌아왔다. 버스 짐칸에서 캐리어를 꺼낼 땐 그 현실이 꽤 달콤하기까지 했는데, 내 손에 쥐어진 (정확히 휴대전화에 들어가 있는) 홍콩행 항공권 덕분이었다. 분명하게 찍혀 있는 비행 편수와 출발 시각 앞에서 숙취와 피로는 자리를 비킬 수밖에 없었다. 모든 여행에 그것을 실감하게 되는 지점이 서로 달리 존재한다면, 오늘은 바로 가을의 아침 공기가 방아쇠를 당긴 셈이었다.


 



::

  일부러 출발 시각보다 일찍 도착해 자동출입국심사 서비스도 신청하고, 공항에서의 아침 식사도 즐기며, 구매 가능성과 상관없이 면세점도 천천히 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편의를 위해서라기보단 혼란을 주기 위해 규모를 키운 게 분명한 인천공항의 면세점은 언제나 우리를 촉박하게 몰고 간다. 이곳을 여유롭게 걸어 다니며 알뜰한 소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출발 다섯 시간 전에 도착할 만큼 부지런한 사람이거나 이륙 시간을 한참 잘못 안 사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나처럼 쇼핑 레벨이 떨어지는 위인은 어떤 매장에서 무엇을 사겠다는 확고한 계획 없이는 살 수 있을 만한 게 거의 없다. 그나마 술과 담배가 만만하달까.

  그래도 D가 한 매장에 볼일이 있었다. 하지만 아침도 안 먹었고 탑승동까지 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면세점을 떠날 수는 없었다. 아예 술을 한 병 사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D의 제안 때문이었다. 밤에 호텔방에서 한 잔씩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아이디어였는데 나에게도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주류 판매장은 면세점에서 유일하게 호객 행위가 성행하는 곳이다. 색도 모양도 참 다양한 술병을 구경하면서 몇 번이고 위스키를 물리치고 추가 할인까지 된다는 코냑에 잠깐 혹하다가 마침내 종착점을 찾았다. 주종은 드라이 진. 봄베이 사파이어의 파란 병과 고급스러운 홀로그램 패키지에 (그리고 그 저렴한 가격에) 끌린 것이다. 무려 일 리터짜리를 계산하며 이걸 다 마실 수 있겠느냐며 웃었지만, 그것이 괜한 걱정이었음을 깨닫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탑승동으로 넘어오자 캐세이퍼시픽의 승무원들이 파이널 콜을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객터미널과 상반된, 한가하다 못해 텅 빈 분위기였다. 우리에겐 담배 한 대 피울 여유밖에 없었지만 터미널로 지체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즐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공항은 정서적으로 한 나라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장소다. 그러므로 공항의 건축 양식엔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그 사실을 끊임없이 각인시킬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차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던 인천 공항은 두 여행자를 배웅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

  몇천 원 더 싼 캐세이퍼시픽 티켓을 끊지 않고 굳이 타이 항공을 결제한 건 그냥 둘 다 타이 항공을 타보고 싶었기 때문. 하지만 그 사소한 호기심이 여행의 진로를 결정할 줄은, 아니 일종의 계시가 되어 여행의 진로를 결정하게 만들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 계시가 뭐냐고? 음료 카트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봄베이 사파이어였다. “타이 항공은 진도 주는구나!” 전날 마신 술이 다 깨지도 않았지만, 만찬의 식전주를 들이라 명하는 것처럼 진토닉을 주문했다.



  그 달콤씁쓸텁텁한 음료가 들어가자 과연 술과 여행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술은 피로와 긴장을 덜어주고 시시각각 변하는 외부의 환경에 더 무방비 상태로 반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게다가 진 토닉은 - 이번 여행의 테마 알코올답게 -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아도 이미 목적지 위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효능을 갖고 있었다아무리 그래도 여행이라면 다양한 걸 보고 느껴야 마땅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깨끗이 접어버린 우리는음주 가무를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젖혔다.

  비행기에서부터 술판을 벌이자 세 시간 반이 조금 넘는 비행이 참 가뿐했다. 홍콩에 대해서 아는 게 쥐꼬리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여행안내서라도 읽어봐야 마땅했지만, 이미 취해버렸으니, 그냥 여행 노트를 정리하고 잡지나 들추는 게 단거리 비행에 대처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굳게 믿고 말았다.



   비행기는 승객의 반쯤은 홍콩에 떨구고 나머지 반은 방콕으로 데리고 간다. 신이 나서 이대로 방콕까지 가버리자는 헛소리를 하다가 첵랍콕 공항에 내렸다. 첫인상은 다른 공항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바로 입국 절차를 받으러 갈 수 있었지만, 통로를 나오자마자 보이는 흡연실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홍콩어가 들리는 연기 자욱한 공간엔 아무도 관심 없는 텔레비전이 혼자 떠들어대고 있었다. 외국에 가면 평소엔 관심도 없던 텔레비전이 꼭 눈에 띈다.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언어가 고향과는 전혀 다른 장소에 왔음을 실감하게 하기 때문이다.

  줄이 아주 길었던 입국 수속을 마치고 벌써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회전 운동을 하고 있는 짐을 찾은 후 세관으로 진입했다. 홍콩은 열아홉 갑이 아니라 열아홉 개비가 넘는 담배를 반입하면 세금을 때린다는 면세점 직원의 경고를 “걸리면 세관원 얼굴에 던져버리지 뭐.”라며 의기양양하게 무시했었지만, 소심한 혈액형이라 내심 걱정이 됐다는 점을 숨기진 못하겠다. 그러나 우려했던 것과 달리 (우리가 비싼 걸 사서 들어올 만한 행색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만) 무탈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세관까지 빠져나오자 완벽히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아무도 우리의 이름이 적힌 미팅 보드를 들고 있지 않은 만남의 장소를 쓸쓸히 지나 충전식 교통카드인 옥토퍼스 카드를 사고, 캐리어를 질질 끌며 꾸역꾸역 흡연 구역을 찾아갔다. 도심으로 진입하는 공항철도 승차장과는 정반대 쪽이었지만 사람에겐 기념해야 할 의식이란 게 있는 법이다. 순식간에 땀이 밸 만큼 후텁지근한 아열대 기후의 바람을 맞으며 불을 붙이려는데 한 남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통화하며 우리 옆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 손에 쥔 옥토퍼스 카드와 지나치게 큰 홍콩 달러 지폐가 갑작스레 친근해 졌다. 드디어 홍콩에 왔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여행기라기보단, 여행지에서 음주와 흡연이 두 남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보고서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canon A-1 + 50mm

iPhone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