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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시간 전에 먹은 기내식만으론 피로를 감당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호텔로 오며 지나쳤던 현지 식당들을 떠올려 봤지만, 지금 당장 도전하긴 무리였다. 안전한, 보장된, 그러면서 우리가 좋아할 만한 메뉴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햄버거 같은.

  방 크기에 적응을 좀 하고 나서 (다시 들어올 때 또 놀라면 안 되니까) 호텔을 나섰다. 로비엔 페인트 냄새와 분진이 떠돌고 있었다. 계단 한쪽은 막힌데다가 형편없이 좁아서 단체 두 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 맞닥트려도 엉겨붙어 지나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공사가 끝나면 최소한 호텔 외관보단 그럴싸하게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니 똑같이 뜨겁고 습한 거리라도 발걸음이 가볍다. 지도 없이 낯선 길을 따라 걸으며 여행의 즐거움 중에서도 스릴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간과 반드시 봐야 하는 대상에 대한 부담을 버리면 여행이 참 수월해 진다. 우리는 직감과 즉흥적인 욕구에 충실하기로 했고, 우연의 여신 손에 몸을 던지기로 했다. 나와 D는 평생 다시는 못 올 것처럼 독하게 움직이는 여행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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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까지 걸어왔던 길은 버리고 좀 더 동네 깊숙이 들어가기로 한다. 우리 호텔과 대조적인 호텔을 하나 지나 번화가로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새삼 건물이 높다는 걸 느낀다. 1970년대에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며 세워진 주거용 아파트는 좁은 땅덩어리에 수많은 사람을 재워야 한다는 일념 아래 이렇게 좁고 높게 자라났다. 이를 두고 홍콩이 추구하는 고효율성의 단면을 볼 수 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과 사십여 년 만에 페인트가 다 벗겨지고 철로 된 모든 부속은 녹이 스는 현실이 과연 효율적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건물은 얼마나 다닥다닥 붙어있는지 전체가 하나의 빌딩처럼 보일 정도다. 각 건물을 구분하기 위해 벽에 어떤 색깔을 칠해놓았는지, 때가 잔뜩 낀 경계선은 어디 있는지 유심히 관찰해야 했다. 벽 위는 수많은 창문과 철제 난간과 에어컨 실외기가 장식하고 있는데, 상황이 이러니 외벽에 낀 때와 먼지를 벗겨 내지 못하는 이유도 알 만했다. 곤돌라를 내릴 공간조차 없어 보였다. 외벽을 청소하려면 아마 암벽등반 전문가를 불러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묘사를 한다고 해서 풍경이 혐오스러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나의 정체성에 딱 들어맞는 도시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낡고 획일적이면서 가만 보면 들쭉날쭉한 도시를 걷고 있으면 까닭없는 아련함을 느낀다. 어릴 적 아파트는커녕 빌라에서도 살아본 적이 없을 때, 고속도로를 오가면서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았던 기억 때문이다. 무작위로 켜진 불빛은 하나의 상자 속에 모여 있는 각기 다른 삶을 상상하게 했다. 그 미지의 공간은 황량하면서도 동시에 따스했고, 그런 충돌이 그곳을 완벽히 딴 세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 몽콕이 바로 그런 정서를 곱절로 되살렸다. 이기적인 이야기지만 나 역시 이런 도시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가끔 여행자의 자격으로 찾아와 고대의 건물 숲을 거닐며 시대의 동행자들이 얼마나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정서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지 실감하고 싶다. 우리는 조각조각 떨어져 서로를 바라보되 하나로 합쳐질 순 없는 운명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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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블록 안 가 맥도널드를 찾았다. 심지어 스물네 시간 영업점이다. 밤에 배가 고플 때 찾으면 딱 맞겠구나 싶었는데 이번에도 속단은 말았어야 했다.

  홍콩의 맥도널드는 저렴한 가격으로 우리를 기쁘게 했다. 빅맥 버거 세트가 한국의 런치타임 세트 가격과 비슷했던 걸로 기억한다. (반대로 커피는 더 비쌌다.) 원래 빅맥을 먹으려고 했지만 외국 맥도널드에 가면 그 나라에만 있는 햄버거를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선 불고기 버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쇼군이라는 햄버거가 있었다. 선택사항은 계란을 넣느냐 마느냐. 힘이 될 만한 건 모조리 먹어치워야 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계란 프라이가 들어간 쇼군 버거 세트 두 개를 주문했다.

  매장은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차 있었고, 외국인은 오직 우리뿐이었다. 뻘쭘한 표정으로 매장 안을 떠돌다가 운 좋게 막 주인이 떠난 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자기가 먹던 걸 치우지 않는다. 앞사람이 먹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탁자를 앞에 두고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고민했다. D가 안내서에서 여긴 원래 그렇다고 본 적이 있다는 설명을 해주고 나서야 종업원에게 최대한 많은 일거리를 주고자 노력하는 감동적인 문화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햄버거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상한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다니는 남자애도 있었고, 똥 씹은 표정의 가족도 있었으며, 젊은 연인에 혼자 온 사람도 꽤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노인이었다. 어떤 할머니는 우리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테이블에 앉아 감자튀김을 앞에 놔두고 주변을 계속 노려보고 있었는데, 특히 우리를 당장 죽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참아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기쁜 마음으로 쇼군 버거를 받아 포장지를 까는데 먼저 한입 문 D가 움찔했다.

  “뭔가 이상해.” 공포 영화에서 뭔가가 튀어나오기 전에 주인공이 내곤 하는 목소리였다.

  과연 아주 미약하게,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기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됐다.

  “괜찮은데?”

  “계속 먹어 봐.”

  , D의 말이 맞았다. 그는 즉각적으로 감지했지만 나는 햄버거가 식어감에 따라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계란에서 나는 건지 고기에서 나는 건지 아니면 그 둘 모두한테서 나는 건지 여하튼 삭은 냄새가 배어있었다. 맙소사, 이건 절망적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연이은 음주로 속이 거북했고, 지치기도 지쳐 굉장히 예민한 상태였다. 그런데 햄버거에서조차 이런 냄새가 나자 완전히 배신당한 기분에 빠져, 앞으로의 여행이 불운의 연속이 될 거라 믿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분명했다. 게다가, 할머니는 계속 우리를 노려 보고 있었다.

  어찌 됐든 햄버거를 해치우고 (그러면서도 먹긴 다 먹었다.) 감자를 깔짝거린 우리는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맥도널드를 빠져나와 다시는 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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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도널드 건너편엔 신식 건물 한 채가 있었다. 규모가 꽤 컸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지역의 이름을 딴 '타이 콕 추이 마켓'이란 간판이 눈에 띄었다. 마땅히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라 혹시 나중에라도 밥 먹을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사전조사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시뻘건 고기가 주렁주렁 매달린 정육점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푸드코트를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곳은 현대식 건물로 자리를 옮긴 재래시장이었다.



  소와 돼지들이 해부 되어 걸려있고(차마 글로 쓰지 못할 부위도 여러 번 보았다), 생선은 물속에서 우리를 흘겨보고 있으며(맥도널드에서 본 그 눈빛), 공기 중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피비린내가 맴돌았다. 하지만 고기를 살펴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저녁 찬거리를 고민하는 평범한 시민의 그것이었다. 분위기도 얼마나 활기 찬지 덕분에 우린 금세 정신을 차렸고, 부엌만 있었어도 맛 좋은 부위를 사갔을 거라며 입맛을 다셨다.

  이 층에선 채소와 과일, 한약재를 팔았다. 올라가자마자 이름 모를 약재의 냄새가 코를 찔러 (아마 취두부를 재울 때 같이 넣는 약재인 것 같았다.)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채소와 과일은 신선해 보였다. 아래층보다 사람이 더 많고 매대란 매대는 모두 이십 여년 전에 쓰던 걸 그대로 가져온 모양인 듯 지어진 지 칠 년밖에 안 된 건물에 있다는 걸 자꾸 잊게 됐다. 머리 위엔 낡고 구멍 난 비닐 차양이 드리워져 있고 바닥엔 음식을 씻어낸 물이 줄줄 흐르며 바로 옆엔 아이들이 뛰어노는 주택가가 자리 잡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에스컬레이트가 있는 재래시장이라. 이 묘한 조화가 홍콩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게 아닐까?





  진 토닉에 넣으려고 레몬 다섯 개를 샀다. 다 해서 십 홍콩 달러로 가격은 어디든 동일했다. 주인아주머니가 영어를 못할 거로 생각하고 손짓으로 가격을 물어봤는데 대답은 능숙한 "!"이다. 역시 중국 본토하고는 많이 다르다 싶다. 손가락만 한 바나나를 구경하다가 마음을 접고, 한국말을 하는 우리를 신기하게 여기는 모녀를 지나 삼 층으로 올라갔다.

  삼 층이야말로 우리가 기대하던 푸드코트였다. 하지만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빈 테이블만 널려있었다. 하긴 저녁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다. 맛있는 게 있을까 해서 메뉴판을 들춰봤는데 이런, 온통 한자다. 종류는 엄청나게 많은데 사진도 없어서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감히 모험을 할 용기가 나겠는가? 일 층에서 봤던 소의 특별한 부위가 썰려 나오는 상상을 하자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빠르게 이곳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상하리만치 음식에 보수적이 되어버린 우리는 홍콩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을 잃고 말았다.


  다시 일 층으로 내려와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에 흥미로운 장면이 우릴 붙잡았다. 닭고기를 파는 가게였는데 통유리 안으로 닭장이 꽉 차있고 그 안엔 수십 마리의 닭이 들어앉아 있었다. 그때, 주인 할머니가 일진이 안 좋은 한 놈을 꺼냈다. 할머니는 깔때기처럼 생긴 저울에 닭을 넣고 무게를 재더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녀석의 목을 비틀어 버렸다. 그리고 커다란 칼로 모가지를 그어 어딘가에 던져놓았다. 우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는 다른 두 마리를 세상과 이별시켰다. 닭 잡는 걸 처음 본 건 아니다. 왁자지껄한 동네 시장에서 봤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가 어딘가. 만약 당신이 대형 마트에 가서 닭 한 마리를 달라 그랬다고 하자. 그런데 예쁘게 유니폼을 차려입은 아줌마가 싱긋 웃으면서 살아있는 닭 모가지를 비틀어 내어준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이건 고기의 신선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여행을 하며 정신줄이 어디까지 팽팽해질 수 있느냐 하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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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하면서 충격적이었던 마켓을 나와 호텔로 돌아왔다. 도중에 오늘의 만찬을 즐기기 위한 준비물을 구입했다. 진저 비어(토닉 워터가 없었다), 크림 소다, 에너지 드링크 그리고 얼음. 아직 해가 중천이었지만 비행기에서 마셨던 칵테일을 떠올리며 드라이 진과 진저 비어를 섞어 시음에 들어갔다. , 토닉하곤 다른 달콤씁쓸싸한 그 맛! 간이 의자 위에 컵을 놔두고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식후 음주에 빠지니 좁은 방이라도 천국이 따로 없었다. 심지어 우리가 존재하는 공간이 무한히 팽창하는 기분이었다. 침대 위를 뒹굴 거리며 이러고 관광을 시작하면 마냥 행복한 일만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빠졌다.

  한 잔 기울이고 나자 다섯 시 반이었다. 우리는 술기운이 올라 여섯 시까지 여유 있게 휴식을 취하다 나가자고 합의했다. 그리곤 침대에 누워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다.

 

  화들짝 놀라 일어났을 땐 이미 여덟 시 십오 분 전이었다. 오늘 밤엔 스타의 거리에서 심포니 오브 라이츠를 보기로 했었는데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었다. 해가 꼴깍 넘어간 어두운 풍경이 오늘은 다 지나갔다고 우리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직감과 운에 맡기는 여행이라 해도 이건 너무 방심한 거다. 하지만 방구석에 앉아 한탄만 하고 있으랴? 우리는 대충 준비를 마치고 호텔을 뛰쳐나왔다. 해가 져도 여전히 후텁지근한 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거리의 네온사인에 불이 들어오자 낮과는 전혀 다른 요지경이 펼쳐졌다. 싸구려 색깔들이 도로와 건물 벽을 어지럽게 희롱하면서 옛날 홍콩 영화에서 보았던, 홍콩이라면 마땅히 이럴 거라고 기대할 법한 밤거리를 완성했다. 세트장 같은 그 공간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찰 정도였다. 홍콩의 밤은 혼란을 유발했던 우리의 피로를 싹 걷어가 버렸다. 우리의 목표는 침사추이. 심포니 오브 라이츠는 물 건너갔지만 그래도 홍콩 섬의 야경을 보기 위해 우리는 출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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