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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겠다며 D를 끌고 간 곳은, 사실 무슨 대단한 곳이 아니라, 그냥 스타벅스였다. 스타의 거리로 들어서기 전에 이 층짜리 스타벅스가 하나 있었는데, 딱 봐도 야경이 끝내줄 것 같은 명당이었다. 주문을 하고 혹여나 앉을 자리가 없을까 전전긍긍하며 이 층으로 올라갔지만 의외로 빈자리가 많았다. 처음엔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금방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고스란히 몰려오는 더위와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절대 시원하진 않다.) 지칠 줄 모르는 모기떼 때문이었다.

  온종일 카페인 섭취도 못 했고 갈증도 났다는 표면적인 동기를 떠나서, 내가 굳이 스타벅스를 찾은 이유는 외국에 가서 꼭 한 번은 맥도널드를 찾는 이유와 같다. 스타벅스와 맥도널드 같은 거대 프랜차이즈 기업의 매장들은 문명화된 도시라면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똑같이 존재한다. 동일한 로고와 비슷한 메뉴를 걸고, 비슷한 인테리어 속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결제를 유도한다. 굳이 먼 나라 낯선 도시까지 와서 고향에도 지천으로 널린 매장을 찾는 건 그런 방문이 오히려 내가 정말 멀리 떠나와 있음을 실감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상품을 계산대 앞에 늘어놓는 순서까지 똑같지만, 이곳이 결국 고향과 다른 언어와 다른 화폐를 주고받는 다른 문화권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차이가 여행을 왔다는 걸 실감케 한다. 보라, 익숙한 것을 대체하는 낯선 것들을. 이국적이란 느낌은 이질성보단 상대성에서 오는 경우가 더 많다.

  한국에선 보기 어려운 야경을 선사하는 카페 옥상 자리는 분명 만족스러웠다. 내 다리 주변에 식탁이라도 차려놓은 듯 법석을 떠는 모기만 아니라면 여기서 줄곧 빅토리아 하버를 바라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점점 간지럼이 심해지는 양다리를 더 내버려둘 수 없어서 커피를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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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의 거리를 걷는다. 여행안내서도 따로 섹션을 나누어 다룰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약 사백사십 미터의 산책로엔 홍콩 영화사에 획을 그은 백여 영화인의 명판이 놓여있고, 2004년 스타의 거리를 조성할 당시에 살아있던 이들은 이곳에 손자국을 남길 수 있는 영광까지 누렸다. 그러나 너무 캄캄한데다가 이름을 모르는 걸 넘어서 읽을 수조차 없는 배우들 투성이라 명예의 전당 자체는 우리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내 손과 비슷한 손을 가진 유명인이 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말이다. 본디 스타의 거리를 걷고자 함은 잠들 줄 모르는 섬과 항만을 파노라마처럼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by D


  스타의 거리를 찾는 이들은 보통 시계탑에서부터 시작해 스타벅스 쪽으로 걸어오는 것 같지만 우린 그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다. 시작점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사람이 점점 많아졌고 바다 건너엔 개성 넘치는 빌딩이 쉴 새 없이 자리를 바꿔 이래저래 지루할 틈이 없었다. 특히 오늘 놓친 심포니 오브 라이츠가 아쉬울 수밖에 없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쓸데없는 기대만 더 높아졌다. 지금도 충분히 화려한 저 건물들이 쇼가 진행될 땐 어떻게 변한다는 것일까?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아이에프씨(IFC) 2 타워 같은 건 갑자기 몸을 뒤집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라도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기대란 이런 식으로 고조되었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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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의 거리를 거의 빠져나왔을 즈음 내륙에도 인상적인 예가 꽤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인터콘티넨탈 호텔이었다. 바다 건너편으로 곧장 아이에프씨 타워가 보일 정도로 좋은 위치에 있는 이 호텔은 야경을 감상하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을 전면에 배치해 두었다. 호박색 조명 아래에서 잘 차려입은 웨이터의 서빙을 받으며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마치 영사기로 돌려놓은 것처럼 유리창에 비쳤다. 뜨거운 외부 공기와 대조적인 실내 공기를 상징하듯 창의 반절은 서리가 껴있었는데 그것이 고급 호텔과 외부를 구분 짓는 불투명한 장벽으로 보였다.

  “저런 데서 자면 어떨까?”

  D와 나는 온화해 보이지만 쉽게 범접하길 거부하는 호텔의 실내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여기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정도로 우린 서툰 사람들이 아니고 오히려 몽콕에 있는 우리의 작은 방에 더 큰 애정이 생겼지만, 그래, 한 가지가 궁금하기는 했다. 저런 데서 자면 어떤 기분일까? 운동장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근사한 스위트 룸으로 올라가는 이들의 삶은 어떤 연속성을 가지고 과거에서 밀려와 여기에 닿았고, 어떤 식으로 미래를 향해 이어지는 걸까? 우리와 그들의 삶은 별 다섯 개짜리 통유리의 뿌연 표면 위에서 잠시 교차했다가 멀어진다. 한 쪽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비단 인터콘티넨탈 호텔뿐만은 아니었다. 솔즈베리 로드와 나단 로드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페닌슐라 호텔도 고풍스러운 외관으로 우리를 멈춰 서게 했다.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이 아닌데 최상급 호텔에서 잘 수 있다는 건 어떤 특권을 상징하는가. 감히 로비로 들어갈 수조차 없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장소에서 화려한 야경과 친절한 서비스와 편안한 침대를 만끽하며 잠들 수 있다면 홍콩이란 도시가 지금과 다른 인상이었을까?

  스타의 거리에서 시작된 의문은 명품 매장이 즐비한 캔톤 로드까지 이어졌다. 유명 브랜드의 쇼핑백을 메고 다니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는데, 그 안에 든 가방의 가격이면 우리 두 사람이 홍콩에 두 번은 더 오고도 남을 것 같았다. 서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외관을 꾸민 티가 역력한 매장들은 손님으로 꽉 차 있진 않았으나 최소한 발걸음이 끊기지 않는 선까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구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다지도 많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캔톤 로드에서도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곳은 샤넬 매장 앞이었다. 간판의 조명이 얼마나 밝은지 마치 스튜디오에 들어온 것 같았다. 노출계조차도여기선 마음껏 사진을 찍으세요.”라고 얘기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는 홍콩의 지극히 화려한 얼굴에 대한 답례로 기념사진이나 찍기로 했다. 단언컨대 홍콩의 밤거리 중 가장 인물 사진 찍기에 좋은 곳이었으며, 그것이 우리가 이 거리에 부여한 새로운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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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우리가 수도승처럼 구매욕을 잠금하고만 다닌 건 아니었다. 익숙한 이름의 디에프에스 갤러리아(DFS Galleria)까지 왔을 땐 조명 때문에 심해지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실내로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자동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공을 들여 차갑게 식힌 바람과 화장품 매장의 새하얀 빛이 우리를 마중했다. 외부와의 기온 차가 십도 이상은 날 것 같았는데 잠깐만 있다가 밖으로 나와도 렌즈 필터에 허옇게 김이 서릴 정도였다.

  이곳은 침사추이 전역을 흐르는 총천연색의 네온사인 대신 부드러운 간접 조명과 채도 낮은 색들이 지배하는 영토였다. 거기에 가볍게 울리는 일렉트로닉 음악까지. 하지만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배반이라도 하듯 인적은 뜸해서 먹고 살 만큼 장사가 되려나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들어온 게 맞지만 D는 점점 꽂히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고가의 브랜드는 아니지만 실용적이면서 예쁜 가방 하나와 디에프에스 갤러리아에 입점한 모든 브랜드 중 유일하게 십만 원이 넘지 않는 시계를 보더니 부쩍 말수가 적어지고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졌다. 구매를 부추기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내가 활약할 차례였다.

  가끔 쇼핑을 가면 주로 남자들과 함께 가곤 하는데 그들이 뭔가를 마음에 들어 할 때 나는 절제된 태도로 마수를 뻗친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옷 한 벌을 집어들면서 어떠냐고 물었다고 하자. 그럼 나는 일단괜찮은데?”라고 담담하게 대답하곤 옷을 넘겨받아 유심히 살핀다. 여기서 처음으로 이 옷이 그 사람에게 어울릴 것인가 어울리지 않을 것인가를 검수한다.

  “, 괜찮다.”

  이런 식으로점잖지만 진심으로그의 취향에 힘을 실어주면 반은 성공(?)이다. 사실 진지하게 옷이나 가방이 괜찮으냐고 묻는다는 건 이미 마음을 열어버린 상황에 대해 동의를 구하고자 함이 아닌가.

  “한번 입어 봐.” , 날개도 달아주자.

  이 지점이 제일 중요하다. 상대방이 가방을 걸치거나 옷을 입어보는 순간엔 정직해야 한다. 영 부정적인 결과가 도출되면그건 아냐.”라고 칼같이 자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가 올바른 선택을 했다면 색깔이 예쁘다거나, 하나쯤 가지고 있어도 되겠다거나, 딴 걸 잠깐 살펴보다 아무래도 네가 고른 게 더 낫다고 얘기한다. 지름은 의뭉스럽게 유도해야 한다. 신기하게도 그럴수록 - 여자는 모르겠고 - 남자들은 확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값이 좀 나가는 경우엔 아무래도 망설임이 생기는데, 그럼 한 박자 쉬어갈 필요가 있다.

  “얼마라고? , 그럼 생각 좀 해봐.” 또는딴 데 보고 오자.”

  이러고 매장 밖으로 끌고 나오면 십중팔구 상대는 머릿속에 방금 본 옷이나 가방이나 시계 생각뿐이다. 내가 할 일은 그저괜찮긴 했어.”만 반복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간 발길을 돌리기 마련이며, 이제 내가 할 일은 그가 지갑을 여는 걸 지켜보는 것 뿐이다.

  위와 같은 과정에 따라, 나와 함께 쇼핑을 간 친구들은 아주 높은 확률로 뭔가를 사게 된다. 심지어 내 걸 사러 가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 물론 이런 이야길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거의 후회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D는 시계와 가방을 샀을까 사지 않았을까? 일단 우리는 충분히  둘러보고 충분히 몸을 식힌 후 그날은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매장을 빠져나왔다. 술과 담배면 모를까 다른 것에 있어선 꽤 인내심이 강한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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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원한 곳에 있다 나와서 그런지 바깥이 더 덥게만 느껴졌다. 정말 지친다고 생각될 찰나, 우연히도 지하도를 발견했다. 한국의 지하상가 정도를 상상했는데 이럴 수가, 침사추이 역과 침사추이 동역까지 아우르는 엄청난 크기의 지하도였다. 첫째로 이런 곳에도 에어컨을 틀어놓는 아낌없는 씀씀이가 고마웠고, 둘째로 쫙쫙 깔린 모노레일이 자랑스러웠다. 역까지 가는 길의 밤거리를 못 본다는 아쉬움 따위야 설 자리가 없었다.

  모노레일을 타고 넓고 긴 통로를 따라가는데 곳곳에 쇼핑몰로 연결된 출구가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뜨거운 열기에 단 한 번도 노출되지 않고 집안 살림을 거덜 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사람으로 하여금 뭔갈 사게 하는 시스템만큼은 최첨단을 달리는 도시가 아닐 수 없다. 



by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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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곤했지만 이대로 첫날밤을 보낼 순 없다는 생각에 센트럴 역으로 가서 란콰이퐁에 들렀다. 길 찾기가 어렵지 않을까 했지만 있는 힘껏 멋을 낸 젊은이 무리를 따라가면 끝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언덕을 올라가는데 모두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어서 마치 밤과 전투를 벌이려는 전사가 된 기분이었다.

  펍과 바와 클럽이 몰린 거리에 가까워지자 음악 소리만으로도 흥이 나기 시작했다. 소문대로 홍콩의 외국인이란 외국인은 모두 모인 것같은 축제의 장소였다. 너무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어 방금까지 있다가 온 침사추이와도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바엔 자리가 하나도 없고 클럽은 지나치게 비싸서 그저 거리에서 시간을 보냈는데도 지루하질 않았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한국인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편의점에서 병맥주를 사서 들고 다니다 보면 나와 D가 하는 이야길 듣고 한국사람이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한국 사람을 만나 아주 반갑다고 인사를 한 그들은 홍콩엔 언제 왔는지, 홍콩은 어떤지 묻고는 했다. 이미 들뜰 대로 들뜬 우리가 최고의 도시라고 추켜세우면 모두가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그러다 어딘가에서 싸이의 노래가 터져 나오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두 다 같이 따라부르기도 했다. 서양인들이오빤 강남 스타일!”을 정확히 발음하는 장면만큼은 정말 잊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거리에서 춤도 출 수 있으니 좁은 클럽이 부럽지 않았다. 다만, 보드카 에너지까지 사 마셔도 쭉쭉 바닥을 치는 체력이 문제였다.


by D


  새벽으로 들어가기 전에 내일을 기약하며 택시를 타고 몽콕으로 올라왔다. 취기와 피로가 함께 올라와 어떻게 계산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호텔까지 잠깐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또 한 번 자극을 받은 우리는 침대 위에 곧바로 쓰러지지 않았다. 얼음을 사고, 봄베이 사파이어와 진저 비어를 섞어 술잔을 돌렸다. 처음엔 경악스러웠던 좁은 호텔방도 지금은 최고의 술집 못지않았다. 건배, 건배, 건배. 그렇게 홍콩에서의 첫날밤,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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