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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항철도를 기다린다. 스크린 도어에는 휴고 보스 정장을 입은 주윤발 선생께서 "살 만하냐?"라는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보고 계신다. 승차장은 한가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승무원 한 명,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 그리고 비즈니스맨 몇 사람이 전부다. 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렸기 때문에 아수라장을 각오했었는데 생각보단 한가한 도시라고 지레짐작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가 도착했고, 현대 문명의 지향점을 상징하는 듯한 실내 - 깨끗하고 단단해 보이는 세라믹 코팅의 내장재, 우주선에 달려있으면 어울릴 듯한 기다란 창문, 웅웅거리는 낮은 소음만으로 움직이는 차체 - 가 우리를 맞이했다. 하지만 내·외관보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바깥세상과 칼로 그은 것처럼 차가운 실내 공기였다. 에어컨의 설정 온도를 얼마나 낮춰놨는지 홍콩이 아열대 기후라는 사실도 잊고 벌벌 떨어야 했다.

  자리에 앉아 광고와 다큐멘터리가 번갈아 나오는 모니터에 집중했다. 어떤 마을에 옵티머스란 이름을 가진 싸움소가 있는데 챔피언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으며 인기가 하늘을 찔러 경기 장면을 녹화한 디브이디가 날개 돋치듯 팔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과연 불패신화의 주인공다웠다. 경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가련한 상대 소에게 미친 듯이 돌진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저런 소가 나를 들이받으면 얼마나 멀리 나가떨어질까 궁금해졌다. 아마 비행 거리를 측정하기도 전에 세상과 이별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짐했다. 우리의 홍콩 여행도 옵티머스처럼 저돌적이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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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지나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주택단지를 넘어 칭이역에 내렸다. 정말 인적이 드문 승차장을 빠져나오자 출구가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환승을 하러 가야 했지만 급할 게 뭐 있나. 홍콩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기념으로 담배나 한 대 피우기로 했다.

  흡연자가 외국 도시에 도착해 처음으로 하는 일은 어디서 담배를 피울 수 있고 어디서 담배를 피우면 망신을 당하게 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엄청난 눈치 싸움이 시작되는데 최대한 현지인 같은 사람을 찾아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장소를 눈여겨 봐야 한다. 스승이 준법정신이라고는 전혀 없는 인간이라면 한 번 잘못 배운 죄로 계속 엉뚱한 곳에서 담배를 피우게 될 수도 있다. 최대한 많은 표본이 필요한 이유다.

  칭이역 출구에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줄 사람은 없었지만, 택시는 정말 많았다. 빨간색 택시 한두 대와 초록색 택시 몇 대가 일렬로 서 있었는데 일관된 구식 차종이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오늘 중으로 손님을 태울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우리라도 한 대 잡아타고 싶었지만 주제넘은 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그냥 기념사진만 찍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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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으로 시내로 들어갈 차례였다. 지하철 승차장으로 가는데 우릴 놀래주려고 구석에 숨어있다가 몽땅 쏟아져 나온 건지 사람이 급격히 많아졌다. 요즘 우리네 지하철역이 그러듯 여기 역사 안에도 꽤 많은 식료품점과 의류 매장이 들어서 있었다. 길은 찾아야겠고 인파는 피해야겠는데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의식의 부스러기를 줄줄 흘리며 겨우 주황색 노선을 잡아타고 다음 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환승은 계속된다. 칭이역 다음 정거장인 라이 킹역에서 빨간색 노선(추엔 완 선)으로 갈아탔다. 주룽 반도를 종단해 홍콩 섬까지 진입하는 노선이었는데 아, 얼마나 혼잡스럽던지! 자리에 앉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중간 중간 세워진 기둥에 꽃잎처럼 매달려 아이들의 발을 깔아뭉개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캐리어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했다. 환승 체계는 한국보다 편리했지만, 차량 자체가 폭이 너무 좁아 모든 승객이 압축되어 이송되는 기분이었다. 여기에 더해 사방에서 들려오는 광둥어의 성조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도 눈여겨볼 게 있다. 홍콩 남자들의 헤어 스타일이다. 옆머리는 짧게 치고 앞머리는 지나치게 길러 팔구십 년대 대중가수 같은 느낌을 발산하는 그들의 유행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물론 우리의 헤어 스타일이 세련됐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 입장에선 우리가 더벅머리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취향만큼 우리의 취향도 소중하지 않나. 홍콩의 모든 미용실이 저렇게 커트를 해 준다면 이 도시에 장기간 체류하는 건 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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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 킹역에서 약 십삼 분을 달려 몽콕에 도착했다. 인구밀도가 엄청나게 높다는 몽콕답게 역사는 혼잡스럽기 그지없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완전히 어리어리한 상태로 떨어진 우리는 일단 호텔과 가까운 출구를 찾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젠장, 웬만한 준비는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호텔 약도를 뽑아오지 않았다. 안내판엔 각 출구와 인접한 장소가 상세히 적혀 있었지만, 그게 뭐하는 곳이고 우리 호텔 방향과 일치하는지 알 리가 있나.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그냥 아무 데나 찍어서 (느낌이 좋거나 어감이 좋은 곳을 향하여) 나가자는 것이었다.

  지상으로 올라온 순간, 지금껏 그 어느 도시에서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 완벽히 낡아빠진데다가 지나치게 높고 지나치게 폭이 좁은 건물들에 의해 세상이 정복당한 것 같았다. 창문은 더럽다. 벽도 더럽다. 에어컨 실외기는 더 더럽다. 때가 꼬질꼬질한 건물에 주렁주렁 매달린 대형간판은 당장에라도 머리 위로 쏟아질 듯하다. 그리고 사람, 사람, 또 사람.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않다. 낡고 더럽고 난잡한데 지나치게 아름답다. 퇴폐미란 단어는 이런 도시를 수식하기 위해 존재할 것이다. 호텔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잊고 내가 있던 곳과 전혀 다른 장소에 왔다는 이질감이 이렇게 빨리 찾아온 적이 또 있는가, 밀려오는 경외감을 즐겼다.




  그러나 후텁지근한 바람을 더는 맞아줄 수 없기에 호텔은 찾아야 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여기가 주룽 반도의 중추인 나단 로드라는 사실 뿐이었다. 결국, 첨단 기기의 힘을 빌리기로 했지만 똑똑하다는 나의 전화기도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으니 그냥 지하철 노선도에 불과했다. 여행안내서에서 언뜻 본 와이파이 이용권을 구매해야겠다 싶었는데 D가 손을 내저었다. 로밍 쿠폰 오만 원 치가 충전된 D의 블랙베리가 값비싼 데이터 로밍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가뭄의 단비 같은 오만 원인가! 한국에선 내가 지금 광활한 사막에 서 있는가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뜨지 않던 블랙베리의 지도는 홍콩에서만큼은 모든 걸 보여주기로 작정했는지 도로 이름까지 상세하게 띄웠다. 잠시 지리를 파악한 우리는 문명의 이기에 인도된 첫걸음을 뗐다. 사실, 이때 두 가지가 불안하긴 했었다. 블랙베리가 동서남북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몇 년 전 유럽에서 모 포탈 메인페이지를 잘못 띄웠다가 한 번에 이만 원이 넘는 데이터 로밍 비용을 냈던 내 경험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일단 데이터 로밍을 끈 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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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에서 본 듯한 고가도로를 쫓아가며 수많은 매장을 지나쳤다. 약재상, 신문 가판대, 약국, 휴대전화 매장, 화장품 가게, 휴대전화 매장, 가전제품 매장, 또 휴대전화 매장. 어라? 거리엔 휴대전화 판매점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항상 손님으로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에서도 광고의 절반은 염색약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휴대전화 광고였다. 한국을 뛰어넘는 홍콩 사람들의 (헤어 스타일과) 모바일 사랑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뭔가 이상하다. 세 블록을 넘게 왔으나 정말 뭔가 이상하다. 너무 외진 곳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안 되겠다 싶은 D가 다시 지도를 열자 우리의 위치는 호텔 반대편에서 파란 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냥 켜두고 올걸." 짜증이 치밀어 올라 골목길로 피신해 담배를 태웠다. 조악한 그라피티가 그려진, 인적도 없는, 그래서 전혀 금연을 해야 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의 골목이었다. 헌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우리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갑자기 날렵한 홍콩 경찰이 나타나 범칙금 딱지를 떼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캐리어를 옆에 두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휑한 얼굴의 두 남자를 누가 그냥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막막한 심정으로 왔던 길을 되짚어가고 있으려니 이번엔 횡단보도 신호등이 심상치 않다. 어디서 자꾸 전자음이 들리길래 뭔가 했더니 신호등이 범인이었다. 신호등은 처음엔 뚜뚜뚜뚜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뚜- - - - 하다가 뚜뚜뚜뚜뚜뚜뚜하면서 파란불로 바뀌고, 다시 빨간불이 들어올 때가 되면 뚜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거린다. 사거리에선 거의 교향악단의 연주를 듣는 것 같았는데 온 도시의 시각장애인용 경보기가 일제히 반란을 일으킨 기분이었다. 한두 번은 괜찮았지만 차도를 건널 때마다 듣게 되자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최소한 길을 잃은 상태에서 들으면 그렇게 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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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곧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고 기술하면 참 좋겠으나 세상은 만만치가 않다. 일단 나보다 사람 많은 곳을 더 싫어하는 D의 피로가 극에 달했다. 거기다가 D의 캐리어는 바퀴 한쪽이 고장 나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재주를 부리는 중이었다. 그나마 몸과 평행으로 굴리면 됐으니까 망정이지 만약 사선으로만 움직였다면 거리를 오가는 무릎을 모두 박살 내고 말았을 것이다. 게다가 재래시장도 중간에 하나 있고, 식당이나 가판이 인도를 반쯤은 정복해 걸을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적었다. 딱 봐도 관광객은 오로지 우리뿐인, 완전한 현지인의 영역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주적, 냄새. 종종 풍겨오는 취두부 냄새가 우리의 신경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야채와 해산물을 발효시킨 소금물에 두부를 재웠다 튀겨먹는 취두부는뭔가가 썩어도 단단히 썩고 있어!" 라는 신음을 절로 나오게 만든다. 전날 마신 술로 속이 메슥거린 상태에서 노출되는 바람에 더 고역이었을 것이다. 덧붙여 우리가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은 없었으므로 일정 내내 그 냄새에 익숙해질 일도 절대 없었다. (호텔로 가는 길에 꼭 취두부를 파는 식당을 지나야 했는데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호텔이 가까워졌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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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진짜 쫓아갔어야 마땅한 고가도로의 통행로를 넘어 대낮에 길에다 오줌을 싸는 아저씨를 지나 호텔 근방에 도달했다. 진작부터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켜놓고 있었지만 우리를 순간이동을 하는 초능력자로 생각하는 지피에스가 계속 애를 먹이고 있었다. 한참 길을 따라가다가 여기가 아닌가 싶어 내려오고, 다시 맞는구나 싶어 올라가면 알고 보니 좌회전이었던 식이다. 그렇게 역에서 출발한 지 삼십 여분 만에 호텔을 찾았다. 길 건너편엔 중학교가 있고, 주변엔 금속을 가공하는 듯한 창고형 업체들이 널려있었다. 그리고 환전소 하나, 이자카야 하나, 현지 식당 하나. 도저히 관광객을 환영할 동네라고는 볼 수 없었다.




  호텔은 마침 내부 공사 중이었다. 일언반구도 없던 익스피디아를 원망하며 (리노베이션을 시작한 지 한 달은 넘게 흘렀다!)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끙끙 올랐다. 하지만 단순한 우리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한 방에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보증금을 내고, 체크인을 하고, 열쇠를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경악하고 말았다.

  홍콩에서 지내는 삼박사일 동안 가끔 이 방을 어떻게 묘사하면 좋을까 고민했었다. 그러다 어떤 비유보다도 그냥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게 제일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호텔방은 원룸이었다. 침실이라고 부를 만한 공간은 싱글 침대 두 개를 사람 하나 겨우 걸어 다닐 만큼만 띄워놓으면 꽉 차는 크기였다. 거기에 욕실과 옷장, 반팔 벌리기를 하고 제자리에서 돌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덧붙어 있다. 그렇다. 그게 전부였다. 캐리어를 바닥에 놔두면 제대로 걸어 다닐 수가 없어서 우리는 아예 캐리어를 침대 위에 올리고 남은 공간에 찌그러져 잠들어야 했다.



  그나마 침대에 걸터앉아 통로(?)에 탁자 삼아 간이 의자를 놔두고 술도 마시고 밥도 먹는 재미는 있었다. 에어컨도 작은 모델이었으나 방이 워낙 좁아 상대적으로 빵빵하게 느껴졌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 창문 사이에 놓인 격자형 선반을 우리 물건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향수, 봄베이 사파이어, 시계, 카드와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동전 등으로 말이다. 그런 짓을 하고 나서야 우리가 방을 지배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솔직한 심정은 이랬다.

  “이번 여행, 잘할 수 있을까?”

 

  그리고 배가 고파졌다.



canon A-1 + 50mm / 24mm

kodak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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