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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날엔 몇 시에 일어났는지도 잘 모르겠다. 세 번의 아침 중 제일 늦게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간밤에 침사추이를 싸돌아다닌 여파가 밀려오는지 어디 한 군데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창문을 열자 어제보단 덜 뜨거운 공기가 얼굴에 닿는다. 흐린 날씨였다. 비가 올까? 한국의 여름이라면 우산을 준비했겠지만 피곤했던 우리는 방수 코팅된 천 뭉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방을 정리하고(워낙 좁아서 정리랄 것도 없었지만) 우리의 몰골도 정리를 좀 했다. 홍콩에 와서 찍은 필름을 세어보니 고작 세 통이었다. 하루에 한 개 반. 여행을 가면 가져간 필름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마구 찍는 편인데 홍콩에선 셔터를 누른 횟수가 턱없이 적었다. 아무래도 너무 더워 금방 지치고 아침 일찍 나다닌 적이 없어 시간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사진이란 해가 떠있을 때 찍어야 제맛이니까.

 

  오늘 점심도 랑함 플레이스에서 먹기로 했다. D와 나는 이번만큼은 정말 제대로 된 식사를 하자고 다짐했다. 지금껏 마신 술과 피워 없앤 담배의 양은 생각도 않고 든든하게 먹지 못해 이다지도 힘이 없고 피로한 거라 투덜거리며.




  다만 원래 가던 길 대신 재래시장을 통과해 동네 구경도 하면서 빙 둘러 가기로 했다.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답게 거리는 바삐 돌아다니는 현지인들로 가득했다. 소란스럽고 조금은 악착같은 평범한 시민들이 찬거리를 사기 위해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하는 말만 다를 뿐 우리네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아마 이런 모습은 동양에서뿐만 아니라 서양의 여느 도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종과 문화, 언어가 다르더라도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는 인생은 대체로 그 모습이 닮았다. 우린 외국에서 문화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놀라워하지만 이런 일상의 공통점은 잘 보지 못한다. 어쩌면 자신이 매일 마주하는 진부함이 머나먼 이국땅에도 잠복하고 있으며, 평범한 인간은 거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숙명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긴, 이건 상당히 비관적인 관점이다. 낙관적으로 보자면 그런 공통점에서 동질감을 발견하고 이 행성 곳곳에 흩어진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찰 수도 있을 것이다.





  고개를 들자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혼잡한 아파트의 벽면이 보인다. 창문은 일제히 열려있고 에어컨 실외기는 잠시 잠들어 있으며 온갖 빨래가 전선과 빨랫줄, 난간에 매달려 있다. 공산품처럼 설계된 획일적인 건물에 찌든 때와 옷가지들이 혼돈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이 도시에 얼마나 훌륭한 피사체가 많은지 새삼 탄복하며 뒤늦게 카메라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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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콕의 주택가와 정반대편 세상에서 태어난 듯한 랑함 플레이스에 올랐다. 우리가 찾은 식당은 겡끼 스시(げんき 壽司). 일본산 체인 회전 초밥집으로 홍콩에서 큰 성공을 거둔 곳이라 한다. 어제부터 유독 손님이 많은 매장을 보고 끌렸었는데 회전 초밥에 대한 가격적 거부감 때문에 망설인 건 사실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름 저렴한(?) 가격으로 사랑받는 초밥집이라나.




  오늘도 만석이라 대기를 해야 했다. 매장 앞엔 기계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스크린에 대기 인원수를 입력하고 전화번호를 대충 쳐넣자 번호표가 나왔다. 초밥으로 해장이 될 리는 없지만, 우린 주린 배를 부여잡고 십여 분을 기다렸다.

  자리에 앉자 컨베이어 벨트 위로 먹음직스러운 초밥이 뱅글뱅글 돌아다녀 우리 눈도 뱅글뱅글 돌았다. 다른 손님들은 메뉴판에서 식사를 하나 고르고 초밥 접시는 몇 개만 덜어왔지만 우린 무작정 접시부터 집어들기 시작했다. 정말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개당 천 원에서 천 오백 원 사이였다. 초밥 안에 와사비가 들어가 있지 않아 일일이 따로 넣어야 했지만 맛은 정말 좋았다. 무엇보다 재료가 아주 신선했다. 바다와 접해 있어서 그러겠지. 홍콩에서 육지 동물은 우릴 항상 실망시켰지만, 생선은 그러지 않았다. 진작 해산물을 먹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초밥 접시와 함께 돌아가는 아기자기한 알림판, 일종의 출사표를 보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지금부터 한 접시에 두 개씩 든 저렴한 초밥이 나갑니다, 초밥 세 개 접시가 나와요, 타코 와사비 같은 양념이 들어간 초밥은 어떠세요? 접시에 그려진 악동 같은 겡끼 스시의 마스코트가 말을 걸어오는 거 같았다. 일본 다운 아이디어였으며 일본 다운 앙증맞음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못 먹은 한을 풀수록 테이블 위의 접시는 높아졌다. 식사비도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선 제일 많이 나왔다. 그래도 한화로 치면 한 사람당 만 육천 원이 조금 안 나온 거 같은데 초밥만으로 배를 채운 것치곤 저렴한 편이 아닐까? 최소한 한국보단 말이다. 




  밥을 잘 먹어서 그런지 넘쳐 흐르는 힘을 만끽했지만, 훅하고 성냥이 꺼지듯 그것도 잠깐이었다. 체력은 아직 바닥이었다. 우리는 홍콩에서 두 번째로 길다는 랑함 플레이스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맨 위층으로 올라갔다가 재빠르게 훑으며 밑으로 내려왔다. 찬찬히 돌아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이왕 보는 거 정말 큰 데를 가보자.”

  우리가 더 보고 싶었던 곳은 홍콩섬의 아이에프씨 몰이었다. 쇼핑몰에 쏟는 시간은 한군데로 집중하기로 하며, D와 나는 지체없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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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트럴 역에서 내려 아이에프씨 몰로 이어졌을 듯한 느낌을 팍팍 풍기는 육교에 올랐다. 그런데, 육교치고는 좀 길다. 알고 보니 단순한 육교가 아니라 기다란 공중회랑이었던 것이다. 이 길은 홍콩섬 북부의 여러 빌딩, 그러니까 랜드마크, 차터스 하우스, 프린스 빌딩 등을 하나로 묶어주는 통로였다. 덕분에 더위에 시달릴 필요없이 각 건물을 하나의 쇼핑몰처럼 오갈 수 있었다. 보행자를 위한 편의성에 다시 한 번 감탄하는 순간이다. 기술적으로 그리 어려운 구조는 아니겠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혁신으로 보였다. 분명 서로 라이벌인 건물도 있을 테고 설립 목적도 다를 텐데, 오로지 쇼핑을 위해 대동단결한 셈이다. 이렇게까지 자본주의가 발전한 도시를 걷고 있으려니 혐오감보단 오히려 거대한 성당이나 유서 깊은 유적을 보는 듯한 경외감이 느껴졌다. 다만 그 놀라움이 지나쳐 아이에프씨 몰 반대편에 있는 만다린 호텔까지 헤매다가 돌아오는 실수를 범하긴 했지만.

 

  아이에프씨는 서로 크기가 다른 쌍둥이 건물이고, 아이에프씨 몰은 두 건물에 걸쳐 있는 쇼핑몰이다. 홍콩의 많은 쇼핑몰이 그렇듯 이곳 역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데, 여길 둘러보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체력을 회복해야 했다.




  우리는 먼저 네스프레소 매장에서 에스프레소를 한 잔씩 하고 다음으로 고디바 매장에 들렀다. D가 선물용 초콜릿을 고르는 동안 나는 다크 초콜릿이 들어간 초콜릭서라는 음료를 두 잔 주문했다. 영약이란 뜻을 가진 엘릭서와 초콜릿의 합성어인 초콜릭서(Chocolixir)는 어원 그대로 힘을 북돋워 주는 효과를 발휘했다. 엄청난 당분 덕분이었다. 근데 별로 달진 않아서 남자인 우리 입맛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아이에프씨 몰 바로 바깥에 있는 흡연 구역,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우린 힐링 포션을 먹고 체력을 회복하는 비디오 게임의 주인공처럼 초콜릭서를 들이켰다. 고디바가 워낙 유명한 브랜드이고 최근엔 한국에도 론칭한 걸로 알고 있지만, 아직 이 초콜릿 범벅의 쉐이크를 접해보지 못한 분들은 기회가 될 때 꼭 한잔하시길 바란다. 그 어떤 초콜릿 음료보다 진하고 깊이 있는 맛 - 입안에 까끌까끌하게 돌아다니는 초콜릿 알갱이의 식감! - 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photo by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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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으로 아이에프씨 몰 탐방에 나섰다. 이런 거대한 쇼핑몰을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착각이 하나 있는데 나도 여기서 무언갈 사야만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그것이다. D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지만 나 역시 모 매장에서 그런 혼란에 빠져 생각 없이 카드를 긁기 직전까지 갔었다. 그게 치명적인 오해이며 후폭풍이 엄청날 거라는 사실은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여기에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사지 않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분명 질렀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후회를 느낄 거라고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정말 갖고 싶은 외투를 발견해 엄청난 고민에 빠졌을 때,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가까스로 합의점을 찾아냈다. 외투는 포기하되 그보다 저렴하고 예쁜, 그러나 쓰임새는 좀 덜한 니트를 사기로 한 것이다. 니트 역시 뒷감당이 쉽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나에게 잘 어울리고 한국에 와서 요긴하게 잘 입었다. 이런 걸 대리만족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덕분에 후회는 덜했다.

 

  아이에프씨 몰은 각 층이 커다란 직사각형 구조로 된, 길 찾기는 쉬우면서 면적은 끔찍하게 넓은 곳이었다. 여행안내서도 아이에프씨 몰을 찬찬히 돌아보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린다고 지적할 정도다. 우린 술독이 빠질 만큼 엄청나게 걸어 다녔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이렇게 많은 매장으로 채운 다음 이렇게 쾌적한 공기를 유지하며 이렇게 많은 조명으로 빛내고 있다니. 유지 비용만 해도 천문학적일 것 같은데, 그럼에도 문제없이 운영되는 이유는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돈을 쓰기 때문이겠지. 물론 쇼핑백을 들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홍콩이니까 뭔갈 사가야 해, 라는 근거 없는 주장과 함께 우린 꽤 많은 시간을 이곳에 할애했다. 덕분에 이 여행기의 셋째 날 편은 쉽고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겠다. 모든 광기(?)가 끝나고 창밖을 보니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만족감과 허무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손에 든 쇼핑백이 거추장스럽긴 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홍콩의 마지막 날을 장식하기 위해 스타의 거리만큼 야경으로 유명한 장소를 찾기로 했다. 빅토리아 피크. 트램을 타고 산 정상으로 올라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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