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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스타 페리에서 내리자 스타의 거리가 코앞이었다. 스탠리 여행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재야에서 도시(?)로 나온 느낌이 들어 얼떨떨했다. 물리적으론 가까울지 몰라도 정서적으론 아주 먼 곳을 다녀왔기 때문이리라.

  심포니 오브 라이츠까지 시간이 꽤 많이 남아서 저녁을 먼저 먹기로 했다. 어제 늦게 왔을 때와는 대조적으로 스타의 거리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일곱 시도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의 인원이 모여있다니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홍콩에 놀러 온 여행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싶다면 저녁 여덟 시에 스타의 거리로 가보자. 아마 절반은 빅토리아 피크의 정상에 올라가 있을 테고, 나머지 절반은 이곳에 모여있을 것이다.



  먹을 걸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빅토리아 하버와 맞닿은 홍콩문화센터 주변에서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 ‘델리 앤 와인이라는 한국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같은 이름이었다. 가격도 적당했고 서양식 요리가 대부분이라 신뢰도도 급상승했다. 설마 이곳에서 메뉴를 잘못 고를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잘못 골랐다. 우리는 스크램블 에그와 토스트, 햄과 스파게티를 준다는 오늘의 메뉴를 선택했는데 메인이나 다름없는 스파게티가 함정이었다. 그걸 스파게티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우윳빛 국물이 찰랑거리고 면 위엔 차슈가 올라간 스파게티는 차라리이탈리아인의 시선으로 바라볼까 망설이다가 만, 일본 라면의 중국식 해석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구수하지도 얼큰하지도 않은 국물도 그냥 그랬지만 콤콤한 냄새가 나는 차슈는 서로 자기 걸 더 먹으라고 권했다간 싸움이 벌어질 정도였다. D는 한 점, 나는 두 점을 먹고 나머지는 모두 빈 접시로 몰아내 버렸다. 결국 우리가 먹은 음식은 스크램블 에그와 토스트, 햄 정도였는데 그것만으론 양이 부족했다. 인테리어도 훌륭했고 다른 메뉴도 다 맛있어 보였는데 왜 우린 이런 실패를 반복하는 걸까. 식당 안에 한국 사람이 꽤 많았으며 그들의 접시는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단 점을 감안한다면, 이건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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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로 속을 정화하고 문화센터에서 화장실을 이용한 다음 맥주 두 병을 샀다. 엉성하게 채운 뱃속을 달래기엔 맥주가 제격이었다. 냉장고에서 꺼내자마자 맥주가 급속하게 식어가는 저녁 더위를 뚫고 공연을 감상할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당장 십오 분가량 남은 상황에서 빈자리 찾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삼각대가 없는 나로서는 카메라를 받칠 평평한 받침대가 필요했는데 결국 임시 선착장 같은 제방 한쪽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이왕 보는 거 괜찮은 야경 사진을 건져가고 싶었다(결과적으로는 완전 실패했다).



  오늘 밤은 맑았다. 어제와 달리 안개도 없어서 조명 한줄 한줄이 각막에 선명하게 꽂히는 느낌이었다. 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홍콩섬의 야경을 보고 있자 긍정적인 생각이 샘솟았다. 흐린 어제가 아니라 맑은 오늘 심포니 오브 라이츠를 봐서 다행이라고. 전날 까무룩 잠들었던 건 일종의 계시였던 게 분명하다고. 그러고 보니 처음 호텔을 찾을 때 애를 먹고 음식 선택에 계속 실패한 것만 빼면 홍콩에 와선 모든 일이 잘 풀렸던 것 같다. 길을 잃거나 차를 놓친 적도 없었고 공을 들여(?) 찾아간 곳은 언제나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술을 마셔도 숙취에 시달리지 않았으며 사전 조사 없이 감으로, 우발적으로 선택한 일정은 기대 이상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저 쇼핑을 위한 관광지인 줄 알았는데 이틀 동안 다양한 면모를 마주하면서 홍콩이 우리와 굉장히 잘 맞는 도시임을 알게 됐다. 나는 "때로 어떤 사람은 정말 신비스럽게도 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그곳이 바로 그처럼 애타게 찾아 헤맸던 고향인 것이다."라는 달과 6펜스의 문장을 조심스럽게 떠올렸다. 타히티에 정착한 스트릭랜드처럼 격정적인 감정은 아니었지만, 화자의 생각이 설득력 있다는 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우린 여행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음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계획을 더 깊게 이야기하려는 찰나에 저녁 여덟 시가 됐다. 스피커에서 일제히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를 소개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남녀의 목소리가 심포니 오브 라이츠의 시작을 알렸다. 그것도 광둥어로!

  솔직히 광둥어 한 번에 영어 한 번, 이렇게는 방송해 줄줄 알았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의 팔십 퍼센트는 이해하지 못할 언어로 섬의 건물을 설명하는 것이다. 사회자의 소개에 맞춰 각 건물이 저에게 달린 조명을 흔들고 떨고 쏘아대며 화답을 했다. 그래서, . 너 이름이 뭐라고? 오늘은 가져 나오지도 않은 여행 안내서를 펼쳐 사진을 보며 대조해야 할 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심포니 오브 라이츠는 시작됐다.



 

  사실 이 조명 쇼에 무엇을 기대했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불꽃놀이나 레이저 쇼에 버금갈 어마어마한 양의 빛이 밤하늘을 가득 채울 거라 믿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심포니 오브 라이츠는 그런 쇼가 아니었다. 현재 보유한 재원만으로 알뜰하게 사업을 꾸려나가는 사업가처럼 계속 보던 조명이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게 전부인 공연이었다. 눈이 팽팽 돌아가는 화려함을 기대했던 건 지나친 처사였다. 조명은 감탄할 정도로 음악과 딱 맞아떨어졌지만 규모보단 그 세심한 앙상블에 주목해야 했다. 빌딩이 제자리에서 춤을 추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건물마다 성격이 다른 점을 찾는 건 재미있었다. 예를 들어 광량 좋은 흰색 레이저를 쏘던 아이에프씨는 혼자 튀려는 꺽다리, 중국은행 타워는 화려한 춤솜씨로 주변을 즐겁게 하는 춤꾼, 홍콩상하이은행(HSBC) 빌딩은 키는 작아도 뭐든지 제일 열심인 막냇동생.

  빌딩의 공연이 진행되는 이십 분 동안 나와 D는 서로 별말을 하지 않았다. 각자 술병을 기울이다가 때때로 D는 자신의 블랙베리로, 나는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게 전부였다. 둘 다 심포니 오브 라이츠가 생각보다 소박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곧 밝혀졌지만, 그 순간만큼은 혹시나 상대방에게 누가 될까 솔직한 감상을 건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소심한 배려가 전부는 아니었다. 동시에 우리가 각자 이 여행을 통하여 바꿔보고자 했던 어떤 문제나 어떤 마음가짐, 또는 손에 넣고자 했던 어떤 계기를 떠올리고 있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렇게 짧은 여행으로 전환점을 만들 스위치를 올릴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얻어 간 감흥이 작은 빛이 되어 스위치로 인도할 가능성은 있었다. 그게 옳았고, 그렇게 믿고 싶었고, 우리는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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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캔톤 로드로 돌아가 디에프에스 갤러리아에 들렀다. 어디서 마음을 굳힌 것인지 D는 어제 점 찍어둔 것들을 샀다. 구매욕도 전염되는지 옆에서 지갑을 여는 그를 보며 나도 뭔갈 사고 싶다는 - 그게 무엇이 됐든 -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홍콩에서의 첫 쇼핑을 기념하기 위해 술 한 잔 기울이기 좋을 지역을 검색해 보았다. 우리는 침사추이 지하 매장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했고, 샤샤란 화장품 매장에서 선물용 매니큐어를 산 후 주변을 떠돌기 시작했다. (샤샤의 매니큐어는 여자들 사이에서 가격대비 품질 좋기로 유명하다.)

  인터넷상에서 미라 호텔 뒤편으로 젊고 분위기 있는 바와 레스토랑이 몰려있다고 봤는데 막상 글로만 찾아가려니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점점 조명이 어두워지고 인적은 드물어졌다. 한글 간판들이 눈에 띄는 걸 보니 의도하지 않은 새에 코리아타운까지 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반가워할 겨를이 없었다. 더 들어갔다간 분위기 좋은 바는커녕 문을 연 술집조차 없을 것 같았다.

  그때, D가 특유의 촉을 발휘해 전혀 특기할 게 없는 언덕을 혼자 올라가더니 나를 불렀다. 뭔가 찾은 것 같다며, 너도 좋아할 거 같다고. D가 찾은 골목은 좁고 짧지만 우리가 찾던 분위기의 바와 레스토랑이 쭉 늘어선 곳이었다. 마치 이태원 골목길을 연상케 했는데, 인도, 멕시코, 이탈리아, 미국 등 다양한 나라의 대표주자가 모여 상권을 형성한 느낌이었다. 골목을 쭉 돌아본 후 그중에서 물담배를 파는 인도풍 술집의 바깥 자리를 골랐다.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가려면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며 비집고 들어가야 할 만큼 만원이었다.

  음악은 인도의 그것이 아니었지만 편안하게 들리는 팝 음악이 그보다 훨씬 시끄러운 대화 소리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우리는 모히또 한 잔과 물담배를 주문하고 흡연과 음주, 대화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손님은 거의 다 동양인이었다. 중국인, 홍콩인, 일본인, 한국인까지 동북아시아의 소규모 회합을 보는 듯 했다. 



  D와 나는 흡연구를 바꿔 끼우며 일반 담배에 비해 부드럽기 짝이 없는 물담배를 나눠 피웠다. 둘 다 물담배는 처음이었는데 뽀글뽀글 거리는 소리가 매력적이었다. 그러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 못 할 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 이야기(이제 와 밝히는 바지만 나와 D는 회사 동료다), 근 미래에 대한 걱정, 지나간 여행과 앞으로의 여행 등이 번갈아 튀어나왔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는 언제 홍콩을 다시 올 것이냐 하는 것. 이미 삼박사일은 턱없이 짧으며 이 도시에서 아직 하지 못한 것과 보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는 데 동의한 우리는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와야 한다는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사실 체류하는 시간에 비해 홍콩 여행은 돈이 지나치게 많이 든다. 살인적인 물가 때문에 생활비나 숙박 비용도 비싸지만, 무엇보다 따로 비수기가 없어 항공료가 상향 평준화(?)되어 있다는 게 문제다. 비행기값과 호텔값만으로 동남아시아나 일본을 다녀오는 전체 비용이 나올 만큼은 될 것이다. 빚을 내서라도 여행은 가야 한다는 달콤한 주장이 서점가 여행 코너를 중심으로 떠돌고 있지만, 그렇게 할 정도로 홍콩이 나의 인생에, 나의 영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이곳은 자본주의가 극한까지 발달한 곳이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내년 초로 날짜를 잡는다. 결정하지 않으면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이 여행이니까. 모아둔 돈도 없지만 우리는 달력에 표기를 한다. 2013 1.

  과연 홍콩행 티켓을 끊을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벌써 다음 여행의 윤곽이 잡혔다는 데 고무된 우리는 즐겁게 술잔을 기울였다. 실상 이건 음주도 아니었다. 연하게 블렌딩 된 칵테일은 술을 아주 못하는 사람도 한 잔 정도는 음료수처럼 기울일 수 있으니까. 우리는 폭음은 즐기지 않는다. 취한다면 그건 알코올이 아니라 이국의 향취에 의해서일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틀 동안 홍콩 각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있는 것처럼 친숙했다. 실제로도 그랬고 그저 느낌에 불과하기도 했던, 묘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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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로 돌아오자 열두 시가 조금 안 됐다. 더운 날씨에 너무 오래 걸어 다녔기에 당장 쓰러질 정도로 피곤했다. 그런데 시원하게 씻고 나와 진 토닉을 만들어 건배하자 이대로 자긴 아쉽다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힘이 나기 시작했다. 이게 알코올의 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하고 싶으면 하는 것, 그게 이번 여행의 신조 아닌가. 어떻게 하다 보니 다시 나가자는 이야기를 했고, 어떻게 하다 보니 이미 호텔방을 나서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다 보니 어느새 나단 로드였다. 그때가 새벽 한 시 반 정도 됐던 걸로 기억한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일주일 중 가장 조용한 밤이다. 사람은 별로 없었고 공기는 여전히 후텁지근했다. 우리는 취기에 젖어 무작정 나단 로드를 따라 걸어 내려갔다. 모든 매장은 시커멓게 잠들어 있는데 조명만은 여전히 원색으로 빛나고 있어 세상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맥주에 빨대를 꽂아 마시며 야우 마 테이 역을 지나 조단 역 근처까지 갔다. 그러다 힘에 부쳐 침사추이를 지나는 심야 버스에 올라타기도 했다. 생각보다 승객이 많았고, 기사 아저씨는 친절했다.

  불과 두 시간 전까지 있었던 침사추이로 돌아와 이번엔 남동쪽으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거리엔 흑인이 매우 많았다. 낮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던 그들은 길거리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술을 마시거나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홍콩의 밤은 그들이 지배하는 모양이었다.

 

  기운차게 나온 건 좋았는데 문제가 있다면 문을 연 곳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한참을 걸어 스타의 거리 근처까지 왔을 때야 어느 호텔 앞에서 클럽 음악이 크게 나오는 바 한 군데를 찾을 수 있었다. 손님은 서너 테이블 정도 있었는데 다들 필리핀 출신의 종업원들이 무대 위에서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걸 보고 있었다.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들은 서구의 강렬한 비트에 맞춰 자기식으로 춤을 췄다. 아마 더 이른 시간엔 손님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밴드였을 것이다. 새벽이 되어 사람이 빠져나간 술집은 그들만의 무대가 되었다. 중국 관광객 부부 두 쌍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과 어울려 몸을 흔들기도 했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각에춤에만 몰두하여 땀이 송골송골 한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니 이 또한 비현실적인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도 서로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서서히 취해가는 장소가 존재하는 것이다.



photo by D


  나와 D는 그곳을 나와서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젠 정말 돌아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밤거리를 되짚으면서 스텝을 밟고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웃어젖히기도 했다. 어두컴컴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었으나 마치 고향에서 그러는 마냥 두렵지가 않았다. 우리는 나단 로드를 가로질러 어둠에 완전히 패배한 캔톤 로드까지 갔다가 그 앞에서 택시를 잡고 호텔로 귀환했다. 차창 밖으로 섬처럼 불을 밝힌 편의점 몇 군데가 아른거렸다.

  아마 이쯤에서 취기와 피로 때문에 기억이 급격히 소멸했던 것 같다. 얼른 자야 했고, 실제로도 잠이 쏟아졌지만 까닭 없이 뭔가가 아쉬웠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남은 시간을 세어보니 여행의 반은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내일은 홍콩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그런 생각을 되뇌다가 또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우린 꿈속 무대 위에서 춤을 췄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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