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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돌이키다 보면 기억의 영리한 솜씨에 놀라곤 한다. 주인의 유불리에 따라, 주인의 기호에 따라 구분된 기억은 망각의 릴 위에서 빙빙 돌며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지, 얼마나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예컨대 여행 중 느꼈던 피로와 실망, 날씨를 향한 불만들은 금방 잊히는 데 반해 사소한 감탄이나 미묘한 감동은 뻥튀기 기계에 넣은 곡물처럼 크게 부풀려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아주 매혹적이라서 지금도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비행기 티켓 결제 버튼 앞에서 서성이게 한다.

  똑같은 공식을 우리가 묵었던 내륙, 메스트레 역에서의 하룻밤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섬이든 육지든 유럽의 겨울이 주는 가없는 적막함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전자는 아름다웠고 후자는 황량했다. 시내는 컴컴했다. 거리엔 불량한 기운을 몰고 다니는 서로에게 무관심한 행인만 오갔다. 역 앞에 있던 자판기는 내 돈을 집어삼켰다. 섬과의 대비 때문인지 나는 땅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 애정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 없었고, 호기심도 생기지도 않았으며, 몸이 지쳐 만사에 질려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창밖을 봤을 때, 나는 똑같은 곳에서 눈을 떴지만 똑같은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침에 보는 메스트레 역 주변은 전날보다 훨씬 생동감 넘쳤다.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 밝아 보였고, 잿빛 콘크리트는 아침 햇살을 받아 불그스름한 혈색을 찾았다. 마치 원래 주인이 이 땅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나는 금세 간밤에 느꼈던 불편함을 잊었으며, 심지어 어젯밤에 역과 숙소 주변을 더 둘러보지 못한 걸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한 번 기억의 솜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바다를 건너 베네치아 섬의 로마 광장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이곳의 버스는 노란색이었다. 가만히 앉아 노란 차체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저 상자를 타고 불과 십여 분만 달리면 이곳과 전혀 다른 체계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졌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아주 오랜 시간을 날아와야 바다 위에 도시가 떠 있는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도시를 품은 바닷물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아주 당연한 일이 어떤 이에겐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는 한다. 그러나 잊지는 말자. 여행이 끝나고 나면 우리도 우리가 누리는 조건에 감사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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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일정은 무라노와 부라노 섬을 돌아보고 빈으로 향하는 야간열차를 타기 전까지 베네치아에서 시간을 보내는, 길지만 단순한 동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타 루치아 역 앞에 있는 페로비아Ferrovia 선착장에서 바포레토 DM 라인을 기다렸다. 활짝 펼친 바포레토의 노선도는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대도시의 지하철 노선도에 비하면 훨씬 미적이었다. 섬 이곳저곳을 연결하는 색채의 순환을 따라가노라면 엉뚱한 노선에 몸을 실어도 언젠간 제자리에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얻는다. 베네치아의 골목에서 길을 잃어도 노란 표지판이 우리를 미아로 내버려 두지 않듯이.

  이탈리아와 시간표에 관한 모든 악소문과 다르게 수상버스는 정확히 시간을 지켰다. 배에 올라 아침 햇살 아래 처음으로 베네치아를 보았다. 전날의 우수는 물에 풀어 넣은 양 희석돼 있었고, 작은 화물선에 과일을 싣느라 바쁜 사람들이 월요일 오전 10 30분의 베네치아를 대변해 주었다. 지금은 일상의 시간이었다. 전날 물의 도시를 포위했던 관광객들도 소수의 이방인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이편이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다.








  수상버스 바포레토는 베네치아 북단의 좁은 운하를 지나 섬의 외곽을 타고 돌았다. 거친 질감의 벽돌로 세워진 건물들이 섬 가장자리를 따라 줄지어 선 모습은 들쭉날쭉한 성벽 같았다. 이내 그 모습도 멀어지고 우린 어느새 바다 한가운데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다에 온 것도 오랜만이었다. 물에 뜬 도시를 본다는 흥분 때문에 여기에 있으면 동시에 바다도 보게 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맞던 바람이 갑자기 짠내 나는 해풍으로 변하자 오랜만에 입은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는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그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청록색 물결을 향해 크게 소리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배 안의 몇 안 되는 승객 중 절반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소심한 감탄만 그 자리를 대신했다.





  뱃머리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조타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곳엔 이 배의 조타수이자 항해사이며 동시에 선장이라고 불러야 할 남자가 있었다. 그는 젊었고, 보잉 선글라스 아래론 꼼꼼히 면도하지 않은 턱선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먼 바다만 응시했다. 그의 눈앞에는 수십 개의 부표가 일렬로 늘어선 뱃길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배가 무라노 섬의 선착장에 닿자 그는 진지한 얼굴을 벗어던졌다. 그는 굵은 밧줄을 나루의 말뚝에 감아 배를 고정하더니 활짝 웃으며 승객들의 하선을 도왔다. 한 할머니가 그의 부축을 받아 무사히 땅을 밟을 수 있었고, 선착장에 나와 있던 다른 직원은 원래 잘 알던 사이처럼 그분에게 말을 걸었다. 600여 대의 수상버스를 소유하고 근 3,000명의 직원을 고용 중이며, 한 해 평균 1 8천만 명의 승객을 실어 나르는 이 거대한 대중교통 회사도 작은 섬의 선착장에선 한없이 친근해지는 셈이다.





  한국인 여행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이 첫 번째 선착장인 콜론나Colonna에서 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정거장인 파로Faro에서 내리기 위해 조금 더 배에 머물렀다. 부라노 섬으로 갈 때 탈 LN 선이 이 선착장에만 멈추는데, 나중에 다시 찾아오기 쉽도록 위치를 익혀두라는 인터넷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작은 섬을 조금 빙 둘러 가나 싶더니 어느새 배는 이물을 돌렸다. 커다란 등대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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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착장에서 무라노 섬 안으로 들어가며 이곳이 베네치아를 축소해 놓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간혹 거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만 지나다닐 뿐 거리는 한산했다. 유리 공예품으로 유명한 섬답게 중간마다 공방과 기념품 가게가 있었지만, 손님은 없고 라디오 소리만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쓸쓸하다기보다는 한가하다고 해야 옳았다. 낡은 문들은 겨울 햇살에 몸을 덥히는 중이었고, 세월에 낡고 단단해진 돌담은 어릴 때 살던 동네의 돌담인 마냥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아무 걱정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만드는 일로 시간을 보내며, 그러다가 때때로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체감하기 위해 몇 미터의 순례길을 걸어 광활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이 섬에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낭만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는지 우리도 금세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무라노 섬은 딱히 관광명소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보단 지문이 잔뜩 묻은 유리창에 달라붙어 공예품을 구경하거나 작은 수로를 따라 걸으면서 이런 곳에 살면 어떨까 상상하기 좋은 곳이었다. 섬의 중심쯤에 오자 유리 공예품을 파는 가게가 점점 많아졌다. 모래를 빚어 만든 작품을 보고 있으면 몇 세기 전 베네치아가 얼마나 화려한 도시였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것을 귀에 달거나 목에 걸면 어떨까. 영혼 없는 공산품으로 가득한 부엌에 저런 우아한 단지를 하나 놓으면 어떨까. 그런 욕심은 공예품 옆에 수줍게 앉아있는 가격표를 보면 이내 사그라지기 마련이지만, 그 누구도 꿈꾸는 대가까지 요구하진 않는다.







  유난히 많은 애완견도 무라노 섬의 매력 중 하나였다. 섬 이곳저곳에서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온 강아지(라기보다는 개)들을 만날 수 있었다. 녀석들은 종도 크기도 제각각이었지만, 한결같이 순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좁은 섬 안에서 마주치는 동물들 덕분에 평화스러운 분위기가 더해졌다. 호기심이 많은 녀석, 땅에 코를 박고 이방인의 흔적을 쫓는 녀석, 주인 옆에 달라붙어 점잖을 빼는 녀석 등 다양한 군상을 만날 수 있었지만, 특히 어느 가게 앞 공터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큰 개가 기억에 남는다. 그 친구는 길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세상사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표정으로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목줄도 없고 주인도 없는데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호기심이 발동한 우리도 잠시 그 옆을 지켰다. 몇 분 정도 기다리자 가게 문이 열렸다. 녀석은 때가 됐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서더니 가게 밖으로 나온 남자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여태 주인이 장을 보고 나오길 기다렸던 것이다. 안달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주인의 부재를 지키는 모습에서 현명함과 충직함이 느껴졌다.





  정오를 넘기자 밝고 부드러운 햇살이 섬을 적셨다. 땅은 온기를 품었고, 수로는 거울처럼 빛났다. 우리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곳곳을 누볐다. 옷가지를 파는 간이 시장을 지났고, 병아리를 연상케 하는 노란 초등학교를 보았으며, 섬의 끝에서 바다와 조우하기도 했다. 쿠키향 가득한 제과점에서 목을 축일 물 한 병을 사고, "그라치에 밀레"라는 말 한마디 덕분에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던 작은 여자아이와 인사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다가 한참 전에 지나갔던 조깅하는 남자를 다시 만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원래 유리 박물관을 볼 생각이었지만, 뭐가 문제인지 그곳을 찾을 수가 없었고 종국엔 찾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다리는 좀 고달프더라도 마음은 한없이 느슨해지니 여행이란 바로 이런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되는 것. 낯선 곳에서 낯익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 기꺼이 시간을 낭비하고 그것을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것. 무라노 섬은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슬슬 선착장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갑자기 둘 다 용무가 급해지는 바람에 안절부절못하다가 카페 겸 바를 찾았다. 점심시간이라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어르신 몇 분은 아예 술잔을 들고 나와 길에서 대화를 즐기고 계셨다. 안으로 들어서자 실내에 넘쳐흐르는 두터운 친분과 왁자지껄함 속에서, 동양인인 우리는 잠시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레몬 탄산수 한 캔을 사고 태연하게 화장실을 이용했다.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왔다 간 흔적(?)을 남기고 떠나는 우리도 이곳에서 본 강아지들처럼 순한 표정이었을까?











Canon A-1 + 50mm


Fujifilm F50f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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