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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릇 여행의 기쁨은 누군가 공항에 마중 나온 이가 있어 그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줄 때에 있지 않을까? 이 문장이 의문형인 이유는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술적으로 보면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일이나 의무에 의한 마중이었기 때문에 기쁨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를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물론 나와 D가 홍콩에 가던 세 번의 여행 첫머리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나는 까닭 없이 서운해지고는 했다. 어쩌면 일부러 서운해져 우리끼리 더 잘 놀아보자고 다짐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슬픈 처지가 아니다. 마닐라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줄 친구, B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착하면 자정이 넘는 시각이었던 탓에 혹시나 그가 곯아떨어져 나오지 못할까 걱정이 되긴 했으나 우리는 그를 믿었다. (무료한 비행 동안 혹시나 그런 일이 벌어져 둘 다 처음 발을 딛는 터미널에서 주소도 모르는 그의 집을 찾으러 가려고 허둥지둥거리진 않을까 상상하기도 했고, 실제로 벌어지면 재밌겠다며 최악을 바라기도 했다.)






  마닐라로 가는 다섯 시간의 반절은 무지하게 지루했다. 한 시간 조금 넘게 자긴 했지만, 대체로 피로와 기대가 뒤엉켜 책을 읽다 말고 펴다 덮고 허리를 뒤틀다 말며 시간을 때웠다. 비행기는 정말 작았다. 좌식형 관에 실린 기분이었다. 앞좌석에는 여행 망치고 싶지 않으면 우리 항공사의 보험에 꼭 가입하라는 광고가 붙어 있었다. 코알라로 의심되는 저 캐릭터는 가방을 잃거나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엎어지거나 그도 아니면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고생깨나 했다. 어차피 다음 여행에도 통장 잔고가 허락하는 대로 저가 항공사를 이용하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여행 망치고 싶지 않으면 너희 항공사를 이용하지 않는 게 낫겠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와 D는 한국 돈도 없었고, 심지어 필리핀 화폐인 페소도 없었다. 환전을 마닐라에 있는 B에게 모두 부탁해 놨기 때문이다. 맥주 한 캔조차 살 수 없었던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럼에도 알코올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래서 면세점에서 산 위스키 한 병과 데킬라 한 병 중 좀 더 저렴한 위스키를 깠다. 원래 최종 목적지까지 뜯으면 안 된다고 (의례적으로) 경고하고 있지만, 걱정을 하면서도 일 리터짜리 병을 개봉하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만 원짜리 한 장을 찾은 D가 콜라 두 캔을 사왔다. (더는 맥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우리는 위스키와 콜라를 섞은 칵테일을 두 잔 마시며 흥분에 휩싸였다. 상공에서 마시는 술은 확실히 강하다. 우리는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나 이제 비행이 지겹지 않았다.






  한밤중이라 나는 마닐라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지 못하고 공항에 내렸다. 우리가 내린 마닐라 국제공항 터미널 4는 규모가 아주 작았다. 팔라우의 공항보다도 작은 것 같았다. 원래 필리핀 국내선 터미널인데 우리의 에어아시아-제스트는 이곳에 우리를 내려줬다. 예정은 터미널 3이었다. 그런데 종종 불과 몇 시간 전에 출도착 터미널이 바뀔 수도 있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늘도 그런 일이 벌어져 터미널 3으로 가 있던 B도 헐레벌떡 터미널 4로 넘어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는 직접적으로 터미널과 교미하진 않았다. 계단을 통해 내린 우리는 잠깐 셔틀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이동했다. 터미널 입구 앞에는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저 작고 불편할 뿐이지 필요한 건 제대로 갖추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제대로 돌아가는 공항이라고 말이다.






  터미널이 얼마나 작은지 한 동 한 층 안에 입국 심사대부터 짐 찾는 곳까지 전부 있었다. 입국 심사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동선이 짧아서 오히려 편했다. 우리는 찾을 짐도 없었기 때문에 정말 여권에 도장 찍자마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얼마나 빨리 걸어 나왔는지 여기서 찍은 사진은 다 흔들렸을 정도였다.






  드디어 도착했다! Y의 결혼식 때 봤던 B가 아주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바로 이런 기분이구나. 처음 도착하는 도시에서 아는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든든하구나. B 말고도 애인을, 가족을,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입구 앞은 미어터졌다. 동남아시아는 처음이라 (편견에 의해) 보다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기대했지만, 학처럼 고개를 쑥 뽑은 사람들만 있을 뿐 대체로 조용했다. 밤공기도 생각보다 시원했다. 우리가 오기 전에 비가 많이 내렸기 때문이란다.







  사실 공항에서 누군가의 환영을 받는 것보다 더 기대했던 순간이 있다. 바로 나 자신이 누군가를 환영하러 나가는 것이었다. 이 또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한국도 아니고 나조차도 낯선 외국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나와 D, 그리고 B는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출발한 Y와 K를 마중하기 위해 다시 마닐라 국제공항 터미널 4에 와있었다. 밤중엔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었는데, 터미널 앞에는 저렇게 커다란 천막이 여러 동 있었다. 아침까진 그럭저럭 괜찮나 싶었던 햇살도 정오를 즈음해 무지막지하게 뜨거워져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공항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오로지 비행기를 타고 떠날 사람만 터미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대기자까지 수용할 공간이 한톨도 없기 때문이다.






  터미널 앞에 있던 천막의 용도가 이제 드러난다. 떠날 시간이 많이 남은 사람,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을 위한 대기장소였던 것이다.

  아, 굳이 명시는 하지 않겠지만, 이번 여행기에선 일행들의 얼굴이 툭툭 튀어나올 예정이다.






  우리야 국제선임에도 이곳으로 내렸지만, 엄연히 필리핀 내 노선을 위한 터미널이기 때문에 이곳은 마닐라에서 다른 필리핀 도시로 넘어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현지인이 대다수였고, 배낭 여행자도 꽤 보였다. 건물이 너무 작아 출발장도 없고 도착장도 없는 터미널 4는 수속 밟고 게이트 앞까지 가야만 에어컨 나오는 대합실에 앉을 수 있다. 그 외에는 바깥에, 바로 이곳에서 더위에 익어가야 한다. 하지만 천막 밑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미적지근한 바람을 맡다 보면 정신이 솔솔 실려 나가는 게 기분 좋아지기까지 했다. 의자 밑에선 고양이 한 마리가 거의 죽은 것 같은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유심히 살피자 제대로 숨을 쉬고 있었다. 도르랑도르랑, 녀석에게서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너도 덥지?






  그리고 역시나!

  정신줄 놓고 있던 나와 다르게 일종의 촉이 왔던 D와 B가 오늘 비행기는 제대로 터미널 3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왔다. 어제 우리가 그랬기 때문에 으레 Y와 K도 여기 터미널 4로 오겠거니 했는데 말이다. 내가 무료한 비행시간 동안 했던 상상을 Y와 K는 실제로 겪을 뻔했다. 다행히 도착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고, B가 차량을 수배해 둔 덕에, 우리는 당황하지 않고 터미널 3으로 이동했다. 곧 다섯 명이 모두 모인다는 기대감에 철없이 신이 났다. 잠시 보류되긴 했지만, 곧 누군가를 환영하는 기쁨이 어떤지 알 수 있을 터였다.




Canon EOS-M + 2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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