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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누키코지 5초메 옆에 있는 카페 랑방(カフェ ランバン)은 웹서핑 중 발견한 곳이다. ‘삿포로 카페’라는 아주 원초적인 검색어로 찾아낸 게 용할 정도로 사진만으로도 꼭 한 번 가봐야겠다 싶었던 카페다. 이는 거리를 걷다가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길 곳을 우연히 발견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카페 앞에 섰을 때, 황망히 지나치려다 다시 발길을 돌리고야 말았을 당위 비슷한 걸 읽어냈으니까.
 삿포로 TV 탑에서 다누키코지까지 걸어오면서 몸이 많이 지쳤다. 여행 가방과 함께 챙긴 숙취는 그럭저럭 해소됐지만, 잠은 여전히 부족했다. 홍콩이나 마닐라 같은 곳에선 어떻게 새벽까지 놀았던 걸까. 역시 내 몸속 기관은 알코올이 들어가야 피로를 잊고 작동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엔 같이 마실 사람이 없으니 차선책이 필요했다. 따뜻한 커피가 절실했다. 그리 힘들이지 않고 카페 랑방을 찾아내자 하얗게 빛나는 입간판이 실내의 온기를 예고했다. 표주박 같은 전등도, 오크통을 반으로 자른 모양의 화분도, 전형적인 붉은 벽돌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테니 잠깐 들어와 쉬라며 속삭이는 듯했다.



















 랑방은 로스터리 카페다. 짙은 컬러의 목제 인테리어가 실내를 어둑어둑하게 물들이고, 나지막한 클래식 음악이 공기를 차분히 가라앉힌다. 그렇다. 진부하지만 ‘클래식’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실제로 1977년에 문을 열었으니까 역사가 길긴 길다. 또, 쇼케이스엔 과일이나 병 음료 대신 여러 종의 원두가 담긴 큼지막한 밀폐 용기들이 진열돼 있다. 거의 열두 종에 달하는 원두에서 주인의 열정이 읽혔다. 값비싼 커피도 찾아볼 수 있었다. 100% 천연 코피 루왁이라든가 올해 수확한 파나마 게이샤라든가. 그 옆에서는 하와이 코나의 가격표가 적힌 푯말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게이샤를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얄팍한 지갑이 주문을 막았다. 대신 배도 고파서 커피와 케이크 세트를 주문했는데 그래도 게이샤 한 잔의 반값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쉰은 넘었을 법한 주인과 이십 대 중반의 남자가 흰색 셔츠 위에 보풀이 일어난 민소매 스웨터를 입고 커피를 나른다. 아저씨는 다소 무뚝뚝한 표정으로 원두를 갈거나 설거지를 했고 청년은 일본인 점원 특유의 예의 바른 말투로 주문한 메뉴를 내어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거의 말을 섞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주방 쪽에서 농담조의 대화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십여 분 정도를 지켜보고 나서야 두 사람이 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시폰 케이크는 평범했으나 함께 나온 블렌드 커피는 부드러운 바디감에 향과 산미가 살아있었다. 잔이 작아 아쉬울 지경이었다. 워낙 커피 문화가 발달한 일본이니 이런 가게가 한둘이 아니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어딜 가도 이런 수준의 카페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니겠나. 이런 카페가 아주 많다 해도 이곳이 그중 최고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면 결국 난 최고의 카페에 온 셈이니까. 커피를 좋아하고 잘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곳은 부산스러운 오너먼트도 폭넓은 취향의 결정체로 보이게 하고, 낡아빠진 대들보나 기둥도 세월의 미덕이라 믿게 한다. 여기에 나는 내게 나타나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덧붙이고 싶었다.



















 환담하는 아주머니들을 등지고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적당히 건조한 훈풍이 분다. 커피에 얹은 스팀 우유처럼 공기 중에 감도는 담배 연기가 뭔가에, 특히 눈앞에 놓인 흰 종이에 몰입하게 한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거리의 추위도 이곳으로는 침범하지 못했다. 거의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화자의 기분은 전해지는 이국인들의 대화도 이 시간을 즐겁게 한다. 더 오래 머물렀다면 나도 매일 이곳을 찾아 담배를 태우고 종이를 긁어대고 때로는 테이블에 엎드려 낮잠을 자기도 했을 것이다. 편의점 음식으로 하루를 버틴 돈으로 게이샤를 주문하고, 감탄사로써 주인을 흐뭇하게 했을 것이다. 나는 발아하지 못한 또 다른 오늘을 상상했다. 소망하는 오늘과 현존하는 오늘의 유일한 공통점은 이곳에서 하찮은 문장이라도 지어내면서 결국 글쓰기가 내 일이라 확신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걸로 충분했다. 곧 영업시간이 끝난다는 청년의 말에 아쉬워할 필요도 없었다. 확신은 떠나오기 전에 생긴 내 안의 구멍을 제법 야무지게 메우고 떠나갔다. 더군다나 내겐 아직 이틀이나 남아있었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아침에도 공항에 가기 전에 랑방에 들렀다. 짧은 일정 중 두 번이나 찾을 이유가 여기엔 있었다. 아마 세 번이었다면 세 번을 찾을 이유가 있었다고 썼을 것이다. 혹여 그게 네 번이었다 해도 네 번을 찾을 이유 역시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고.













카페 랑방(Cafe RANBAN)



 커피와 케이크 세트 880엔. 블렌드 커피 430엔. 기타 단종 커피는 종마다 가격이 다르며, 원두도 100g부터 판매.




Canon EOS-M + 22mm / 5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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