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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에도 액티비티는 있었다. 로빈슨 섬 앞에 정박하곤 배에서 다이빙하기. 깟바 섬에서 자전거 타기. 몽키 아일랜드 가서 원숭이를 구경하고 해수욕하기. 수영을 잘 못하는 나로서는 방비엥 블루라군에서 훨씬 더 높은 곳에서 뛰었음에도 로빈슨 섬에서의 다이빙에 도전하진 못했다. 게다가 숙취 때문에 좀비처럼 누워있던 친구들이 물에 들어갈 시간이 되자 갑자기 되살아나서 활개를 치는 통에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방비엥에서 샀던 수영복은 비엔티안 삐 마이 때 물을 맞은 후 찢어지는 바람에 버렸고, D가 빌려준 바지는 가방 안에 있었다. 그걸 갈아입는 것 또한 귀찮았다. 그러나 물은 맑았고, 배에서 바다로 곧장 떨어진다는 건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기는 했다.
깟바 섬의 서쪽인가 남쪽에 정박해 왕복 10km 정도 자전거를 타는 건 나와 D, 그리고 스위스에서 온 여성만 했다. 자전거를 무료로 탈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신청한 사람은 우리 뿐인 모양이었다. 타냐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자전거를 아주 잘 탔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선착장에서 뒹굴기로 하고, 가이드를 포함한 네 사람은 정오의 뜨거운 햇살 아래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깟바 섬 국립공원 근처까지 달리는 이 코스는 적요하고 아름다웠다. 처음엔 잘 포장된 도로를 달리다가 숲 속으로 들어섰는데 좌우로 높이 솟은 절벽이 근사했다. 나비도 유독 많았다. 한 마리는 열심히 달리는 내 옆에 따라붙어 잠깐 손잡이에 관심을 보이더니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오르막길에선 좀 힘들긴 했지만, 대체로 평지이거나 내리막길이라 속도가 잘 붙었다. 아침에 바른 선크림이 제발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자전거 코스 안에는 작은 마을도 있었다. 문을 활짝 열어 둔 시골집 안으로 이들의 터전이 드러났다. 거실엔 꼭 한 대씩 텔레비전이 있었다.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채 쇼핑몰 채널을 보던 한 남자가 기억에 남는다. 스쳐지나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뷰티 용품을 판매하는 프로그램과 그것을 아주 심드렁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주인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는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마을엔 개도 많았다. 이곳에 자주 오는 가이드의 말로는 한 집에 개나 고양이 한 마리씩은 꼭 키우고 있다고 했다. 어떤 개는 동남아의 다른 개들이 그러하듯 정말 죽은 것처럼 마당에 널부러져 있기도 했고, 어떤 개는 논두렁에 나가 뭔가를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혀를 길게 빼고 있는 녀석을 보면서 덥긴 사람보다 더 덥겠지만 최소한 햇살 걱정은 안 하겠다는 점이 부러웠. 이 마을에서만큼은 개팔자가 상팔자로 보이기도 했다.
가게가 아니더라도 진열대 하나와 냉장고 하나 쯤은 갖춰두고 지나다니는 여행자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집도 꽤 있었다. 거기에 놓인 과자나 음료수 병을 보며 도대체 며칠에 한 번씩 그것들이 팔려나갈까 의문스러웠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음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유독 한국 과자도 많았다. 특히 초코파이 상자가 많이 보였다. 서양인들이 초코파이를 먹으면 뭐라고 할까? 스위스 초콜릿처럼 진하고 고급스러운 맛은 아니겠지만, 나 역시 초코파이를 퍽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부디 그들도 초콜릿 코팅과 마시멜로우, 그리고 조금 뻑뻑하지만 배를 채우는 덴 그만인 한국의 베스트셀러가 마음에 들길 바란다.
편도 코스가 끝나는 지점엔 숙소 겸 가게를 하는 집이 하나 있었다. 반환점이었다. 쉬면서 음료수를 마셨다. 동네 애들인지 모두 주인의 아이들인진 모르겠는데 골프 카트 같은 전동차에 한 꼬마 녀석이 누워있었다. D가 말을 걸자 이방인이라 울음을 터트렸다. 형이 달려와 위로해 주기도 했다. 퍽 귀여운 녀석이었지만, 사내녀석이라 나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나는 딸을 낳고 싶을 따름이다.
자전거를 타면서 중간마다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워낙 다들 지체하지 않고 달려서 별로 찍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 시간 조금 넘는 땡볕 아래 바이킹이 배에서의 시간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깟바 섬까지 이 배를 타고 갔다가 다음 날 닌빈으로 넘어간다는 타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잔뜩 흥분해 있는 배 위의 젊은이들보다 훨씬 진중한 면도 있었고 말이다. 게다가 우리 셋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온 가이드 '위시'도 보면 볼수록 괜찮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맡은 남은 고객이 몇 되지 않아도 항상 주의를 기울였고, 앞으로 무엇을 하는지 차분하게 미리 설명해 주는 남자였다. 타냐도 이후의 베트남 일정에 그의 도움을 많이 받는 것 같았다.
밤에 시끄러운 펍이나 바에 가면 우리도 미친듯이 떠들며 춤을 추고 놀지만, 이런 낮에는 삼십 대를 넘긴 티를 좀 내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여행 후반부에 와서는 조용한 시간이 더 좋다. 차분히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때로는 말이 끊기기도 하는 정적. 우리 때문에 배 위에서 한 시간 째 기다리고 있는 왁자지껄한 무리와도 친해지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력이 남아있지 않다. 이미 단단하게 친해진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 필요가 뭐가 있겠나. 친절하고 호의적이며 어떤 선을 긋지 않는 사람들 역시 이렇게 많이 남아있는데 말이다. 대체로 여행 중 만나는 많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려했고 또 그렇게 해오긴 했으나 이번에 만난 젊은 친구들만큼은 좀체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자전거를 타고 돌아온 우리를 태우고 크루즈는 다시 바다로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몽키 아일랜드였다. 깟바섬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 섬이 몽키 아일랜드인 이유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숭이가 많아서다. 실제로 섬에 내려 리조트(?)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원숭이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워낙 사람이 많이 오가기도 하고 가이드들이 원숭이의 관심을 끌기 위해 먹이로 줄 과일을 챙겨다니기 때문에 그런지 녀석들은 인간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가이드는 내내 원숭이들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말고 소지품을 채가지 않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다. 파인애플 한 덩이를 들고 온 가이드는 그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뭐랄까 절대로 친해질 수 없는 적국의 병사들과 교류하는 느낌이랄까. 파인애플을 작은 덩이로 나누어 주며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인간과 원숭이는 절대 화합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도 절대 '친해지진' 않아요." 가이드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먹이를 받기 위해 슬금슬금 다가오는 모습이 다 큰 놈이든 새끼든 귀엽긴 했으나 인간을 '좋아한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그들은 영리했고 재빨랐으면 기회만 있으면 파인애플이 든 봉지를 통째로 채가거나 사람들이 덜렁덜렁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에 뭔가 괜찮은 게 있지 않을까 확인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원숭이가 손을 쓰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인간과 닮아 있었다. 다른 팀의 가이드에게서 파인애플 봉지를 무사히 빼낸 한 원숭이는 여유있게 봉지의 묶음을 풀고(사실 거의 찢어버리고) 과일만 골라 먹었다. 똑똑한 동물들을 보자 호기심이 불끈불끈 솟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한 독일 여자에게 이상할 정도로 적개심을 품은 한 놈이 그녀에게 달려들기도 했다. 다행히 할큄 당하거나 물리진 않았으나 모두 당황했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장에야 놀랄 일이었으나 함께 온 그녀의 남자친구가 당시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곧 일행의 놀림거리가 되며 웃음이 터져나왔다. 원숭이에게 공격 당할 뻔한 여자야 표정이 아주 아주 아주 안 좋았으나 뭐, 사고는 없었으니까. 그 다음부터 서양 친구들은 원숭이에 대한 관심을 끊고 물놀이를 즐겼다. 남아 있던 나와 D는 여전히 바다로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 D는 계속 신기하다는 듯 원숭이를 관찰했고, 나는 잔 태양처럼 반짝이는 눈부신 백사장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바다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깐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가 섬의 전경을 감상하기도 했으나 그외에 딱히 우리가 한 일은 없었다. 한 남자는 실수로 바지에 지갑을 넣고 들어가 버렸고, 한 남자는 나에게 담배를 한 대 꿨다.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그 어느것도 하지 못하는 묘한 위치에 있는 이 상황을 최대한 편한 마음으로 즐기려 했다. 다행스럽게도 몽키 아일랜드가 마지막 일정이었고, 깟바섬에 내려 각자 숙소로 가는 시각도 오후 세 시 정도로 그리 늦지 않았다. 이제 휴식이 필요했다. 한 일도 없지만 그냥 낮잠이라도 자며 잠을 청하고 싶었다. 그러자 먼저 이 배에 타고 있던 친구들과 우리 사이에 어떤 벽이 있었으며 그 벽을 더듬느라 빨리 피곤해졌다는 사실 깨달았다. 어제 배 위에서 잠들기 전에도 느꼈던 바지만, 슬슬 샘 내지 않는 법을 터특한 모양이었다. 나는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허리나 쭉 펴고 눕고 싶었다. 바다 위에 표류한 크루즈는 우리를 오늘의 최종 목적지 깟바 섬으로 데려가기 위해 새파란 태양 아래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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