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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딜 가든 표지판을 눈여겨 봐
. 그 나라 말로 뭔가를 설명하거나 경고하려는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어. 아니면 참견하기 좋아하는 친구나 교사의 얼굴을 하고 있거나.
  표지판을 보면 다른 나라, 다른 문화로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돼. 드 보통이 말했지, "어떤 자리에 고향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것을 대신해서 자신의 성향에 더 들어맞는 낯선 대상이 있을 때 이국적인 정서를 느낀다". 나한텐 그것이 표지판, 푯말, 대충 그려 놓은 낙서 따위인 셈이야. 이등변 삼각형, 길쭉한 마름모, 옆으로 퍼진 직사각형과 완벽한 곡선의 원. 꼴도 색도 제각각인 바탕 위에 다른 언어가 쓰여있는 게 좋아. 아무리 많은 외국인 사이에 있어도 푯말을 한 번 올려다보는 것만큼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아. 믿을지 모르겠지만, 표지판은 나를 미치게 하는 페로몬을 풍기는 게 분명해.


  표지판은 그것이 세워진 순간부터 나의 눈에 띈 지금까지의 세월을 상상하게 해
. 자칫하면 그냥 스쳐 지나가 버렸을 모종의 정서를 품고 있기도 하고. 이건 본디 그것이 세워진 의도와는 상관이 없어. 사실 이들이 하는 얘기란 게 거의 다 비슷하잖아. “이 이상 접근하지 마시오.” 라고 겁을 주거나이곳은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입니다.” 라는 자랑을 하지. 아니면당신이 찾는 곳은 사실 반대편인데요.” 라며 약을 올리기도 하고 말이야.
  그럼에도 세상 모든 표지판은 나에게 기쁨을 줘. 연유 없는 반가움과 대상 불분명의 아련함도 함께 불러일으키지. 사시사철 제자리를 지키는 나무를 닮은 인내가 좋아. 녹이 슬고 도료가 벗겨진 부분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이 좋아. 누구나 한 번쯤 눈길을 주지만, 이내 풍경에 묻혀 의식에서 밀려나는 미약한 존재감까지도 좋아. 외로움에 대처하는 현명한 자세를 배우고 싶다면 표지판을 멘토로 삼아도 좋을 거야.



  일 년이든 십 년이든 나보다 먼저 이곳에 와서 이 철 기둥을 세웠을 누군가가 있겠지. 주인공은 하와이 주정부 산하의 교통부나 토지 및 천연자원 관리부에서 일하던 사람일지 몰라. 배가 잔뜩 나오고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우는 중년이었을 수도 있고 깐깐한 눈으로 표지판이 설치되는 걸 지켜보던 30대 중반의 남자였을 수도 있겠네. 푯말을 설치하는 작업은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겠지만, 몇 년 후 낯선 나라에서 찾아온 한 남자에겐 의미가 남달랐어.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남겨놓은 선물을 발견한 것 같았지.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서 친절한 관심을 받았다는 착한 착각에 빠지자 이상하게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게 위안이 되었어. 철판 조각에 글을 써놓은 조형물 하나가 한 편의 문학 작품처럼 마음을 움직인 거야. 그것도 여행 내내 나보다 먼저 그곳에 달려가 내가 오길 기다리면서. 너 여기서 까불다간 크게 다칠 수 있다고 주의를 주면서도 영 귀엽기만 한 모습으로.


canon A-1 + 24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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