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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기를 시작하는 말로는 뭣하지만 나는 여행에 환상이 없다. 여행을 인생의 궁극 목표나 일상의 탈출구, 감성 충전기 등으로 여기지 않았다. 많이 떠나보진 않았지만 여행은 그저 일상의 연장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럼 여행을 왜 가나? 여행을 일상의 연장이라고 본다면, 환상이 없다고 내일을 살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이곳에서의 오늘과 그곳에서의 오늘의 가치는 언제나 동일하다. 낯선 땅, 낯선 길이 주는 낯선 분위기가 있을 뿐이다. 여행과 낯선 땅이 동의어라면 첫 문장을 고쳐야할지 모른다. 하지만 낯설든 익숙하든 얼마간 제 있던 자리가 아닌 곳을 찾아가는 게 여행이라면 그냥 놔두어도 좋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옆 동네로 산책을 가는 일도 여행이다. 이럴 때 여행은 환상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 익숙한 곳에서도 새로움을 찾는 안목과 여유가 있다면 훨씬 현실적인 행복이 함께하는 사람이리라.

  글길을 원래의 방향으로 돌리자면, 낯선 곳이 주는 냄새를 맡고 싶다는 소망은 항상 있었다. 쉬이 떠날 수 없으니 옆 동네도 낯설 게 보자는 게 평소의 생각이지만 가끔은 수고 없이 횡재를 하고 싶은 법이다. 게다가 배낭을 맨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길을 돌린다는 유럽. 매일 보는 사람도 없고, 매일 보는 글과 말도 없고, 매일 보는 건물과 자동차도 없는 곳. 낯설어지다 못해 외로워지기 좋은 곳. 갑자기 잠시 동안 그곳으로 떠날 기회를 얻었을 때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긴 서두로 시작하는 별 볼일 없는 여행기가 등장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떠나자!!!

  2010.1.14. 14:00, 인천공항 발 AF 261. 공항엔 일찍 가야한다는 사람들의 조언은 역시 '진리'였고, 헐레벌떡 빠트린 물건을 비싼 값에 채워 넣은 뒤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힘차게 활주로를 벗어나는 순간에도 두근거림은 없었다. 짧지만 모두가 한 번쯤은 꿈꾸는 유럽행 비행기에 오르고서도 감동이 없다는 건 적잖이 속상한 일이다. 서두엔 자랑스럽게 '여행에 환상 같은 건 없어'라 써놨지만 가는 길 내내 그런 알량한 소신이 원망스러웠다.
  인천에서 파리까지 12시간. 떠나기 전엔 걱정스러웠지만 너무나 건조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장시간 비행도 나쁘지 않았다. 대한항공 여객기에 설치된 스크린으로 동행한 친척동생과 테트리스 멀티플레이를 즐기고, 골프 게임을 하며 18홀을 모두 돌았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물랑루즈'를 보기도 했다. 파리로 가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도 11,000km에선 마음도 중력에서 좀 풀려나기 때문일까. 몇 번 봤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여러 번 돌려 본 영화가 새삼 가슴을 아프게 했다. 슬픈 쇼가 끝난 저 곳에 가는 거야. 비록 하루 종일 내린 비에 지쳐 파리에서 물랑루즈를 보진 못했지만 그 순간만은 기대에 부풀었다.


  영화가 끝나자 힘이 빠졌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갑자기 여행을 떠난 만큼 가는 내내 가이드북을 읽자고 다짐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명이 뭔 필요가 있어, 그냥 가서 직접 보면 되는데. 책을 덮고 앞을 보니 비행기 안은 아주 어두웠다. 읽을거리나 끄적거릴 게 있는 사람들의 자리마다 중간 중간 보조등이 들어와 있을 뿐이었다. 커다란 야간 고속버스를 탄 것 같았다. 창문 밖으로 들리는 바람소리나 적당한 덜컹거림은 크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현상의 원리는 똑같지 않은가. 아니, 다른가? 하지만 누군가를 싣고 간다는 점만은 다를 게 없겠지. 이런저런 잡생각, 도대체 이놈의 땅덩어리는 왜 이렇게 넓은가 하는 푸념, 그리고 마셔도 마셔도 가시지 않는 갈증과 함께 드디어 12시간의 비행이 끝났다. 선회하는 기체의 차창 너머로 노란 불빛이 총총히 떠올라 있는 도시가 보였다. 파리, 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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