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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에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보이는 기분은 묘하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깜빡깜빡 형광등이 켜지는 것 같다. 그 때는 잠시 시간도 멈춘다. 점차 내가 눈을 뜬 곳이 호텔의 한 객실이고 이 땅이 이국의 도시라는 걸 깨닫는다. 아, 여행을 왔지. 여기는 파리고. 시간은 오전 7시 30분. 알람을 끄고 옆 침대를 보니 친척 동생도 깨어 있었다. 파리에서 맞는 첫 아침이다. 엄청난 일정의 시작이다.

  샤워 후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 로비가 0층이고 우리나라로 치면 2층이 여기서는 1층인 구조가 생소하다. 미니바에선 벌써 나갈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지만 봉주르, 봉주르, 인사를 나눴다. 처음엔 어찌나 어색하던지. 하지만 외국 땅에선 처음 보는 이와 서슴없이 인사를 나눌 정도로 마음이 풀어지는 게 좋다.
  아침 메뉴는 생각보다 다양했다. 커피머신과 미네랄 워터, 주스. 갖가지 빵과 치즈, 햄과 잼, 그리고 시리얼. 밥이 없으면 안 된다는 친척 동생은 불편한 기색이다. 있는 건 다 하나씩 접시에 담았다. 골고루 맛보자는 심산이었지만 욕심이 과했나 접시를 비우는 게 만만치 않았다. 평소 빵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벌써부터 질리는 기분이었다.

아담하지만 먹을 게 많았다.

  미리 짜둔 일정표를 검토하고 보조 가방을 채웠다. 파리 가이드 북 한 권에 e-티켓과 유레일 셀렉트 패스, 현금, 여권, 물통, 디카에다가 필카 용 광각 렌즈까지. 그 많은 걸 다 쑤셔 넣자 가방이 묵직했다. 사진 찍으러 다니느라 무거운 가방을 많이 들고 다녀봐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란 생각이었지만 역시 사람은 경험을 해봐야 뭐가 실수인지를 안다. 절실히 깨달은 바, 도보 여행은 할 수만 있으면 카메라와 지갑만 들고 맨몸으로 나가는 게 최고일 것 같다. 어쨌든 불과 몇 시간 후면 엄청난 후회를 하게 된다는 것도 모르고 준비 단단히 했다고 만족한 채 호텔을 나섰다.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흐린 날씨였다. 그래도 주광 아래 보는 거리는 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오늘의 첫 목적지,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파리의 지하철 통로.

  8호선으로 Concorde 역까지 가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몇 정거장 가지 않아 Palais Royal - Musee du Louvre에 도착. 딱 보기에도 루브르 박물관이 가까울 것 같은 역 이름이다. 출구를 나서자마자 커다란 벽이 우리 옆에 불쑥 나타났다. 주위를 둘러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고 루브르 박물관은 도대체 어딜까? 싶었는데 웬걸, 사람들이 자꾸 커다란 벽 사이(?)로 들어간다. '커다란 벽'이 바로 루브르 박물관이었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우중충한 하늘 아래 옛 궁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우리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 피라미드 사이로 솟은 분수대도 흐린 날씨엔 어쩐지 처량해 보였다. 개장한 지 한 시간 가까이 됐지만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멀리 튈르리 정원이 보이는 쪽으로 자리잡은 입구도 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간단한 보안 검색대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유리 피라미드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은 색달랐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 같달까. 밝은 햇살이 너무 아쉬운 순간이었다.

드디어 루브르 박물관에 오다!

  사람이 별로 없다는 생각은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수정됐다. 입구와 달리 중앙홀(나폴레옹 홀)은 많은 관람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특히 단체 견학을 온 학생들이 많았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무리들부터 다 큰 청소년까지 다양한 외국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일단 입장권을 사야 했다. 우리는 '파리 뮤지엄 패스'를 사서 루브르부터 개시할 생각이었는데 곳곳에 있는 무인 매표기에서는 이걸 살 수가 없었다. 헤매다가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거꾸로 된 피라미드가 있는 쪽으로 가란다. 한글로 된 브로셔를 집어 들고 통로를 따라 가다보니 뮤지엄 패스 광고지가 붙은, 사무실 비슷해 보이는 곳이 보였다. 32유로에 2일용 뮤지엄 패스를 구매했다. 판매원은 쾌활한 말투로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았다. 주로 'Yes'와 웃음으로 대답하는 즐거운 대화가 끝난 후, 오늘 날짜와 이름을 쓰는 것으로 루브르 박물관 입장 준비를 마쳤다. 중간에 짐을 맡길까 했지만 안내원이 귀중한 게 보관된 가방을 맡기는 건 위험하다고 하길래 그만뒀다.


  브르 박물관은 세 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리슐리외관(Richelieu), 쉴리관(Sully)관, 그리고 드농관(Denon)이다. 각각 반지층부터 3층까지 있으며 상층으로 갈수록 시간대가 현재에 가까워진다. 파리에 왔지만 우리의 테마는 미술관 관람이 아니었기에 최단 시간에 원하는 것만 볼 수 있는 루트를 짰다.

  먼저 함무라비 법전을 비롯한 고대 오리엔트의 전시물들을 보러 갔다. 중학교 역사 시간부터 알고 지낸(?) 함무라비 법전은 사실 검은색 돌기둥이었다.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알게 된 스스로의 무식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다음으로 발길을 돌린 곳은 리슐리외관 2층에 있는 나폴레옹 3세의 아파트먼트였다. 벽이며 천장이며 온통 붉게 채색된 공간이었다. 또 붉은 방들은 금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거울과 샹들리에, 가구를 모으는 데 취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눈이 뒤집어질 만큼 고급스러운 세간('세간'이란 단어가 주는 어감이 어색할 만큼)과 어우러져 혼을 쏙 빼놓을 만큼 화려했다. 후에 나폴레옹 3세가 그리 훌륭하지 못했던 지도자라는 걸 알게 되자 기억 속 그의 거처는 한층 사치스러운 곳으로 남게 됐다. 하지만 붉은 색을 좋아하는 나로선 그 화려함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나폴레옹 3세의 아파트먼트. 정말 붉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폴레옹 3세의 아파트먼트를 돌아보았다. 이후 19세기에서 17세기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랐다.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온 지 한 시간 밖에 안됐지만 벌써부터 어깨며 다리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특히 처음엔 만만했던 가방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만큼 이곳의 규모는 엄청났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전시물들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덩치만 큰 건 아니었다. 이곳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다른 세상이거나, 아니면 그 경계의 어딘가를 걷는 듯 했다. 창밖의 풍경이 생경하게 보일 정도로 루브르의 내부는 설득력이 있었다. 여기선 시간마저 멈춘다는 착각을 들게 했던 것이다. 수백년 된 궁전 안에서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거쳐 온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설득당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시간도 여기선 찰나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쪽으로 오세요.

  체력이 더 떨어지기 전에 모나리자를 보러 가기로 했다. 쉴리관을 거쳐 드농관으로 가려는데 익숙한 얼굴이 우리를 반겨줬다. 바로 '모나리자'였다. 정확히는 모나리자가 이쪽에 있다고 알려주는 표지판이었다. 모나리자가 루브르를 먹여 살린다는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드농관으로 향할수록 사람도 많아졌다. 아폴로 갤러리를 지나 이태리 회화들을 감상했다. 단체 견학을 온 학생들이 전시장 이곳저곳에 앉아 설명을 듣고 있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것으로 보이는 학생들이라 그럴까 그들의 눈빛은 진지했다. 불어를 쓰는 걸로 보아 현지인인 듯 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대작들을 만날 수 있다니 부러울 따름이었다.

진지하게 그림을 감상하는 아이들.


  모나리자에 가까워지자 저도 모르게 두근거렸다. 회화에 조예가 깊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모나리자는 좀 달랐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연인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그냥 꼭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녀를 만나러 가며 나와 같은 떨림을 갖지 않을까.
  드디어 모나리자가 있는 홀에 들어섰다. 그녀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커다란 미술품들과 함께 있지만 관람객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걸 보면 놓칠래야 놓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어쩐지 맥이 빠졌다. 너무 멀리서 감상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진득하게 보고 싶었는데 렌즈를 낀 눈이 침침했기 때문에 오히려 모나리자가 찍힌 엽서를 들여다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도 그녀의 미소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드디어 만났어요, 모나리자.

  실망이 커서 그런지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오도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관 1층에 있는 아프로디테, 일명 밀로의 비너스를 보고 관람을 마치기로 했다. 프랑스 회화 쪽으로 갔다가 한층 아래로 내려오니 고대 그리스의 조각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조각들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베일을 쓴 여성의 조각이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베일은 마치 실제의 그것처럼 그녀의 얼굴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릴 것 같은 그 솜씨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밀로의 비너스도 봤지만 앞서 본 조각이 더 인상 깊게 남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Antonio Corradni - 'Femme voilée'


  그리스 조각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한층 더 내려오니 중세의 루브르 전시관이 나왔다. 루브르 궁전의 성벽이라고 해야할까. 공사 중에 이곳을 발견하고 전시실로 개방했다는 곳이다. 거대한 지하엔 세월 만큼이나 육중해 보이는 벽이 있었다. 천천히 둘러본 후 다시 나폴레옹 홀로 나왔다. 시간은 정오 쯤 되었을까. 기념품을 살까 하다가 관두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분수대와 피라미드 사이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튈르리 정원으로 향하며 루브르 박물관 관람을 마쳤다.


  르리 정원으로 가는 쪽엔 카루젤 개선문이 있다. 파리에 있는 개선문들은 서로 일직선상에 있다는데 카루젤과 어제 본 개선문은 크기 면에서 차이가 컸다. 좀 둘러보다가 정원으로 들어서자 한국에 놔두고 온 장갑이 아쉬워졌다. 훤하게 트인 사방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손이 시리면 카메라고 지도고 제대로 들고 다닐 수가 없는 법. 그런데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행운(?)이 찾아왔다. 한 남자가 돗자리 같은 걸 깔아놓고 모자와 장갑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따뜻해 보이는 장갑을 들고 얼마냐고 물어보니 15유로란다. 너무 비싼 거 같아 그냥 가려는데 갑자기 붙잡더니 이번엔 12유로를 부른다. 좀 고민하다가 역시 비싼 거 같아서 고개를 젓자 그러면 얼마에 사겠냐고 묻는다. 8하려다가 그냥 10을 불렀더니 바로 OK. 뭔가 속은 기분이었지만 내 손은 소중하기 때문에 값을 치르고 장갑을 샀다. 너무 두터워 가져간 휴대폰을 만지는 건 불편했지만 카메라를 조작하는 덴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어찌나 따뜻하던지! 나중에 좀 더 돌아다니며 시세를 알아보니 2~3유로 정도 비싸게 주고 산 거였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좀 투박하게 생겨서 그렇지 여행 기간은 물론 한국에서도 잘 끼고 다니고 있으니까. 파리에서 가져 온 기념품 아닌 기념품이다.
  장갑을 사자 추위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원, 아니 공원이라고 부르는 게 어울릴 듯한 튈르리 정원은 흐린 하늘 아래 그렇게 썰렁할 수가 없었다. 정원의 모든 것이 사람의 손을 떠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파리 사람들이 이곳을 즐겨 찾는다지만 그건 역시 따뜻할 때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많은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의 여행기들이 여름을 기준으로 쓰여져서 일까. 앞으로 계속 느끼게 되지만 겨울 여행은 예상과는 다른 풍경의 연속이었다.

오가는 사람이 적진 않았지만 황량하기는 변함이 없다. 멀리 관람차가 보인다.

  녹음이 우거질 때 다시 찾고 싶다는 마음을 뒤로 하고 튈르리 정원을 나왔다. 콩코드 광장을 거쳐 이번엔 북쪽으로 향했다. 마들렌 사원과 오페라 가르니에, 방돔 광장 등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지도상으론 아주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그곳들이 골목과 골목 사이로 빠지면서 점점 멀어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마들렌 역 부근을 헤매고 있다는 건 확실했기 때문에 주요 명소를 한 번에 찾아가기보단 그냥 파리의 거리, 이곳저곳을 걸어보기로 했다.

  콩코드 광장 위쪽의 거리는 호텔이 있는 Boucicaut역 부근이나 어제 들렸던 샹젤리제 거리와는 느낌이 또 달랐다. 누가 채워 넣은 것처럼 거리는 갑자기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화려하기 보다는 세련됐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단순히 쇼핑을 하거나 먹고 마시는 유흥가(?)가 아니었다. 일터가 있고 그 곳에서 각자의 일에 바쁜 도시인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바게트나 샌드위치 등을 들고 다니며 먹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만큼 급하게 사는 걸까 운치가 있는 걸까. 이곳에 살아보질 않았으니 당장 그 답을 얻을 순 없으리라. 파리지앵이면 이러해야 한다는 가이드북의 허튼 소리에 혹할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휙-

  거대한 마들렌 사원을 한 바퀴 돌고, 멀리서 오페라 가르니에를 보고, 방돔 광장은 들리지도 못한 채, 우리는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작은 베이커리 앞에선 뭐가 맛있나 기웃거려 보기도 했고, 담배를 물고 스쳐지나가는 남녀를 보며 파리 사람들만큼 코트가 잘 어울리는 이들도 없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이국적인 건물들도 계속 보다보면 옆 동네처럼 익숙해 진다. 나중에 가서는 원래 이곳에 살았던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만큼 파리는 친근한 도시였다. 다른 곳에선 아무래도 다른 점을 찾게 된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같은 점을 찾는 일도 의미가 있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이 으레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곳이긴 하더라." 파리도 도시인들의 땅이라는 건 다르지 않았다.

흐린 날, 파리의 거리 스케치.

  어쨌든 꽤 오랫동안 별다른 목적지 없이 거리를 걸어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다리가 꽤 무거워졌을 즈음, 어느새 루브르 박물관의 건너편까지 돌아와 있었다. 직선으론 그리 길지 않은 거리였지만 워낙 골목이 많아 그 두 배는 걸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마레 거리로 '또' 걸어갔다. 몇 정거장 안되는 만큼 1회권 한 장이라도 아끼고, 가면서 점심이라도 사먹자는 심산이었지만 사실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도를 보니 마레 지구까지 가는 길 중간엔 들를 곳이 많았다. 일단 거대한 생퇴스타슈 교회가 있었다. 50mm 단렌즈로 전체를 잡을 생각은 애초에 접고 그저 엄청난 크기를 감상했다. 그 다음은 포룸데알이었다. 현대식 쇼핑몰이라고 할 수 있는 포룸데알은, 글쎄, 쇼핑을 하고 싶다면 모를까 굳이 거쳐 갈 필요는 없는 곳 같았다. 아무리 디자인이 독특해도 거대한 쇼핑몰은 한국에서도 지겹게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음으로 분수인지 뭔지 구분하기도 힘들었던 이노상 분수를 지나 Châtelet 역 부근까지 갔다. 다시 방향을 틀어 길을 건너면 이번엔 퐁피두 센터다. 포룸데알과 샤틀레 역, 그리고 퐁피두 센터로 이어지는 길엔 상가도 많고 먹을 곳도 많았다. 포룸데알을 기준으로, 이전까지 조용하던 거리가 갑자기 살아난 느낌이었다.

  이쯤 되니 더 이상 허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뭘 먹을까 하다가 어디 들어갈 시간은 없겠다 싶어 노점에서 빵을 사먹기로 했다. 사람들이 들고 다니던 샌드위치가 어찌나 맛있게 보였던지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친척 동생은 참치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골랐고, 나는 닭고기가 들어간 파니니를 택했다. 파니니야 빵이 부드럽고 굽기까지 하지만 샌드위치는 보기와는 많이 달랐다. 바게트처럼 딱딱한 빵 때문에 녀석은 먹는 내내 이가 아프다고 투덜거렸다. 그렇다고 파니니의 맛이 훌륭했다는 건 아니다. 모짜렐라 치즈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맛이 무색할 만큼 뭔가 밋밋하고 느끼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걸 다 먹을 수 있었던 건 시장이 반찬이기 때문. 손님이 줄을 선 곳에서 사먹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대충 배를 채우고 퐁피두 센터 주변을 구경했다. 퐁피두 센터 앞에선 여러 사람들이 각자 장기를 뽐내며 구경꾼을 모으고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있었고, 커다란 비누방울을 만들어 시선을 끄는 사람도 있었다. 연주자는 서로 다르지만 웅웅거리는 음색의 관악기와 발랄한 현악기의 연주가 어우러져 작은 광장을 가득 메웠다. 공터에 모인 소리는 아찔할 정도로 성글고 너르게 퍼져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음악에 완전히 파묻힌 듯 보였고, 둥둥 떠다니는 비누방울은 꿈처럼 반짝거렸다. 시간을 재는 감각이 무뎌지고, 얼마나 있었는지도 모르게 그곳에 머물렀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이 그 자리에서 기억처럼 변하는 순간이었다. 아련했다.

누구나 저 비누방울을 보며 그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거야.



PS.
한 편이 너무 길어진 관계로 파리에서의 이틀째는 두 편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두둥~!



핑크색 캡션 사진은 F50fd으로
푸른색 캡션 사진은 Canon A-1 + superia 200으로 촬영했습니다.
F50fd 사진은 필름과 느낌을 맞추기 위해 크롭 및 보정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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