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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츠포드 테라스에서 한국 식당이 많은 거리를 지나 좀 더 아래쪽으로, 스타의 거리에 가까운 쪽으로 이동했다. 우리는 점점 강렬해지는 배고픔을 살살 달래며 눈에 띄는 근사한 곳이 나타나기를, 저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그런 곳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물론 메뉴 자체는 일식으로 하자고 이미 결정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패할 확률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일식을 먹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오히려 홍콩에서 보다 만족스러운 일식을 먹으리란 기대에 부풀어 새로운 일식당을 향한 도전 의식을 불태웠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런 의미에서 '고궁'이란 한식점도 우리의 주의를 끄는 덴 실패했다. 오히려 내가 담고 싶었던 건 하늘이었다. 정말 가끔씩 밖에 찍지 않게 된 하늘을 말이다. 건물의 외곽선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이 스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세상이 바람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photo by D


  우리는 저번 여행에서 장어 덮밥을 맛있게 먹었던 일식집 부근까지 간 다음, 그 주변에 있는 다른 곳을 선택했다. 일단 가격이 더 저렴했다. 장어 덮밥과 카레 돈까스, 거기에 교자를 더해 맥주까지 두 병 주문했는데 그리 비싸지 않았던 것 같다. D가 시킨 장어 덮밥의 장어 양이 어마어마했는데 오히려 맛은 카레 돈까스 쪽이 더 좋았다.







  그럼에도 이쯤 되면 되풀이하는 말이 있다.

 "일식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아."

  맥주까지 아주 맛있게 먹었다.






photo by D


  만족스럽게 배를 채운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고민을 다시 시작했다. 골목길은 그 전체가 누군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아무렇게나 버리고 간 듯한 인상을 준다. 담배를 피우며 그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문득, 스타의 거리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이번 여행에선 관광지라 불릴 만한 곳을 단 한 군데도 찾지 않았다. 우리가 지난 두 번의 여행 동안 밟지 못한 거리를 찾긴 했으나 그건 마치 머릿속에 가본 적 있는 거리의 기억만으로 지도를 그리고 있고, 그것이 거의 완성 단계에 올랐으나 흉측하게 빠진 부분이 있어 그걸 채워넣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기 때문에 움직인 쪽에 가까웠다. 그리고 밑그림을 완성하고 나니까 다른 어떤 곳을 더 찾아가야 한다는 의무감 자체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지난 이틀 동안 거의 떠돌아다닌 편에 가까웠다. 그러니 일정 막바지를 맞이하여 관광객티를 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그래서 이젠 익숙한 길을 따라 스타의 거리까지 짓쳐 걸었다. 그러고 보면 스타의 거리를 낮에 가는 건 또 처음이었다. 단지 밤낮이 바뀌었을 뿐인데 새로운 곳을 찾은 듯한 흥분을 느꼈다. 아, 비슷한 경험을 조금 전 너츠포드 테라스에서도 했었지. 그러나 홍콩섬 마천루의 실루엣이 야간 조명의 화려한 목소리에 휩쓸리지 않고 제 선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풍경은 낮의 너츠포드 테라스와는 다른 감상을 전해줬다. 유리와 철골의 오케스트라는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가 너무도 또렷해서 감상자로 하여금 그 복잡성에 혼란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아이는 제가 타는 유모차를 끌고 간다. 부모가 유모차를 끄는 걸 보며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저에겐 편리한 탈것이 분명하지만, 끌어야 제맛이라는 걸 눈치챈 걸까. 그리고 아마 아이는 세사미 스트리트를 좋아할 것이다. 부모도 아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의 티셔츠를 입어줘야 제맛이라는 걸 눈치챘나 보다.







  샹그릴라, 구름, 오늘도 무탈하게 비를 맞지 않고 지나갈 줄 알았던 착각.







  완차이에 호텔을 잡아두고 그쪽을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홍콩섬을 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생겼다. 센트럴에 가까워질수록 건물이 화려해지기 때문에 주로 그쪽에만 집중했었는데, 이젠 그나마 소박한 왼쪽 지역(홍콩섬 동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우리 호텔이 저 뒤쪽에 있지." 따위의 대화를 D와 주고받았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낚시대도 있었다. 여기서도 고기가 잡히는 걸까? 그걸 먹어도 되는 걸까?







  첫 여행 때 시간을 보냈던 스타벅스도 낮이 되자 다시 보였다. 야자수가 있는 줄도 몰랐다. 남국의 분위기가 살포시 살아나며, 사진만으로는 이 앞에 백사장이 있다 해도 믿어질 것 같다.







  신기루처럼 머리 위로 불쑥 튀어 오른 고층 빌딩을 보는 것도 이젠 익숙하다. 낮은 세상에 속하는 홍콩은 상상하기 힘들다. 분명 더욱 북쪽으로, 관광객들이 거의 찾지 않는 지역까지 올라가면 그런 판단도 보류되며 수정될 여지를 보이겠지. 그러기 위해 한 번 더 가야 하나 싶다. 왜 자꾸 홍콩의 이미지를 갱신하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다른 좋은 도시도 많은데, 왜? 하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외치고 싶어서 쓸데없이 길었던 지난 두 여행기가 만들어진 거겠지.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침사추이 프롬나드라 부른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어떤 거리의 정확한 이름, 아니 정확한 걸 넘어서서 시민들이 그곳을 주로 뭐라고 일컫는지가 나에겐 중요하다. (거의 알아내지 못한다는 게 또 묘미다.) 그게 정확성에 대한 강박인지 여행지에서 걸은 소중한 거리에 대한 경의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예를 들어 종로 1가, 2가, 3가를 정확히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진 못한다. 언제든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과 그러지 못하는 곳의 차이다.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머릿속으로만 되살려야 하는 침사추이 프롬나드이기에, 그곳의 정확한 이름표를 기억 위에 붙여두고 싶다. 조금이라도 풍화되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 말이다.







  거의 같은 장소에서 무려 네 장의 사진이나 찍은 걸 보니 스타의 거리보단 스타의 거리로 들어가는 초입이 더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유달리 많이 찍힌 하늘도 당시의 내가 꽤 여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크레인은 당장 쏘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로켓을 닮았다. 또는 하늘 어딘가에 흥미로운 광경이 있어 같은 방향으로 목을 쭉 뺀 몇 마리 동물을 연상케도 한다. 나중에 다시 가면 저 자리에 커다란 빌딩이 들어서 있겠지.







  형님 별일 없으십니까.







  하늘은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고, 구름은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바람은 시원해졌으며, 그다지 더위를 느끼지 못하던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한다. D와 나는 여기 스타의 거리를 이번 여정의 유일한 명소 방문지로 선택한 결정을 놓고 서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친구들. 우정은 얼마나 예쁘게, 잘 찍어주느냐에 따라 더 깊어지기도 어긋나기도 할까? 한 명씩 번갈아 찍다가 단체 사진 찍을 타이밍이 오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그런 이들을 보면 기꺼이 다가가 한 장 찍어주고 싶다.







  요트도 제법 보인다. 아름다운 해안가가 쫙 펼쳐진 풍경은 아니지만, 그런 이상적인 환경을 대신하여 온갖 마천루가 다 들어서 있으니 바다를 달릴 맛이 날 것 같다. 요트를 타고 바다를 달리면 어떤 느낌일까. 자유! 해방감! 가장 세속적인 물건을 타고 세속에서 벗어나는 아이러니한 경이로움!







  그리고 스타의 거리 거의 끝에서 여유 있게 독서하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소설 『쇼퍼홀릭』으로 유명한 소피 킨셀라의 작품이었다. 그녀는 칙릿이라는 장르와 매우 잘 어울렸다. 그런데 그녀의 왼쪽에 합석한 모녀에게도 눈이 간다. 세 사람은 완전히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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