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 누가 배웅을 나온 건 처음이었다. 공항철도 개찰구에서 친구 Y가 전날 과음으로 인한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나는 그도 우리와 함께 떠나는 줄로만 알았다. 나와 나의 동행자 D는 친구의 등장에 감격한 나머지 진심으로 같이 떠나자고, 비행기 삯은 우리가 댈 테니까 당장 출국 준비를 하라고 부추겼다. 좀 더 강하고 달콤하게 밀어 붙였다면 거의(?) 설득할 수도 있었겠지만, 신혼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부인의 존재감을 넘어설 순 없었다. (아니, 넘어설 수 있었다고 해도 Y에겐 일단 여권부터 없었다.) 꼭 오지 않아도 될 배웅길을 한 시간 반 씩이나 걸려 와준 그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공항 내 바에서 파는 모히또와 퀘사디아를 대접했다. 남국의 정취가 그대로 담긴 대나뭇살 의자..
서울에 봄이 오고 있다. 강변에 잠들었던 가지에선 아주 천천히 하품을 하는 사람처럼 꽃이 핀다. 이 도시는 이제 한해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시민들을 매혹할 것이다. 사람들은 한결 가벼워진 외투를 입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강으로, 산으로, 공원으로 나아갈 것이다. 기상 캐스터는 스크린에 펼쳐질 봄꽃에 지지 않으려고 밝은 원색의 옷을 입을 것이고, 그 어떤 정치적 쟁점이나 끔찍한 사고 소식보다도 중요하다는 듯 벚꽃의 개화 시기를 점칠 것이다. 이 도시의 봄이 아름답다는 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점점 짧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 봄은 더 강렬하다. 그 봄을 만나지 못하고 나는 이제 우기가 시작되는 도시로 떠난다. 한낮의 기온은 이십 도나 더 높고, 습기에 묶여 열기가 빠지지 않는 도시로 이동한다. 그곳..
맥주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아침부터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가기로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렴한 비용으로 맛있는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이점도 지금 이 순간에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던 붉은 벽돌 건물은 내가 삿포로에 와서 봤던 모든 곳 중 가장 ‘관광지’답긴 했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전 일정 중 가장 공허한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을 피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 불명예의 자리엔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가 올랐다.) 유명한 맥주 박물관이라고 해서 주변 주택가와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공원 내에도 돌아다니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었다. 중심지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데 벌써 시 외곽에 닿은 듯했다..
책을 읽으면 그것의 제목과 저자, 그리고 다 읽은 날짜를 적어두곤 한다. 한해의 마지막 즈음에 목록을 훑어보면 그해 내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한눈에 들어오고, 그 책을 읽던 시기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떠오른다. 책으로 기억을 환기하는 일은 즐겁다. 몇 개월 동안 한 작가의 책만 줄창 읽었던 시기는 당시 내가 어떤 골칫거리를 안고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작가들은 나를 철저하게 벽으로 밀어붙였고, 나는 정신에 세게 몇 대 얻어맞으면서도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다. 주제 사라마구, 알랭 드 보통, 버트런드 러셀과 조지 오웰, 프란츠 카프카,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김연수,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와 밀란 쿤데라. 물론 여기에 다 적지 못한 다른 작가와 시인, 여행가들도 모두. 그..
나는 롯데리아에 앉아 반숙 계란 버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에 마신 술 때문에 늦잠을 잤고, 덕분에 아침도 먹지 못했다. 세상은 심심한 모양인지 때때로 빙글빙글 돌았다. 해도 거의 중천에 떠 있었지만, 내 눈엔 새벽이 막 지난 것처럼 거리가 푸른빛으로 코팅돼 있었다. 여행 첫날의 숙취가 떠올랐다. 도대체 인간이란 학습할 줄 모르는 동물인가 보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좀 자다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건 나 자신도 웃을 수 없는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숙취를 해소한답시고 햄버거를 먹는 버릇이 있다. 고기에 야채, 빵까지 다 들어있으니 몸에 좋지는 않을지언정 영양소 구색은 다 갖췄다고 믿어서다. 특히 햄버거엔 리코펜이 함유된 토마토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토마토가 없으면 최소한 토마토케첩이라도 들어..
생생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은 달콤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방을 복제하는 커다란 집에 모여 어울렸고, 매일 밤 새로운 손님을 맞아 포옹과 악수를 나눴다. 그곳에 들어가려는 희망자들이 입구에 장사진을 이뤘다. 그곳에는 꿈 밖에서 알던 사람, 꿈속에서 알던 사람들이 전부 있었다. 나는 생면부지이나 사실 생면부지가 아닌 이들을 차별 없이 대했다. 누군가는 방 하나를 꽉 채운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의미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표정도 가물가물하지만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끝없이 생성되는 방 안에 가득했다. 흥미진진해 죽겠는데 페이지가 한참 남아 든든한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술을 마셨다. 꿈에서 깰 시간이 되어도 이곳이 ..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 보면, 생각보다 찍을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는 한다. 멋진 풍경 사진은 그만한 장비를 갖추고 그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에게 양보하기로 한다. 나에게 남은 건 그냥 스쳐 가기 일쑤인 장면뿐이다. 스냅 사진의 가치는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의 그 장면과 그 사람을 포착할 행운은 그 순간에 있던 사람만 누릴 수 있으니까. 게다가 스냅 사진을 즐겨 찍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다른 시선이 있기 마련이고, 그 시선이 한 장의 사진에 특색을 부여하여 완성한다. 이때, 사진은 만들어가는 무엇이 아니다. 주어지는 무엇이다. 여행 중에는 깊든 얕든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때로 그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새에 렌즈 앞에 나타나 웃거나 손을 흔들거..
내겐 관람차를 탔던 기억이 없다. 한번은 올라봤을 법도 한데 너무 어렸을 때라 지워진 건지도 모른다. 그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시야가 점점 넓어지다 절정에 오르면 어떤 기분이 벅차오르는지 나는 모른다. 조심스레 지금에 와선 덤덤할 게 분명하리라 예측할 뿐이다. 이것이 한계라면 한계라 불러도 좋다. 감정을 움직이는 동력의 가짓수가 줄어드는 나이가 됐음은 분명하다. 굳은살처럼 덕지덕지 붙은 껍질은 마음의 바퀴를 뻑뻑하게 하고, 톱니가 맞물리지 않고 자꾸 엇나가게 한다. 책을 읽고 사진을 찍고 사람을 만나고 일에 열중해도 그걸 다 긁어낼 도리가 없다. 그러기엔 더께가 쌓이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때마다 대청소를 하듯 아예 떠나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관람차에 오르는 게..
달맞이 고개에서 내려와 이른 점심을 먹자고 친구가 우릴 데려간 곳은 동백섬 입구에 있는 더 베이 101이었다. 돼지 국밥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상태였고, 숙취 때문에 속이 안 좋기도 했지만, 그래도 맛있는 건 먹어야 한다며 우리의 위를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 온 부산이나 한 번도 동백섬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없다. 뭐, 그냥 그런가 보다 싶지만. 더 베이 101 주차장에서 본 마천루들. 저 높고 무거운 빌딩들이 저렇게 옹기종기 모여있는 걸 보면 압도될 수밖에 없다. 저대로 푹 꺼져버리진 않을까 걱정도 된다. 거의 초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도시 전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센텀 시티라든가 광안 대교 주변은 서울보다 훨씬 화려하다는 걸 느꼈다. 이국적인 느낌도 물씬. 더 베이 101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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