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묵은 호텔은 다누키코지 6쵸메에 위치한 도미 인 삿포로 아넥스(Dormy Inn Sapporo Annex)였다. 해산물이 포함된 뷔페식 아침 식사에 대중탕까지 딸려있는 곳인데 가격은 부담 없이 저렴했다. 십 층에 있는 싱글룸은 예상했던 대로 작았지만, 냉난방 시설도 완벽했고 공기 청정기 또한 갖춰져 있었다. 게다가 건물 안에서 입기 좋은 실내복을 제공하고 로비엔 공용 제빙기까지 있으니 숙박비를 낸 건 내 쪽인데 오히려 내가 고마워지는 역설이 일어났다. 이런 곳에서 한 달만 딱 살아보는 건 어떨까. 평소 욕탕이나 사우나를 좋아하진 않지만, 매일 들어가 줄 수도 있는데. 책상에 만년필과 공책을 배치하고 그 공백을 매일 같이 채워나갈 수 있을 텐데. 마침 장기 투숙자를 위한 가격 안내표가 붙어 있었다. ..
삿포로 역부터 내가 묵을 호텔에서 가까운 스스키노 역까지는 지하철 난보쿠선(南北線)으로 두 정거장이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이제 막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면 택시나 지하철로 숙소까지 이동하는 게 상식이겠다. 나 역시 비행기를 탈 때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혼잡한 대기실로 내려와 출구를 찾아 헤매다 북쪽 입구 앞에 섰을 때, 유리문 밖으로 새카만 하늘과 어둑어둑하게 꺼져가는 빌딩의 불빛을 보았을 때, 생각이 달라졌다. 저 어둠 속으로 당장 사라지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걸어서 이 도시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지하철 두 정거장 정도는 걸어가도 된다는 것 역시 여행자의 상식 중 하나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나가려니까 너무 추운 것이다. 그래서 삿포로 역부터 스스키노 역을 잇..
2012년 홍콩 여행기, '홍콩의 아침을 본 적이 없다'는 끝났지만,오랜만에 사진을 들춰보다 보니 여행기에 다 붙이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그래서 모아 보았다.(2013년 여행기는 언제 다 쓰누...) 비행은 언제나 사람을 두근거리게 만든다.다시 타고 싶은 타이 항공의 실내. 첵랍콕 공항 짐 찾는 곳에서 본 한 여인.이제 인간은 노트북을 들고 세계 어느 장소에서든 '일'을 하게 됐다.심지어 그건 즐거움이기까지 하다. 첫 날 침사추이 스타의 거리에서 찍은 사진.여긴 아직 사진을 찍어 파는 사진사가 있었다.예전엔 서울에서도 공원이나 유원지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이젠 여의도 공원에서 벚꽃 축제를 할 때나 이분들과의 재회가 가능하다. 인구 밀도 치명적으로 높은 곳, 몽콕.자동차 밀도도 치명적으로 높다.그러나 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만난 구안은 스패니쉬계 미국인이다. 그는 나를, 아니 내 여행용 가방을 보자마자 "그거 지갑이야? 너 게이냐?"고 물었다. 너의 성향은 존중하지만 열 시간 넘게 옆에 타고 가기엔 좀 그렇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덩치도 큰 게 가리는 것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친절하게 이건 지갑이 아니라 여행용으로 간편하게 들고 다니는 가방이라고, 나는 게이가 아니니 걱정 말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정말 한숨을 돌렸는지(?) 그 때부터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구안은 미군이다. 독일에서의 복무를 마치고 3년 간 한국으로 발령이 났다고 한다. 한국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물으니까 이번이 처음이라고, 사실 한국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다고 털어놓았다. 동양의 작고 생소한 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난생 처음 항공사 라운지를 이용해 봤다.내가 비즈니스 석에 앉는다거나 엄청난 마일리지를 쌓아 회원 등급이 높아져서는 아니다.그냥 운이 좋았다. 이곳은 별세계 같았다.빠른 속도로 인터넷을 즐기거나 쇼파에 앉아 쉬는 건 물론 샤워도 할 수 있는 곳.맛있는 음식이 뷔페식으로 제공되고 술이나 음료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곳.마치 고급 호텔에 온 것만 같은데 그 모든 게 무료인 곳. 여행이나 출장을 이런 곳에서 시작하고 이런 곳에서 쉼표를 찍으며 이런 곳에서 마무리할 수 있다면어떤 기분일까?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여행은 피로하다는 것이다.장시간의 비행, 시차 적응, 이국에서 느끼는 긴장감.그 모든 게 사람을 지치게 만듦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런 곳이 존재할 거라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멋진 라..
산 피에트로 광장은 긴 회랑으로 둘러쌓여 있다. 광장 어디에 서면 회랑의 여러 기둥이 하나로 겹쳐보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땡볕에 잠깐 서서 차례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기둥이 겹쳐보이는 신기한 자리보다 나에게 필요했던 건 더위를 피할 목 좋은 장소였다. 그래서 회랑 안으로 들어간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회랑 기둥의 주춧돌에 둘러앉아 더위를 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과연, 이곳은 태양에 노출되지 않고 종종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식히며 산 피에트로 광장의 모습을 지켜보기 좋은 곳이다. 몇 시간이고 앉아 식수대에서 뜬 물을 나눠 마시면서 이탈리아의 여름을 이겨내기. 이상하게 차분해지는 경건한 분위기는 덤. @Vatican City canon A-1 + 50mm superia 200
:: D가 날 깨웠을 땐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나흘 내내, 결국 홍콩의 아침을 본 적이 없다. 잠들기 전, 오전에 짬을 내서 어딜 다녀오자고 계획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고, 이제 와선 시간도 없었다. 출국 시각까진 그럭저럭 여유가 있었지만 지체하진 않기로 했다. 대충 씻고 모자를 눌러쓴 후 짐부터 정리했다. 며칠 동안 신세를 졌던 호텔방엔 누군가 장기 체류를 하다가 막 떠난 현장처럼 질서와 어지러움이 공존했다. 수건은 매일 새로 (카트에서 우리 마음대로) 가져왔지만 룸 메이킹은 한 번도 받질 않았다. 방을 청소하는 시간 전에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 사실 침대 시트 네 귀퉁이를 반듯하게 펴는 것 말곤 정리할 거리 자체가 없는 방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 침대마저도 반은 캐리어..
8월 중순의 로마는 덥다.고대의 시멘트는 햇살 아래서 창백한 베이지색으로 빛나 눈이 부시고현대의 아스팔트 위를 지날 땐 숨을 쉬기가 힘들다.그러니 식수대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안 그래도 비싼 물값, 바티칸 시국 주변에선 놀라울 정도까지 올라가니까. 아마 수백 년 전에도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아이들이 똑같이 물을 받아 똑같은 소리를 내며 머리에 끼얹었을 것이다.역사책에도 한 번쯤 언급됐을 배수로에 여전히 깨끗한 물이 흐른다니.로마를 걸을 땐 시계를 잘 봐야 한다.여름 날엔 특히 현실감을 잃기 좋은 도시니까. 그런데 이 더운 날에 이럴 수 있는 건 무슨 재주일까? @Roma, Italy canon A-1 + 50mmsuperia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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