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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놀룰루 칼라카우아 거리에서 녹색 대문 하나를 봤다. 크고 투박한 글씨체로 '인터내셔널 마켓 플레이스'라 쓰여있는 간판 밑에 서자 이 골목 안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빽빽하게 들어선 노점상으로 미루어 보아 토산품을 파는 재래시장 같긴 한데, 누가 재래시장에 인터내셔널이란 수식어를 붙인단 말인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같은 근거 없는 명제를 추출해낸 사고방식이 여기에도 적용됐단 말인가?




  야시장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좁은 골목, 그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사위가 잠잠해졌다. 시장 입구는 파는 사람, 사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이 한 데 모여 혼잡스럽기까지 했는데, 여기엔 돌아다니는 행인조차 거의 없었다. 조명도 어두침침해서 건물과 골목 사이엔 회색 여백이 팽배했고 화려한 색상의 무무만 진열장에 떼로 몰려 오지 않을 주인을 기다렸다.

  장신구와 알로하 셔츠, 원주민 목상木像 같은 토산품 천지에서 유일하게 인터내셔널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곳은 푸드코트였다. 이곳엔 중국, 베트남, 터키, 한국까지 각국의 음식을 재해석한(양을, 특히 고기의 양을 늘리는) 메뉴가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가격도 저렴해서 가볍게 한 끼를 해결하기 좋은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저녁엔 식사보다 홀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았다. 푸드코트에선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들의 훌라 공연이 한창이었다. 무대 바로 앞 의자들은 R, 그 뒤편으로 음식을 먹으며 공연을 볼 수 있는 테이블은 S, 나머지 입석 자리는 A석 정도랄까. 무희는 몸짓으로 관능적인 신호를 송신하고, 관객은 안테나를 무대 앞까지 길게 뽑은 채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훌라 공연이 끝나자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원주민이 마이크를 들었다. 그는 R석이 거의 꽉 찬 호황에 신이 났는지 몇 가지 농담을 던지다가 레퍼토리 하나를 꺼냈다.

  “오늘 어떤 분들이 모이셨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캐나다에서 오신 분 계신가요?”

  앞줄의 몇 명이 손을 들었다. 가족 여행을 온 모양이었다.

  “워싱턴 D.C.는요?”

  또 몇 명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본토 다른 지역에서 온 한 남자가 자기에게도 물어봐 달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쪽은 어디서 오셨는데요?”

  “캘리포니아요!”

  “캐앨리포오니아! 캘리포니아에서 오신 분들!”

  꽤 많은 사람이 환호하며 손을 들더니 저들끼리 웃어 젖혔다. 나는 본능적으로 오렌지를 떠올렸고, 사회자는 고조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일본에서 오신 분들도 계신가요?”

  얌전한 손들이 인파 속에서 수줍게 올라갔다. 참 얌전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한국 사람들은요!”

  나도 손을 들고 말았다. 혼자는 아니었다. 별안간 출석 체크를 통해 동향 사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이 상황이 아주 즐거워졌다.

  사회자는 몇 군데를 더 부르다가 계속 시끌벅적하게 구는 한 일행에게 아예 마이크를 넘겼다. 이것도 레퍼토리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하와이에 처음 오셨어요?”

  “아니, 두 번째라우.” 몸집이 크고 나이가 지긋한 부인이 대답했다.

  “여기 또 올 만큼 정말 좋죠? 언제 오셨었나요?”

  “결혼했을 때 오고, 이번이 처음이유.”

  “결혼한 지 얼마나 되셨는데요?”

  “오십 년 전이유.” 부인은 생각보다 긴 시간을 불렀다. “신혼여행으로 왔었는데 금혼식 기념으로 다시 온 거지.”

  “이야, 옆에 계신 분이 남편분이세요?” 그러자 부인과 일행들이 크게 웃었다.

  “아니, 여기 없수. 이 양반 어디 갔는지도 모르겠어.”

  이번엔 모두가 웃었다.

  노부부가 나란히 인사를 하는 흐뭇한 광경은 없었지만, 나는 모두가 즐거워한 그분의 대답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내 나이보다 어렸을지 모를 두 부부가 육십 년대 초반에 발을 디딘 하와이는 어떤 곳이었을까. 얼마나 아름다운 여행이었기에 결혼 오십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일까. 그들이 함께 보낸 세월이 어땠을진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만큼은 정말 낭만적이었다. 오늘 이 섬에 도착한 수많은 신혼부부도 지금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후, 다시 하와이행 비행기 표를 끊을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행운아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수십 시간 전의 비행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11월의 쌀쌀한 밤, 하와이 행 비행기의 승객 팔십 퍼센트는 신혼부부였다. 공기는 춥고 건조했으며, 어디선가 호흡기 질환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두터운 메이크업과 머리를 빳빳하게 고정한 스타일링 제품이 무겁게 느껴질 시간이었다. 불편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화장실에 한 번 들어갈 때마다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바뀌어 나왔다. 경우에 따라선 서로의 무방비 상태를 처음 본 사이도 있을 텐데 그나마 하늘 위에서 깨지는 환상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기내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끊임없이 콜록거리는 내가 곤히 잠든 이들을 방해할까 두려웠지만, 옆 좌석에 앉은 커플은 이륙과 동시에 잠이 들어 착륙할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화장을 하고, 식장으로 이동하고, 하객과 인사를 하고, 예식을 치르고, 다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대충 식사를 때우고,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고, 출국 수속을 밟고, 면세점에서 쇼핑을 하고, 결국 탑승 방송에 이끌려 비행기에 오른, 하루 만에 너무 많은 감정을 느끼고 너무 많은 일을 한 오늘의 주인공들에게 비행을 즐길 느긋한 여유는 없어 보였다. 그들의 피로가 나머지 이십 퍼센트의 어깨도 함께 내리눌렀다.

  그러다 해가 뜨자 민낯들이 부지런히 기내를 돌아다녔다. 벌써 능숙한 솜씨로 화장을 고치는 손들도 보였다. 모든 비행기는 희망을 싣고 날아가겠지만 지금 이 비행기보다 과열된 노선도 없을 것 같았다. 문득 하와이처럼 허니문 여행지로 이름난 곳을 선택한 이유에 의심이 들었다. 왜 신혼부부들은 신혼부부가 가득한 하와이로 떠날까? 자신들과 같은 입장에 있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특별한 관계가 되는 건 어떨까? 예를 들어 오르세 미술관의 신혼부부, 사하라 사막의 신혼부부, 안나푸르나의 신혼부부처럼 말이다. 온통 똑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 그들에겐 지나치게 많은 비교 대상이 생기는 법이다. 어디서 결혼을 했고 어느 여행사로 왔으며 누구의 옷과 가방을 걸치고 어떤 호텔에서 묵는지, 궁극적으로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연인일지 견주게 될 상황을 누가 자신 있게 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오십 년 전 기억을 되살려 하와이로 돌아온 부부의 이야기를 듣자 신혼여행이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까지 아로새겨질 수 있는지 조금은 알게 된 기분이었다. 나와 함께 하와이로 떠났던 수많은 부부 중에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가져온 행운아가 있을 것이다. 아니, 허황된 이야기라 해도 새 가정을 꾸릴 그들 모두에게는 그런 행운이 있어야만 했다. 가끔 어긋난 관계를 되돌리거나 차가운 현실에 맞서야 할 때, 운 좋게 선물 받은 추억이 힘이 돼 주길 바라는 게 지나친 욕심은 아닐 것이다. 


 

  인터내셔널 마켓 플레이스의 공연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자리를 뜨면 다른 누군가가 빈자리를 채웠다. 지나친 기대나 실망을 할 이유도, 다른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여기엔 개개인이 모여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하나의 의지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너와 나의 이 순간을 찬란한 기억으로 세공하려는, 섬의 의지가 말이다.



canon A-1 + 24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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