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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갈 때마다 노트를 쓴다. 일정에 따라 얇은 공책 반 권이 되기도 하고, 한 권을 다 쓰고도 모자라 중간중간 여백을 찾아다녀야 하기도 한다. 보통 공항철도에서부터 쓰기 시작해 귀국편 비행기 안에서 마무리를 짓는데, 한 번도 정의 내려 본 적은 없지만 내심 여행의 시작과 끝이라고 생각하던 지점과 대체로 일치하지 않을까 한다. 여행을 떠난다는 실감이 날 때 그 기분을 노트의 첫 문장으로 옮긴다. 현실에 착륙하기 직전엔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며 안전 벨트를 조인다. 펄럭펄럭 페이지를 오가면서 여행을 펼치고 덮는다.

 가방을 열어보자.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거나 안전을 도모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제외하면 여행자에게 남는 필수품은 카메라가 될 것이다. 사진은 수많은 풍경과 상황, 사람에게 받은 인상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 장의 이미지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행 중 정서를 되살려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셔터와 조리개로 빚어낸 화상을 보고 있으면 당시에 들었던 소리, 당시에 맡았던 냄새, 당시에 살갗에 닿았던 햇살이나 바람의 온도가 아른아른 떠오른다. 기억의 선반에 미처 올리지 못한 부분이 있어도 괜찮다. 상상은 그 자리를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채우고도 남는다.


 그런데 나에겐 펜과 노트도 사진기 못지않은 필수품이다. 당시의 여정, 주워들은 정보, 그곳에서 느꼈던 감상을 세세하게 기록하는 게 좋다. 물론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던 하루를 정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처음엔 실시간으로, 하루 만에 그날 밤에 몰아서, 며칠 지나지 않아 하루 전 일들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머리맡의 전등을 끌 수는 없다. 가끔은 쓰다가 노트를 안고 잠이 들기도 한다. 지진계의 바늘처럼 버스나 열차의 진동을 획으로 옮기며 쓸 땐 그나마 양반인 셈이다. 이러다 보니 안 그래도 악필인 내가 제대로 된 필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예쁘고 꼼꼼하다기보단 흉하고 성글다. 장점이 있다면 다른 사람은 나의 노트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것 정도랄까.
 그러나 어떻게 써도 내 글씨를 읽을 수 있는 나는 노트의 덕을 톡톡히 본다. 노트에 담긴 건 여행지의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때의 기대와 기분과 체력에 따라 멋대로 왜곡한 허구의 현장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감정과 묘사를 역추적해 들어가면 당시의 심정이 드러난다. 절로 웃음이 난다. “이 좋은 곳에서 이런 잡생각을 했어? 하긴 기분이 참 더럽긴 했지.”라든가, “사진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신이 난 거야?” 따위의 독후감 때문이다. 일기 같긴 한데 집에서 쓴 글보단 스펙타클하고 흥미롭다. 덤으로 비일상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나의 버릇과 취향, 심지어 본성의 일부까지 발견한다. 한 권의 노트엔 여행 중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모두 쓰여있다. 그래서 난 펜과 노트를 챙기는 걸 잊지 않는다.

 여행 노트는 의식하지 못했거나 솔직하지 못해서 모르고 살던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지도다. 그것도 개발새발 그려진 해독하기 어려운 지도다. 그리고 여기서 뭔가를 캐내 더 그럴싸한 이야기로 만들어 보고 싶어지는 보물지도이기도 하다.




canon A-1 + 24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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