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하와이 여행기라면, 최소한 하와이 가이드북이 소개하는 몇 군데 정도는 언급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눈으로 직접 보고 왔다는 사실 증명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두 시간 동안 오하우의 명소 세 군데를 돌아보고 남은 건 메모 열 줄과 사진 몇 장뿐이었다. 그럼에도 물 먹인 소처럼 부풀려 스케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나 자신에게 그곳들을 잊지 말라고 환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특별한 의미나 감상을 끄집어내긴 어렵지만 가끔 남국의 정서를 되살리고 싶을 때 꺼내보기 좋은 기억으로서 말이다.




 햇살은 아침나절부터 강렬했다. 가이드는 일정이 제대로 시작되기 전에 마음이라도 가다듬으라는 듯, 해안 도로에서 툭 튀어나온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바다를 감상할 시간을 줬다. 선글라스를 준비한 사람들은 의기양양하게 차단막을 내리며 마름모꼴 빛이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지평선 위로 전선을 형성한 적운은 파도처럼 섬으로 몰려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들은 진군하지 않았으며, 그저 바다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초여름을 연상케 하는 풍경의 일부가 되는 데 만족했다.
 디지털카메라, 비디오카메라, 휴대전화가 총동원 되어 현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과연 뭘 찍어야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가 궁금해졌다. 역광을 받은 그들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인상적인 피사체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나 역시 카메라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관성적으로 사진을 찍는 버릇과 싸워야 했다. 잠은 덜 깼고, 아침 식사는 아직도 뱃속에서 출렁거렸으며, 태양은 지나치게 조급했다. 뭘 보고 뭘 느껴야 할지 모를 때, 촬영은 가장 그럴싸한 임무로 보인다. 우리의 뇌에 보조기억장치가 달리기 전까진 카메라는 여행의 대리인이란 위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섬 남동부의 첫 번째 어트랙션인 할로나 블로홀로 이동했다. “오늘처럼 바람이 강한 날이면 그만큼 파도가 높아져 블로홀의 분출이 장관을 이룬다.”고 가이드는 설명했지만, 오늘은 바위 고래가 피곤한 날인 모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내심을 발휘하여 물줄기가 솟아오르는 장면을 찍으려고 기다렸으나 녀석은 얕은 숨만 쉬며 비싸게 굴었다.
 신전에서 가져온 듯한 조형물과 검은 바위 구멍 사이로 뛰어오르는 물줄기보다 인상적인 건 오히려 바람이었다. 바람은 힘차고 집요하게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귀가 멍할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강풍이 부는 현무암 언덕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자 어쩐지 낯익은 풍경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7500킬로미터 밖에 있는 고국의 섬에서 이와 흡사한 장면을 본 것 같았다. 여기도 돌이나 여자가 많은진 모르겠지만 최소한 바람이 많다는 유사점 때문에 제주도가 떠올랐고, 자연스레 그 섬에 묶인 기억 하나가 되살아난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매년 두 번씩 방학마다 제주도에 갔었다. 제주도에 얽힌 집안의 과거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 지금까지 망령처럼 살아있지만, 섬 자체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많은 방학 중 모든 친척 가족과 함께 휴가를 떠나 승합차를 타고 관광을 하던 날이었다.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제자리에서 뛰면 뒤로 밀려나 착지할 정도였고(최소한 그랬다고 기억한다), 정면으로 맞으면 숨쉬기가 곤란해질 지경이었다. 나와 친척 동생들은 잔뜩 신이 나서 새끼 원숭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우리에겐 자연의 힘에 맞선다는 모험심이 가득했었다. 아름답다기보단 황량했던 제주도의 외곽 도로는 들어가진 못해도 엿볼 수는 있는 경이로운 세상의 입구로 보였다.
 기억에 비하면 현실은 기복 없는 단편 영화 같았다. 지금의 내가 뒤로 밀려날 정도로 세찬 바람이라면 나무가 뽑히고 간판이 날아다니는 등 섬 전체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장소가 불러일으켜야 마땅한 기쁨과 놀라움과 흥분이 부재한 상태에서, 그런 감정을 과거에서 끌어와 현재에 투영하는 건 해 볼 만한 일이었다. 그럼으로써 섬은 나만 볼 수 있는 풍경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나와 내 옆의 신혼부부, 그리고 아홉 살짜리 누나와 일곱 살짜리 동생 남매가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파도가 거칠고 높아 실력 좋은 서퍼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샌디 비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어릴 적에 서핑을 즐겼다고 해서 더욱 유명하다고 한다. 우리는 한 나라(그것도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질을 떠올릴 때 직관적으로 카리스마와 통찰력, ‘경제를 살리는 능력같은 미덕을 꼽곤 한다. 대체로 운동 신경이 뛰어나거나 단단한 상박 근육과는 거리가 먼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의 대통령이 이렇게 거친 파도 위에서 서핑을 했었다니 타블로이드 신문의 기획 기삿거리로 어울리는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근육질의 철학도, 망치질하는 경영학도처럼 지적 매력과 성적 매력을 고루 갖춘 소수 인간 종의 거부할 수 없는 땀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오늘의 샌디 비치엔 미래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를 서퍼가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관광객들만 해변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서성일 뿐이었다. 난 오히려 하와이가 이 나라의 오십 번째 주가 되기 전 파고를 헤치고 그물을 던지러 나가던 원주민을 그린 그림이 공중 화장실벽을 채우고 있다는 처량함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풍기는 야생적인 힘은 물이 제대로 내려가지 않는 변기를 붙잡고 있는 현대인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한때 수많은 어종에 위협이 되었던 인간의 야생성은 누런 벽화와 함께 박제되고 말았다. 하긴 지금 우리에겐 대양을 향해 놓여있는 벤치에 앉아 치열한 세상이 남긴 피로를 푸는 휴식이 더 시급하겠지만 말이다.





canon A-1 + 24mm
iPhone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