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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전에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일어나 방갈로에서 제공하는 네스카페 믹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차례대로 샤워를 한 후 차례대로 짐을 꾸렸다. 이제 내 45리터짜리 배낭에 짐을 쑤셔넣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무언갈 버리지도 않았는데 배낭은 점점 홀쭉해지고 있었다. 나중에 가서야 그 무언갈 잃어버렸음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기념적인 날이다. 우리의 여행이 이십 일째를 맞았고, 일주일만에 방비엥을 떠나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안으로 향한다. 우린 일부러 버스 시간도 느즈막히 잡았다. 짐을 다 싸고도 시간이 남아 어제 사둔 컵라면을 아침 겸 점심으로 먹었다. 그리고는 커피와 와이파이를 할 수 있는 오두막에 앉아 한 시간을 정오의 햇살과 불어오지 않는 바람을 기대하며 보냈다. 여전히 사람은 사람에게 물을 쏟아붓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속옷도 입지 않고 수영복 바지만 입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 버스를 타서 비엔티안까지 갈 생각을 그저 함부로 다리만 들지 않으면 무방할 것 같은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버스에 오를 때까지 난 한 방울의 물도 맞지 않았다. 만반의 준비를 갖췄는데 말이다.
워낙 유명해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하는 K-Mart에서 이십 분이나 늦은 픽업 밴을 기다렸다. 사람이 꽉 차서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다시 거기서 태국 우돈타니부터 올라온 버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번엔 삼십 분이 늦었다. 버스 터미널에서 비엔티안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는 시카고 출신의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Laos bus is always COMING SOON!"이라고 농담을 했다. 포마드로 머리를 멋지게 뒤로 넘기고 동양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였다. 내가 그에게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말을 좀 더 크게 해주면 좋겠다는 것뿐이었다.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시카고 출신이라니! 나는 그의 고향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 도시에 가고 싶어졌다.
루앙 프라방에서 방비엥으로 내려오는 버스보다는 훨씬 거리가 짧고 길도 평탄했다. 하지만 긴 시간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버티려면 뭔가를 해야 한다. D는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곤히 잠들었다. 그가 부러웠다. 에어컨은 세게 나오지만 바깥 공기가 워낙 뜨거워 실내를 차갑게 식히는 덴 한참이 걸렸다. 글을 좀 썼다. 한 묶음의 글이 끝나자 지겨워졌다. 그래서 책을 꺼내들어 끝까지 읽어 버렸다. '길 위에서'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4부가 나를 들뜨게 했다. 그들은 처음으로 미국을 벗어나 멕시코로 향한다. 거기서 그들은 이질적인 세상을 만나고 그들이 등 지고 떠나온 부유하고 문명화된 미국을 조롱한다. 원시적이고 태곳적 모습으로 살아가는 멕시코 인들과 인디언들을 묘사하는 과정에 나는 흠뻑 빠졌다. 내가 라오스에서 보고 느끼길 원했던 감정이 이미 그곳에 다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나는 불만에 차올랐지만, 그건 나 자신을 향한 것이니 여기에 적지 않아도 무방하다. 분명 50년 대에 그들이 마주했을 멕시코와 21세기 초반의 라오스를 비교하는 건 넌센스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없는 것인지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루앙 프라방, 방비엥, 비엔티엔과 같은 널리 알려지고 전세계에서 찾아오는 도시만 다니는 우리 일정 자체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문득 라오스가 서구의 방식대로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음악과 술, 파티와 낭비라는 요소에 물드는 속도가 너무 빠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떠나온 방비엥은 특히 그랬다. 여행자들도 신났지만, 실로 기쁨과 도취에 차 있었던 것은 현지 라오인들이었다. 젊은이들은 밤새도록 음악을 쿵쾅거리며 옷을 벗고 춤을 추었고, 때로는 강변에 차를 몰고 가 모두 곤히 잠든 이른 새벽을 우퍼로 두들기기도 했다. 대체로 술과 파티, 여자와 남자의 만남은 인간을 즐겁게 한다. 취하게 만든다. 게다가 거기에 초대받지 못하거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부러움을 느끼게도 한다. 그러니 이렇게 미국 마이애미 해변가부터 전염된 듯한 파티가 횡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걸 제삼자의 입장에서 안타깝게 여겨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본래의 모습을 잃은 사람에겐 묘한 향수와 측은함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문제일까 그들이 문제일까. 아니면 이 세상은 전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다가 이내 축제가 끝나고 모두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는 건 아닐까. 인간이 사라진 자리엔 거대한 쓰레기 더미 - 맥주병, 플라스틱 통, 비닐 봉지와 신문 쪼가리, 찢기다 만 콘돔 껍질과 담배 꽁초 - 만 남아 간밤의 파티를 증명할 것이다. 그러면 신이든 외계의 존재이든 누군가가 그 광경을 들여다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겠지.
또 다시 버스의 우울의 찾아왔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지금 이곳은 아주 좋다. 이곳에도 문명은 있고, 문화가 있다. 문명과 문화는 달콤한 전염병이다. 우리는 그 지병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어떻게 인간 답게 살아남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냥 그런 생각이 가끔 버스 창문에 들이받히는 물풍선처럼 나를 치고 지나갔다. 그것이 흐르는 풍경에서 나왔는지 막 다 읽은 소설책 속에서 나왔는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방비엥에서의 일주일은 확실히 여행 기록에 변화를 일으켰다. 나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다가 무엇을 느꼈는지 시시콜콜 기록하는 데 염증을 느낀다. 그 과정이 재미없어서라기보다는 그렇게 재현된 그 과정이 실제보다 재미가 없는 탓이다. 또, 내가 너무 아는 단어가 없어서 적절한 표현을 쓰지 못한다는 점도 괴롭다. 차라리 쓰다가 버려둔 글들을 되살리고 싶어졌고, 순간 순간 기록하고 싶었던 무언가를 제대로 기록하고 싶어졌다. 한 문단이라도 살려 두면 그걸 모아서 어떨 때는 이러다가 어떨 때는 또 저러는 내 변덕을 낱낱이 조회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읽고 있는 책의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 탓도 있긴하다. 종종 모두를 실망시키고 싶다는 충동을 겨우 참아내기도 한다...
버스는 조용하다. 뿌연 하늘엔 시뻘건 해가 다이아몬드 형태로 빛나며 추락하고 있다. 내가 있는 곳은 동양의 한 나라인데, 이 버스 안에는 대부분 서양에서 온 여행자 뿐이라는 사실도 갑자기 신기하게 여겨진다. 물론 도시를 잇는 VIP 버스는 본래 여행자를 위한 교통수단이니까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왜 그게 당연한 일이 되었을까?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의 선배들이 이 길을 달렸기 때문에 그들을 유혹하기 위해 에어컨이 달린 VIP 버스나 합승 미니밴이 나타난 게 아닌가. 최초에 그들은 왜 이 나라로 왔을까. 왜 이 길을 가야만 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들을 뒤따르고 있을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아, 이 답은 나오지 않고 매일 되풀이되기만 하는 같은 질문들. 육하원칙의 더러운 발자취들.
여행 초반에 여정이 길어지면 내가 어떻게 변할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쓰는 길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는 글을 썼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바로 이 말을 어제도 쓴 것 같은데?) 그 변화를 이제야 눈치챌 수 있는 것 같아 기쁘다. 결국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감상은 함께 뒤섞일 수밖에 없다. 아,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모래처럼 줄줄 흘러 떨어진다. 안녕, 지나간 그 순간들. 허망하게 빛 뒤로 사라진 모든 것들. 안녕, 만나지 못한 사람들, 기록되지 못한 역사들, 그리고 쓰여지지 못한 글들. 안녕, 영원히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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