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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 will be okay in the end. If it's not okay, it's not the end." - unknown.
Benoni 카페의 바 뒤에는 커다란 분필 글씨로 그렇게 써 있었다. 우리가 아직 괜찮지 않은 건,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건, 아직 우리의 여행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 정말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게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을 상상하는 건 슬픈 일이다.
비엔티안에서 하노이로 넘어가는 날에 우리가, 아니 특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카페에 앉아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던 것밖에 없다. 약 다섯 시간 반을 카페에 앉아 있었다. 쓰고 읽다가 지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해도 시간이 남았다. 좀이 쑤시다가도 이내 피곤해서 그냥 테이블에 엎드려 있고 싶기도 했다. 날은 라오스에 온 이후 가장 더웠다. 어제보다 햇살은 덜 따가울지 몰라도 체감 온도는 더 높았다. 아직 우리가 가지 못한 미지의 거리를 산책하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었다.
카페에 이렇게 오래 앉아있었던 이유는 물론 시간을 떼우기 위해서다. 체크아웃 시간은 정오인데 비행기는 오후 여덟 시에 뜬다. 두 시간 전에 공항에 가 체크인을 한다고 해도 여섯 시간이 비었기에 우리는 시원한 장소에만 있기로 결정한 것이다. 카페도 두 군데에 걸쳐 있었는데 benoni 카페에선 점심을 먹은 후 커피까지 마셨고, D가 두 시간짜리 마사지를 받는 동안 파리 바게트와 카페 베네의 이미테이션 같은(로고가 카페 베네의 로고와 아주 흡사했다. 심지어 포스에 뜨는 문자도 한글이었다.) 파리지앵 카페에서 나머지 시간을 나 혼자 보냈다. 커피 두 잔을 연달아 마시니 나중엔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아무리 내가 카페를 좋아해도 이렇게 한번에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 방콕을 떠나 치앙마이로 가던 날, 야간 열차 탑승 시각을 기다리며 시암 파라곤에 오랫동안 죽치고 있던 적은 있구나. 어쨌든 혼자 보내는 시간이 그렇게 많다 보니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됐는데, 그중 하나가 사진에 관한 것이었다.
루앙 프라방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셔터를 누르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심지어 방비엥에 처음 도착한 날 밤에도 사진을 별로 찍지 않았다. 규모는 더 작으나 술집과 레스토랑은 더 많다는 점만 다를 뿐, 루앙 프라방과 방비엥의 이미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이미지란 내가 사진을 찍게 만드는 모종의 힘을 일컫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라오스의 주요 도시는 전부 거기서 거기라 사진 찍을 맛이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프랑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고, 어딜가나 '비어 라오'의 노란 간판이 붙어있다. 자연도 그리 가까이 있지는 않다. 가까운 곳엔 전부 사람의 손길이 묻어있다. 그리고 이젠 지겹도록 본 여행자들. 실제로 같은 사람을 여러 번 마주치기도 했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그 행색이 다 그 행색이었다. 방비엥의 유명한 펍인 사쿠라 바에선 보드카 샷 두 잔을 마시면 나시티를 선물로 줬는데, 그 티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여기 비엔티엔(나중엔 하노이에서도 봤다.)에도 있었다. 이건 쓸 거리가 없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인상적이지 않으면 인상적이지 않다고 쓰면 그만이다. 그 이유를 분석하는 재미도 있다. 그러나 카메라를 들 일이 없다는 건 내가 환경에 너무 익숙해 졌거나 실제로 피사체로서의 가치가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삐 마이 기간 동안 카메라가 젖을까 무서워 거의 들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도 사진을 적게 찍은 이유 중 하나다. 허나 여행의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사진 찍는 게 아니던가. 가져 온 두 장의 메모리 카드가 부족할 줄 알았는데 여행이 거의 끝나가는 이 시점까지 하나도 채우지 못한 상황이 오고 말았다.
물론 익숙해짐은 내가 바라던 바다. 우리 동네를 매일 같이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지는 않듯, 루앙 프라방이나 방비엥처럼 한 곳에 체류하는 기간이 긴 도시에선 풍경에 금세 길들었다. 작품 사진을 찍으려는 게 아닌 이상 굳이 새로운 피사체를 찾아나설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루에 스무 장 밖에 찍지 않은 어떤 날은 그날 무엇을 했는지에 관한 기억 역시 희미하다. 이상한 일이다. 라오스에서 바로 그런 시간을 보내려고 왔건만, 막상 닥치고 나자 뭔가 잘못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D도 하루나 이틀은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글도 쓰지 말고 사진도 찍지 말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결국 그런 날을 보낸 적은 없다. 그나마 사진 찍기를 포기했을 뿐이다. 지금, 남은 저장 공간을 확인하면서 벌써부터 지나온 곳들이 그리워지며, 왜 더 많은 사진을 찍지 않았을까 후회스럽다.
그리하여 어제는 다시 사진 열정을 불태우자고 다짐했다. 남는 건 사진 뿐이라는 말엔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내게 사진은 단순히 '기념' 이상의 의미가 있다. 거시적인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미시적인 관찰로서의 행위. 낯선 세상(특히 그 속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이해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사진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을 많이 담아낼수록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화도 더 구체적으로 변한다. 어차피 표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안다. 그러나 창문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실내를 볼 수 없기 마련이다. 가끔은 커텐도 치지 않고 빗장도 걸려있지 않은 창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같은 종이지만 다른 문화에 물든 타자를 내 세계로 끌어올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부지런해져야 하는 이유다.
다짐을 한다고 해서 없는 실력에 당장 뭔가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직 베트남, 하노이라는 도시가 있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라오스를 떠난다는 아쉬움도 그 기대 앞에선 나를 괴롭히지 못했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했고, 끝이 보이더라도 벽에 충돌하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잭 케루악이 썼듯, "길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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