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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아주 사소한 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짐을 찾고 환전을 하는데 환전소 여자가 D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D가 한국이라고 대답하며 왜 궁금했냐고 되묻자 여자는 웃으면서 '호기심' 때문이라고 했다. 뒤에서 백 달러 짜리 지폐를 찾느라 끙끙대는 와중에 얼핏 그 단어를 들었다. 그리고 그 단어는 하노이 시내까지 나를 졸졸 따라와 씨앗이 되었다.
내가 여행 중에 풍경 사진보다 인물 사진을 많이 찍고 더 많은 사람과 만나보려고 애쓴 이유가 그렇게 단순한 동기에 있었다. 호기심. 다른 삶에 대한 궁금증. 일상이라는 같은 단어 아래있지만, 우리의 삶은 서로 다르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정치, 경제 체제가 다르다. 도시도 다르고, 그속의 교통 수단도 다르며, 음식과 술, 돈을 버는 방법이 다르다. 내가 그렇게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 왜 여행을 하느냐고 나에게 물으면 내가 대답할 적확한 단어는 오직 호기심 뿐이다. 집 떠나면 개고생인데 그럼에도 떠나는 이유는 도대체 저 산과 바다 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인 것이다.
무엇이든 짧게, 꼭 한 단어로 표현하려는 기조엔 반감이 있다. 뭔가 복잡한 것을 그렇게 단순화시키는 게 진리라면, 그 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 대화를 하고 그렇게 긴 글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에게 제시하여 어렴풋한 인상이라도 전해줄 수 있는 단어가 하나 있으면 든든하다는 점도 부정할 순 없다. 당신은 당연히 알고 싶고 보고 싶고 듣고 싶기 때문에 먼 길을 떠나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십여 일만에 사용 빈도수도 높은 그 단어를 발견한 것이다. 물론 이건 당신의 이유가 아니다. 나의 이유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을 거리들을 찾아 떠난다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긴 하다.)
그리하여 지나간 여행에서 만족스러웠던 부분과 그렇지 못했던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 만나는 게 좋아."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내가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던 것도 현지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의 삶과 동기와 생각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피곤해서 호기심이 발하지 않든 나나 내 동행자가 원하지 않아서 호기심을 채우지 못했든, 그럴 때마다 나는 불만족스러웠다. 그저 "무엇무엇을 하고 싶어서"와 '호기심' 간의 차이를 더 빨리 발견했다면, 이번 여행이 보다 풍부해졌을 텐데. 뒤늦게나마다 발견했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남은 여행, 다음에 떠날 여행에선 지금보다 친화적이고 효율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비싼 값을 치르고 택시를 타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주변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안도했다. 하노이의 밤 거리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들로 가득했다. 일제히 거리로 나와 작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 방콕보다 훨씬 많은 수의 오토바이들. 낡았지만 유럽 풍으로 아름다운 건물과 홍콩 거리를 보는 듯한 네온사인의 향연. 그리고 그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지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이쑤시개 같은 골목들. D는 적응이 안 된다고 했고,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사진을 찍었다. 많은 아시아인들이 길거리에 나와 뭘 먹기를 즐겨한다는 건 알지만, 도대체 베트남 사람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이곳이 여행자가 많이 모이고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구시가지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후끈한 공기 속에서 모든 것이 충돌해 폭발할 것만 같았다.
하노이 전체도 아니고 이 좁은 거리라도 샅샅이 뒤져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서 난 어떤 차이점과 공통점을 발견하게 될까. 첫인상이 끝까지 갈까. 이곳의 이미지를 내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을까. 반대로,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제 옆을 지나가는 나를 보며 여기 앉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유독 글에서 많은 의문문을 쓰는 것이 호기심 탓이라면, 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의문문을 쓰게 될까.
배가 고팠던 나와 D는 방에 가방을 던져두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길거리 쌀국수에 도전했고, 고수를 잘 못 먹는 나는 그걸 빼달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양껏 넣어준 아저씨 덕분에 고생했다. D도 국물에서 나는 냄새를 싫어했다. 삼만 동(1,500원 가량했다.)이라는 저렴한 가격이었음에도 매일 먹을 순 없을 것 같았다. 이게 입맛에 맞았다면 완벽히 천국에 온 셈이었겠지. 작은 의자에 앉아 초록 풀떼기를 떼어내고 면을 건져 먹으며 나는 다른 하노이 시민들이 노상 식사를 즐기는 이유를 가늠해 보았다. 싸고 정겹고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도 하고. 고수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나는 내가 얻어낸 단어 하나를 이곳에 끼워맞추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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