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하노이의 기온은 삼십 도 초반을 넘지 않았는데 비엔티안의 더위가 우리를 따라온 모양이다. 오늘은 삼십 도 중반에 습도도 높았다. 체감온도를 확인해 보니 무려 사십이 도. 습도는 64%다. 그냥 걷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우리만 유난을 떠는 건 아닌 모양인지 여행자들은 물론 베트남 사람들도 아주 지쳐보였다. 딱히 인사할 거리가 없을 때, 그들은 오늘 너무 덥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하긴 열 번 반복해도 지나치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살인적인 날씨이긴 했으니까. (체감 상으론 이번 여행 중 가장 더운 날이었다.)
그리하여 이 끔찍했던 날의 기록을 빠르게 쓰고자 한다. 떠올리기만 해도 땀이 나려하니까 말이다.
호텔에선 아침부터 물이 나오지 않아 머리를 감다 말고 욕실에서 튀어나와야 했다. 리셉션에 전화하니 물 배급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서 이십여 분 정도 기다려 달라고 한다. 거품이 다 씻겨나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일단 거품을 수건으로 걷어내고 삼십 분을 기다렸다. 물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녹물이었다. 이 분 정도만 빼면 된다고 했는데 체크아웃 시간이 다 되도록 녹물만 계속 나왔다. 그래서 생수통의 남은 물로 머리를 헹구고 호텔을 나섰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나오자마자 오늘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환전소도 찾아야 했고, 어제 봐둔 호안끼엠 호수 주변의 등촌 칼국수에도 가봐야 했다. 여행사 환율은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등촌 칼국수에 갔다. 역시 한국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곳이었고, 한국 손님도 많았다. 일본 고객이나 베트남 고객도 조금 보였다. 버섯매운칼국수는 끝내주는 맛이었고, 밑반찬으로 나오는 부추 김치는 더 끝내주는 맛이었다. 부추 김치는 한국에서 먹던 것들보다 더 맛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4층에 위치한 곳이라 전망도 좋았다. 사장님께 주변에 있는 환전소와 여행사 정보를 얻었다. 쇠고기를 샤부샤부로 해 먹지 않아도 훌륭한 한 끼 식사였다. (물론 길거리 음식에 비하면 비싼 편이었지만.)
거리를 돌아다녔다. 땀이 났다. 하롱베이 투어 예약을 위해 사장님이 알려주신 여행사를 찾았다. 사파 산에 가기를 포기하고 하롱베이 2박 3일을 계획한 우리는 가격과 루트를 확인해 보았다. 나쁘진 않았지만, 다른 곳도 확인해 봐야할 것 같았다. 한 군데 더 들러보았다. 아까보다 좀 더 비쌌지만, 배는 좋아보였다.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일단 예약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눈을 돌렸는데 건너편에 괜찮은 호텔이 하나 보였다. 기존 호텔(1박만 예약해야해서 오늘 숙소를 옮겨야 했다.)에서도 아주 가까웠다. 그곳에 가 방이 있냐고 물어보니 딱 하나 남았다고 한다. 친절한 남직원과 여직원들은 유쾌한 열매라도 씹어먹었는지 정말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방을 보고 거기서 묵기로 했다. 원래 호텔로 돌아가 짐을 찾아 옮겨두었다. 그리고 아까 못 다한 샤워를 했다. 물이 잘 나온다는 데 감사했다.
이 호텔에서 장년층에 가까운 한국 어르신 한 분을 뵈었다. 작년에 베트남 남부를 보셨던 그분께서는 올해는 십오 일 동안 중부와 북부를 여행하셨다고 한다. 두 부부가 함께 자유여행을 하시는 모양이었는데 역시 베트남 통 다우셨다. 우리가 하롱베이와 사파 산 어느 쪽이 더 낫냐고 여쭙자 남자 분은 사파 산을 추천하셨다. 고산족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풍경도 좋다는 말씀이셨다. 우리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파? 하롱베이?
인사를 하고 방으로 올라가 나갈 채비를 했다. 먼저 로비로 내려간 D는 이번엔 리셉션에 있는 직원과 여행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 직원에게도 어느 쪽을 추천하느냐고 물어본 모양인데 직원은 하롱베이를 추천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잘 생겼으니까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크루즈 여행을 하라며. (나중에 우리가 택한 그 여행사의 프로그램 구성원이 거의 '효도관광'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복불복인지라.) 그 말에 혹한 D는 거의 하롱베이 쪽으로 기울었고, 그래도 하노이에 왔으니 세계 7대 자연유산 중 하나는 보고 가야지 않겠느냐는 데 나도 동의했다. 게다가 가격도 앞선 두 곳보다 저렴했다. 우리는 바로 결제를 마쳤다.
하롱베이 투어도 예약했으니 오늘 할 일도 끝이다. 우리는 호안끼엠 호수 주변이나 한 바퀴 돌며 기회가 되면 환전을 하기로 했다. 호수를 돌았다. 해가 지려함에도 엄청나게 더웠다. 열기가 축적될 만큼 축적돼서 그런지 한낮보다 더 더웠다. 세상은 찜통이었고 대부분 땀을 줄줄 흘렸다. 호안끼엠 호수 북쪽 섬에 있는 응옥선 사당 앞까지만 다리를 건너 가보았다. 경치가 좋았다. 다리는 아름다웠다. 우리는 돌아나와 호수 주변을 계속 돌았다. 이상하게 베트남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입고 사진을 찍는 여성들이 많았다. 연령대를 보아 졸업 사진을 찍거나 결혼 기념 사진을 찍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커플도 보이긴 했지만, 여자들이 훨씬 많았다.) 적당히 뿌연 공기를 통해 햇살이 넓게 퍼져 지상에 닿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이 퍽 잘 나올듯 싶었다. 덥기는 엄청 더워보였지만 말이다. (화장이 뜨고 옷이 피부에 착 달라붙을 만큼 땀이 난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표정은 다들 밝아 보였다.) 또, 서양인 주변에 우르르 몰린 현지 대학생 무리도 자주 보였다. 벤치에 앉아있는 여행자들에게 다가가 영어로 대화를 하고 언어를 배우는, 뭐 그런 현장 학습 같은 모양이었다. 역시 그 누구도 나와 D에게 영어로 말을 걸진 않았다. 참고로 D는 아까 시장에서 산 베트남 삿갓을 쓰고 있기도 했다. 그 외에 조깅을 하는 사람, 단체로 운동을 하는 사람, 그냥 앉아서 데이트하는 연인들, 산책하는 이들을 호수 주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시민들의 훌륭한 휴식처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호수 주변엔 조경도 잘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하노이에서는 유독 꽃을 많이 볼 수 있다. 꽃시장도 봤고, 지게에 꽃을 들고 다니며 파는 사람들도 많다. 이 도시는 꽃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반 바퀴 정도 돌고 지쳐서 카페에 앉아 쉬다가 또 나머지 반을 돌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그나마 살 것 같았다. 공기도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나와 D는 저녁 대신 좁고 높은 펍에 들러 맥주와 핫 윙을 먹었다. 에어컨 없이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창가에 앉아 건너편 주택을 바라보았다. 때 묻었지만 그 형색은 아름다운 발코니가 우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저 너머, 저 벽 안에서 작은 아이 둘이 놀고 있었다. 보기에 좋았다.
펍의 매니저 정도 되는 사람과 이야기도 나눴다. 그 역시 활기찬 친구였는데(이상하게 관광객을 상대하는 베트남 사람들은 다 유쾌하다. 영어를 못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다.) 서른 두 살이었고 아들이 한 명 있었다. 한인 타운이 있기도 한 경남 타워 주변이 집이라고 했다. 그는 중국인을 싫어했고, 그냥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서인진 몰라도 한국인을 좋아한다 했다. 언젠가 자신의 술집을 운영하고 돈을 많이 벌면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한국이 얼마나 여행하기 어려운 나라인지 실감했다. 어찌됐든 한류가 우리가 여행을 하는 데 꽤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동남아시아 많은 국가에 유행하는 한국 예능 프로그램과 연예인들의 위상이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다른 이유는 그냥 접어두고 내가 예능 프로그램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여기선 그냥 둘러대도록 하자.
호안끼엠 호수를 포함한 구시가지 산책은 해가 꼴깍 넘어가면서 끝났다. 한 번 더 샤워를 한 우리는 숙소 직원이 알려준 ta hien이라는 작은 골목에 가 맥주나 칵테일을 먹을 참이었다. 아니면 어디 클럽이라도 찾아가거나. 수많은 사람이 좁은 골목 거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있었다. 아무 길거리에 앉아있는 것도 놀라웠는데 아예 펍이 몰려있는 곳에 그렇게 앉아있으니 흡사 란콰이퐁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서 있는 대신 모두 앉아있다는 점이 달랐지만.) 이걸 활기찬 도시라고 해야할지 그냥 밖에서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시는 먹는 풍속만 발달한 도시라고 해야할지는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 모습이 적잖은 인상을 주고 적잖은 흥분을 안겨 줬다는 사실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