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공항에서 홍콩의 첵랍콕 공항까지 가는 네 시간 좀 안 되는 시간은 장거리 비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그럭저럭 견딜 만한 고통을 줄 것이다. 나로서는 이 네 시간이 좀 어중간하다. 영화를 한 편 보면 딱 좋겠지만, 저가 노선엔 공용 스크린도 없다. 모바일 기기로 영화를 보는 데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도착하는 순간 들여다도 안 볼 영상물을 넣어 오는 게 귀찮기도 하다. 책을 읽자니 온갖 기대와 흥분 때문에 집중이 안 된다. 책 역시 도착하면 표지 쓰다듬는 일조차 없을 게 뻔하고 말이다. 여행 노트를 써 볼까? 이제 막 시작한 여행인데 쓸 말이 있을 턱 없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잠을 청해 본다. 그러나 기내가 환해서 오래 잠들 수가 없다. 거참 애매하고 또 애매한 시간이다. 그렇다고 빈자리를 ..
벌써 꽤 오래 전 일이 되어버린 2013년 7월의 홍콩 여행. 한창 두 번째 홍콩 여행기를 쓸 때였기도 했고, 파리에 북규슈까지 겹쳐서 이건 포스팅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도 올해 건 올해 다 정리해 버리는 게 깔끔한 법. 길고 긴 여행기로 쓸 게 아니니까 사진이라도 들추어 보자. 비가 오는 7월이었다. 9월에 갔을 때도 아주 더웠던 기억 때문에 사실 날짜를 정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고 나서도 많이 망설였었다. 도대체 7월엔 홍콩이 얼마나 더울까? 한국엔 비가 왔었다. 그리고 지독한 더위가 아직 마수를 뻗치기 전이었다고 기억한다. 결국 제대로 각오하고 더위를 즐기자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숙취 때문에 엄청 고생했던 두 번째 홍콩 여행의 아픈 추억을 되새김질 하며 전날에 술 한 모금..
미리 이야기하자면, 베르사유 궁전 안에 들어가진 않았다. 두 해 전에 갔던 그곳은 내부도 정원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거울의 방은 얼마나 화려했던가. 정원은 또 얼마나 숲처럼 시야 끝까지 내달렸던가. 그러나 그걸 기억하면서도 다시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저 밖에서, 카페 같은 데라도 앉아 있고 싶었다. 하늘이 너무 푸르고 아름다워서. 그냥 남들한테서 날 좀 떨어뜨려 놓고 싶어서. 좀 더 정확한 이유를 대자면 여기까지 오다가 보았던 어떤 장면 때문이었다. 두 젊은 여자가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아마 베르사유 대학에 다니는 듯,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여자는 돌길을 따라 내려가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다 어떤 모퉁이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금껏 이 자리에서 수없이 오갔으리라는..
:: 두 번째 홍콩 여행기를 마쳤다. 올해 이월에 다녀왔던 여행을 이제야 정리하다니 심란스러운 속도가 아닐 수 없다. 떠나기 한 달 전부터 이번 여행기를 어떻게 쓸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첫 번째 홍콩 여행기를 쓰고 있을 때였고, 두 번째 여행 전에 그걸 마친다고 안간힘을 쓰던 때이기도 했다. 계획은 대사가 참 많은, 심지어 있던 일을 과장까지 하는, 어떻게 보면 소설 같은 여행기를 쓰려던 거였다. D와 Y를 주인공으로 삼고, 나는 두 사람과 우리 셋에게 벌어진 일을 관조하며 이야기를 진행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돌려 말해 무엇할까. 결론적으로 계획과 전혀 다른 글이 나오고 말았다. 마치 우리의 여행이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것처럼. 보름마다 한 편은 썼던 첫 번째 여행기와 달리 이번 글은 참 오래..
:: 좋았던 것과 나빴던 것에 관하여 일어나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한국은 폭설이라고 한다. 이곳은 아무리 봐도 가을 날씨인데 말이다. 며칠 떠나있지도 않았건만 미친 듯이 춥고 마구 눈이 내리던 서울 풍경이 그려지질 않는다. 그게 72시간 전까지 현실이었고, 8시간 후부터 다시 현실이 될 그림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조금 더 꿈을 꾸자. 몇 달 전에 떠나보낸 가을과 일단 재회하고 보자. 마지막 날이랍시고 그나마 일찍 일어나지 않았나. 지금은 아침과 제일 흡사한 시간이 아니던가. 가방 정리를 하면서 나흘간 너저분해진 기억도 쓸어 모은다. 이번엔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좋지 않았을까. 무엇이 만족스러웠고 무엇이 아쉬웠을까. 여행 계획서를 허투루 썼으니까 여행 평가서라도 제대로 작성해 봐야겠다. 하지 ..
:: 세나도 광장으로 이번엔 제대로 중심부로 온 모양이다. 카지노를 나와 선착장으로 돌아온 후, 다시 마카오 윈 호텔 행 셔틀 버스를 타고 호텔촌에 도착했다. 주변엔 어느 하나 크고 화려하지 않은 건물이 없었다. 윈 호텔만 해도 건물 전체가 황금색 유리로 도배되어 있었다. 마당엔 넓은 분수대와 한쪽으로 기운 부채꼴 모양의 구조물이 있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크고 화려하지만, 동시에 모든 게 낡았다. 어디에서도 음악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거리는 음소거 버튼이 눌린 듯 조용했다. 눈 부신 네온사인도 침묵 속에서 깜빡였다. 모든 게 시시각각 움직였지만, 모든 게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시각과 청각의 불균형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셋 모두 적응이 잘 안 되는 상태에서 마침 화..
:: 마카오로 가는 길 전날 너츠포드 테라스에서 격하게(?) 논 탓인지 오늘도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창문 없는 방은 아침이 왔다는 소식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고, 어영부영 한낮이었다. 마카오를 갔다 오는 날인데 제대로 늑장을 부린 격이었다. 가장 먼저 일어나 분주하게 우릴 깨운 Y는 씻는 것도 일등이었다. 나와 D가 기상 후 갑작스레 덮쳐오는 체력의 한계에 정신을 못 차린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저 셋 다 처음 가보는 곳, 마카오로 간다는 기대 하나로 버텼다. 이번 여행에서 마카오 일정을 맡은 Y는 선별된 가이드로서 우리에게 커피도 내려주고 방도 정리하고 가방을 싸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이 녀석, 오늘 뭔가를 보여주긴 제대로 보여주려나 보구나. 나와 D는 기대를 안고 그의 지시에 따라 몸을 일으..
:: D의 사진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바깥은 완벽히 어두워져 있었다.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장어가 들어가 배는 든든하고, 이미 밤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시간에 대한 미련으로 가슴 속이 간질거렸다. 여행은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휴지기 - 붕 뜬 기분에 사로잡혀 생각도 행동도 의미를 잃어버리는 순간 - 가 찾아올 때가 있다. 여행이 언제나 신선하고 흥미로운 건 아니다. 나와 D는 딱히 궁금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는 몸으로 침사추이의 골목에 멍하니 서 있었다. 뭘 할까? 어딜 갈까? Y를 다시 만나기까지 적어도 한 시간은 남았다. 외국의 도시에서 오랫동안 못 본 친구와 조우하고 있는 Y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친구의 여자친구와 친구 여자친구의 친구들에 둘러싸여서(모..
[지난글] :: 파리 여행 노트 - 루아르 고성 #1 쉬농소 성 가는 길 루아르 지역, 고성이 모여있는 이곳으로 오기 위해 파리를 떠난 지 약 세 시간. 드디어 쉬농소 성으로 들어간다. 생각해 보면 궁엔 꽤 들어가 봤어도 성엔 별로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나름 새로운 경험이다. 게다가 널리 알려졌듯이 쉬농소 성은 '여인들의 성'으로도 불린다. 뭔가 남다를 게 있을 것 같은 별명이 아닌가. 성 치고는 우리가 입장할 수 있는 입구는 아주 작았다. 딱 한 사람씩 오갈 수 있는 크기였다. 쉬농소 성이 '여인들의 성'이라 불리는 이유는 앙리 2세의 정부였던 디안느 드 푸아티에와 왕비였던 카트린 드 메디치가 각각 소유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성의 소유자가 주로 여성이었다는(디안느와 카트린을 포함해 모두 여섯 명)..
걱정과는 다르게 놀라울 정도로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정상회담 때문에 차가 많이 막힐 거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실상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졌다. 오하우 섬에 있는 국제공항은 최초로 하와이를 통일한 카메하메하 1세가 세웠다 해도 믿을 정도로 낡았다. 여행의 시작과 종착을 책임지는 역할엔 지장이 없지만, 딱히 볼거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공항은 터미널 안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버라이어티하다. 에이프런에 서 있는 비행기는 또 어떤가. 거대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아한 곡선에 혼이 빠져 한참이고 바라볼 수 있지 않은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불만이었던 이유는 출국 심사를 받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는데 흡연 구역이 하나도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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