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같은 해변에 앞다투어 모인 특급 호텔들이 가장 좋은 경치를 독점한다. 해변으로 나가려면 호텔과 호텔 사이에 난 골목길을 걸어야 했다. 에어컨디셔너의 실외기가 윙윙거리고 반쯤 열린 창문에선 저녁 준비하는 냄새가 풍긴다.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는 주방장과 벨보이들은 로비나 식당보다 이곳에서 더 마음 편해 보였다. 골목 끝은 눈부시게 빛났다. 백사장을 밟는 순간, 빛과 소리의 파도가 등 뒤 골목 안으로 쓸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석양, 바다, 모래, 몸매를 솔직히 드러낸 단벌 팬츠와 비키니. 지도를 보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 와이키키 해변에 모여있었다. 강렬한 빛의 이미지는 시간과 생각의 흐름을 걸쭉한 소스처럼 느려지게 만들었다. 그러다 지평선 부근에 드리워진 구름의 그림자가 천천히..
오하나 웨스트 호텔 앞에 커다란 식료품 마트가 하나 있다. 이름도 푸드 팬트리(식품 저장실). 너무 솔직하게 자아를 드러내는 이름이다. 샌드위치를 먹을까 하다가 그만두고 마트 뒤편에서 담배를 태우는데 한 남자가 지게차에 오른다. 주차장 곳곳에 쌓인 커다란 박스가 그의 일거리다. 시동을 걸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스스럼없이 웃어 보였다. "일본 사람이에요?" "아뇨, 한국 사람인데요." "그래요? 여긴 한국 사람도 참 많아요." 그는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밟았다. 기다란 손잡이를 움직이자 곤충의 집게 같은 쇳덩이가 아래로 미끄러졌다. "제가 재미있는 거 하나 보여 드릴게요." 능숙하게 박스 밑으로 받침을 집어넣은 남자는 푸드 팬트리 건물 가까이 차를 댔다. 그런데 일 층엔 벽뿐이었다. 재고를 집어넣을 ..
이곳은 하와이의 섬 중 제일 크다는 이유로 빅 아일랜드라고 불려. 사실 이 섬의 진짜 이름이 하와이지만 많은 사람이 와이키키 해변이 있는 오하우 섬을 하와이라고 생각하지. 섬이야 저를 뭐라 불러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본명을 잃었다고 슬퍼지는 건 감정이입을 잘하는 인간만의 속성이겠지. 빅 아일랜드엔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 활화산이 있어. 이곳의 산은 해발이 높지만 능선은 젖무덤처럼 완곡하고 부드러워. 구름이 드리워지면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의 동산처럼 보일 정도야. 6인승 승합차를 타고 화산 국립공원에 올랐어. 고도가 높아질수록 활엽수가 고개를 숙이고 침엽수가 늘어나. 어쩐지 풍경도 삭막해져, 다시 살아나기 어려운 중환자처럼. 그러다가 드디어 사시사철 수증기가 올라오는 분화구를 볼 수 있는 거야. 정말 ..
1. 무선 인터넷 이름에 프리나 메트로가 붙은 것들은 한두 번 속고 나니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됐다. 정오가 조금 지났는데 날이 개지 않아 모어 런던은 늦은 오후의 신시가지 같았다. 묘한 얼굴을 한 철상鐵像과 타워 브리지를 스케치하는 화가를 휴대전화의 카메라에 담고 무심코 설정창을 열었다. 저도 모르게 헛숨이 나왔다. 드디어 나와 말이 통할 것 같은 이름 하나를 찾은 것이다. 등 뒤에 있는 시청사나 사무용 빌딩이 고향인,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부채꼴이 한 개와 두 개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예민한 녀석이었다. 시험 삼아 담벼락에 방금 찍은 사진을 올려보았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전송창이 차오르고, 지금 이 순간이 대부분 한국에 있는 나의 친구들에게 공유되었다. 시운전이 끝나자 메신저를 통해 그녀에게 말을 걸었..
1. 새벽에 눈이 떠졌다. 창밖으론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런던 근교의 황량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젯밤 런던에 도착한 후 호텔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바로 잠이 들었다. 선잠이 들지도 않았고 비행으로 말미암은 피로도 없었다. 이럴 땐 시차 적응이 빠른 체질에 참 감사하게 된다. 어울리지 않게 새벽 공기가 마시고 싶어졌다. 미로처럼 길고 복잡하며, 가끔 오븐 타이머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복도를 빠져나왔다. 호텔 정문 앞엔 벌써 먹이를 잡아 온 새들이 식전 기도를 지저귀고 있었다. 기온이 낮지는 않은데 바람이 불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런던의 스산한 추위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담배를 한 대 태우면서 새벽부터 어디론가 바쁘게 향하는 차들을 본다. 출근길인가 싶어 이네도 참 빡빡하게 사는구나 하는..
3. 섬과 리조트 저도 모르게 낡고 부식된 것에서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팔라우의 유일한 포장도로를 따라 걸을 때 고향에 온 듯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시내라고 해도 번잡함이 없고 유명 상표라고는 맥주나 음료수 몇 종류 밖에 눈에 띄질 않는 곳. 도로 안쪽으로 멀뚱멀뚱 앉아있는 건물들 역시 현대 건축의 매끈하고 세련된 손길에 전혀 혜택 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다. 주물로 통째 짜 놓은 게 아닌가 싶은 콘크리트 건물과 물에 젖었다 마른 흔적이 생생한 베니어판, 그리고 한국 기와의 곡선미를 어설프게 대량생산한 느낌을 주는 슬레이트가 한 집마다, 멀어도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반복됐다. 이곳의 시간은 거의 멈춰버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느리게 노를 젓는다는 게 실감이 났다. 팔라우가 가장 비현실적으로 변하..
[여행과 에세이] 2011 유럽 여행기 (0) - 주마간산(走馬看山) 보러가기 1. 여행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똑같은 골목, 똑같은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댔을 때 울리는 똑같은 인사말도 기나긴 여정의 시작일 땐 평소보다 특별하게 느껴진다. 묵직한 캐리어와 손때 묻은 여행책자는 신문이나 휴대전화에 몰두해 있는 옆 사람과 전혀 다른 운명을 예고한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이 도시, 이 나라를 떠난다는 생각이 자기 자신을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기도 한다. 희망과 기대가 빚어낸 이런 묘한 감정은 어느 휴일 늦잠에서 깨어나 따뜻하고 포근하게 비추는 햇살을 볼 때와 비슷한 면이 있다.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오는 순간 말이다. 갑자기 삶이 아름다워 보이고, 머리를 아프..
갑자기 8일 정도 유럽을 가게 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 십중팔구는 부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유럽 출장이 출발 닷새 전에 결정이 되면 본인이야 당황스러워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선 저 친구 제대로 운이 좋구만, 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좀 갑작스럽긴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유럽이지 않냐며 격려하는 반응도 상당하다. 유럽연합에 속한 나라가 25개국이고 그렇지 않은 나라가 다시 그만큼이나 더 존재하는데, 어느 나라를 가느냐와는 상관없이 그저 ‘유럽'으로 출장을 가게 돼서 좋겠다는 건 그 땅에 대한 지나친 동경인지도 모른다. 하긴 멀기도 멀고, 비행기 삯도 비싼데다가, 세계사를 배우는 순간부터 의식 속에서 서양 역사와 문화의 나침반은 그곳으로 향하게 마련이니 당연한 일일까. 이렇게 말하..
2. 색色을 위한 찬가 아는 단어가 많지 않거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할 능력이 부족하다면, 또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다면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구름을 흰 것과 회색인 것, 또는 큰 것과 작은 것으로밖에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 심지어 '있다'와 '없다'로 분간하는 게 최선인 사람마저 있을지 모른다. 183개의 회원국과 6개 지역이 참가하는 세계기상기구(WMO)에서 구름의 종류를 크게 열 가지로 분류한 노력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셈이다. 물론 이 범세계적인 기구에서 글과 그림으로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구름의 분류를 공부한다 하더라도, 지금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어디에 속하는지 맞출 확률은 굉장히 낮다. 어지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그 놀랍도록 천진난만한 수증기 덩어리들의 ..
1. 기대 휑한 들판과 활주로 같은 도로엔 겨울 색이 완연했다. 추위로 기록을 경신하는데 재미가 붙은 계절은 그나마 열차 안에선 유예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 정거장에 멈춰 한쪽 문이 일제히 열릴 때면 잊지 말라는 듯 가혹한 바람이 실내를 두드렸다. 그 심보엔 문신이 새겨진 근육을 뽐내는 사나이처럼 남세스러운 면이 있었다. 이번 여행지가 여기와는 180도 다른 계절이 지배하는 장소라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너무 추운 나머지 크리스마스의 독특한 분위기조차 얼어붙지 않았던가. 덕분에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성탄절은 벌써 희미한 축제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히려 흰 눈을 덮고 길게 길게 눕는 들을 보고 있자 오늘에서야 경건한 축일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여행 자체보단 다른 데 기대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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