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외국의 공항에 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흡연 중이라면 담배를 피우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물을 사는 것이다. 그 나라 돈을 처음으로 쓰며 어떤 심드렁한 얼굴이 지폐에 그려져 있나, 물가는 얼마나 차이가 나나, 또는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 같은 자판기의 사용법은 어떻게 되나 알아보기 위해서다. 습관적으로 따던 페트병 뚜껑인데 이곳에서는 드르륵하는 소리도, 플라스틱 고정핀이 뜯기는 역치도 조금은 다른 것 같다. 상점에서 면대 면으로 샀다면 돈 그릇에 거스름돈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이 나라의 감사 인사를 전하면 대체로 점원 역시 활짝 웃으며 답례해 준다. 그 짧은 대화만으로도 이 나라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다. 게다가 뭐라 논리적인 이유를 대기는..
신치토세 공항에서 날 반겨준 건 삿포로 맥주 포스터였다. 북해도에서만 판매한다는 삿포로 클래식의 하얀 거품을 보며 어떤 곳에선 랜드마크도 아름다운 모델도 아닌 알코올음료가 먼 길 온 손님을 반겨줄 수도 있다는 새로움을 맛봤다. 열차를 타기 위해 건너간 국내선 청사에 있던 수많은 매장도 그랬다. 북해도의 온갖 먹거리들이 다 모여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여행을 끝낸다고 해도 이 동네에서 어떤 먹거리가 유명한지 남들에게 자랑할 순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건 공항의 의무나 다름없었다. 당신, 열심히 보고 듣고 돌아다니느라 기념품 살 시간도 없었을 테니까 여기서 전부 챙겨가세요. 인천 공항의 면세점에도 한국 특산품인 김이나 홍삼, 제주도에서 건너온 초콜릿이 있지만, 신치토세 공항의 기념품점은 더욱 다양한 것..
이륙하는 창 너머로 내 그림자가 보였어. 나처럼 생기지는 않았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건 알게 해 주는 새를 닮은 그림자를 보았어. 그건 미련없이 세상을 가로지르며 저를 한 번 흉내 내 보라고 권하는 것 같았어. 아니면 어림도 없지 않으냐며 약을 올리는 중이었거나. 이륙하는 창 너머로 내 그림자가 보였어. 그것은 한참을 따라오다가 기체가 고도를 높이는 순간, 구름으로 들어가 영영 보이지 않았어. 보이지 않아도 발밑으로 뻗어있는 그림자를 느낄 수는 있었어. 그건 여전히 미련없이 세상을 가로지르며 저를 흉내 내 보라고 권하고, 또 권하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겠니? 재료가 똑 떨어져 더 받을 수 없는 주문처럼 나는 듣고도 어쩔 도리가 없었어. 비행기는 이렇게 가볍게 비상했는데 내 짐과 내 자리..
여행 전날 과음하면 안 된다는 지극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어겼다. 대가는 초 단위로 밀려오는 두통으로 톡톡히 치른다. 버스에 오르기 전 숙취 해소 음료를 마셨지만, 괄목할 만한 효과를 보기엔 역부족이었다. 기대를 못 이겨 마신 술은 아니었다. 다음 날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것도 잊을 만큼 엉뚱한 이야기에 푹 빠져 마신 술이었다.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거울을 보며 묻고 싶었으나 어쩌면 이건 실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백한 고의다. 여행이 여자라면 일부러 관심 있는 척하지 않으려고 그 앞에서 딴짓을 하는 농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여행은 여행이고, 술은 술이지. 문제는 이래 봤자 잘 보일 수 있는 대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런다고 낯선 도시가 내 관심을 끌기 위해 어마어마..
시월 말, 삿포로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늦은 휴가 목적지로 염두에 두고 있던 곳은 원래 교토였다. 하지만 아주 저렴한 가격에 삿포로 왕복 항공권이 올라와 있는 걸 보고, 게다가 딱 네 장 남아 있는 걸 보고, 예약 버튼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11월 말,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였다. 실은 이 가격일 만한 시기인 것이다. 가이드북에서 홋카이도 추천 여행시기로 일 년 중 아홉 달을 꼽았는데 11월은 나머지 불운한 석 달 중 하나다. 단풍은 지나갔고 눈은 잘 오지 않는 어중간한 달. 삿포로 시내 호텔 가격이 서울 모텔 가격보다 싼 걸 보면 말 다 했다. 그래서 오히려 내겐 최적의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제철이 아닌 도시엔 분명 사람을 유혹하는 면이 있다. 한산하다 못해 허전한 거리를 떠올리면 누구라도 걷고..
혼자 아주 오랫동안 여행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순 없지만, 혼자서 생각을 정리한다는 흔히 쓰이는 말이 최소한 나에겐 해당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내가 생각을 정리할 때는 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다. 여행이라는 라벨을 붙인다면 그건 번지수를 착각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일주일 정도 혼자 다니다 보면 생각의 양이 엄청나게 줄어든다. 그저 끊임없이 혼잣말을 반복하고 뭔가를 끊임없이 느끼기만 할 뿐이다. 마치 영사기의 빛을 쬐고 있는 하얀 스크린처럼. 세상은 나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덧씌우지만, 남는 흔적이라고는 먼지 몇 줌뿐이다. 물론 나중에 회상하면 몇 줄이라도 쓸 거리가 생기긴 하지만, 당장은 기대만큼 드라마틱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내가 다..
마닐라는 교통체증이 심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교외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이 엄청나게 막혀서 짧은 거리에도 몇 시간씩 소비해야 했다. 하지만 여행의 가장 큰 묘미가 걷기에 있을지언정 차를 타고 보는 풍경도 허투루 볼 수만은 없다. 인도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차도 위에선 드러나기도 한다. 특히 고속도로, 휴게소, 교외 풍경 등은 차를 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이국의 정취, 평범한 삶의 조각은 주거지역의 골목길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간식을 사서 시골로 내려가는 고속버스에 올랐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본다. 집과 학교가 있는 익숙한 동네에서 일탈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던 곳은 바로 그 고속도로 위, 등유 냄새 코를 찌르는 휴게소였다. 버스를 더 많이 타 본 탓인지 나는 기차역보단 고속도로 휴게..
일광욕이라든가 광합성이라든가 전부 여름 햇살 아래에선 어림도 없는 소리다. 나는 피부가 검고, 여기서 삽시간에 더 시커메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일부러 땡볕을 피하는 편이다. 누가 그 무자비한 레이저를 좋아하겠느냐만은 난 보통보다 유난스럽기는 하다. 그러니 태양의 무게가 훨씬 무거운 지역으로 여행을 오면 매일 아침 창밖을 보며 저 햇살 아래로 나가야만 하는가 회의에 빠지곤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외출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결국 챙 있는 모자를 찾거나 선 블록 크림을 보다 꼼꼼하게 바름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을 속여야 한다. 거리에 야자수가 자랄 수 있는 나라에서는 그 모든 조치가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고야 말지만. B의 집은 거의 리조트를 방불케..
어제에 이어 다시 올리는 부산 여행 사진. 사실 찍은 장수에 비해 올릴 사진은 그렇게 많지 않아 서너 편에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온통 먹은 이야기 뿐이라 코멘트 붙일 것도 없고. 둘째날 아침에 일어나 날 반겨준 건 엄청난 숙취였다. 많이 마신 건 아니었는데, 잘못 마신 모양이었다. 정말 밖으로 나가기 싫었는데 억지로 차에 몸을 실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목에 금정구라고 써놨는데, 사실 금정구에서 뭐 대단한 건 한 건 아니고(뭐하는 동네인지도 잘 모른다) 이쪽에서 아침으로 돼지국밥을 먹었다. 친구 말로는 유명한 곳이라 한다. 더도이 종가집 돼지국밥이라던가. 사실 들어갈 때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름도 몰랐다. 나중에 감으로 지도를 검색해 보다가 찾았을 뿐. 주차장 벽..
친구들과 사흘 동안 부산에 다녀왔다. 아마 여기 블로그에선 한 번도 소개하지 않았을 오랜 친구들로, 같이 여행을 가는 건 거의 십 년만이었다. 부산에서 일(이라고 하기엔 좀 더 학구적이면서 영업적인 면도 갖춘)을 한 지 일 년 반 정도 된 친구의 호출 덕분이었다. 서울에서 내려가는 사람만 넷. 현지에서 만난 친구까지 하면 다섯. 대체로 큰 계획 없이 먹으러 다녔던 사흘이었다. 네 명이 내려가니까 KTX보다는 기름값과 톨게이트 비용이 더 저렴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안타깝게 내 면허증은 아직 장식용이라 운전은 두 사람이 나눠서 했다. 하필 부산 국제영화제 기간과 딱 맞아 떨어져 걱정을 했었는데 부산까지 가는 길은 막힘이 없었다. 혼자 부산에 살고 있는 친구는 부산대에서 만났다. 아주 오래된 유머 중에 부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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