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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거대한 굴뚝에서 뽑아 올린 것 같은 구름은 여전히 대류권을 장악중이었다. 그 아래로 차가운 습기가 뚝뚝 떨어졌다. 물 먹은 공기가 축 늘어지자 축제의 풍악도 울림새가 처량했다. 어느 겨울, 프라하의 아침. 유럽에서의 마지막 스케치.

 

  객실 밖 창문으론 옆 건물의 낮은 옥상이 보였다. 공장지대나 산업도시의 변두리를 연상케 하는 거리도 시야에 잡혔다. 흐린 하늘이 나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나의 감정이 흐린 하늘을 곧 작별할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인지는 모호했다. 그저 회색빛 손길이 콘크리트 벽을 뚫고 호텔 내부에도 스며들었음만 확실했다. 막 깨어난 몸을 추스르자 식당은 좀 다를지 모른다고 믿고 싶어졌다.

  호텔에서 먹는 베이컨과 스크램블 에그, 시리얼과 살라미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어느새 아침마다 접하는 이런 식단에 익숙해졌는데 내일부턴 다시 식탁 위에서 하얀 쌀밥을 보게 되겠지. 체력을 소모할 일도 없지만 일부러 먹는 양을 늘렸다. 집에서 이렇게 차려먹는 건 상당히 번거로운 일일 뿐더러, 유목민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호텔의 조식을 조금이라도 더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식사라기 보단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짐 정리를 마치고 체크아웃을 했다. 우리가 보낸 짧은 날들에 대한 체크아웃이었다.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 전환을 위해 한 번 더 구시가지를 찾았다. 프라하는 이 친숙한 광장과 카를교에서 본 프라하 성, 그 둘만으로 남아 기억의 코르크판에 고정되지 않을까? 줄줄이 늘어선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며 추억을 사들이고자 노력했다. 사진과 기념품 일절은 지나간 시간과 공간을 떠올리기 위한 방아쇠다.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책상 한 구석에서 카를교 모형이나 디지털 엽서를 발견하고 회상에 잠길 기회가 있을 것이다. 몇 코루나로 그런 찬스를 많이 만들 수 있다면야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현재를 붙들어 보려는 시도가 부질없는 짓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노력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를 받곤 하니까.


  
떠나는 날의 아침이 선사한 아쉬움의 정서는 우리를 사로잡았고, 우리를 진지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는가? 아니, 애초에 왜 이곳을 떠나야 하는가? 슬슬 공항으로 갈 시간이 되자 여기를 떠나야 할 이유조차 의심스러워졌다.

  침울한 가운데 공항행 직행 버스를 타기 위해 가이드북이 일러준 이름 모를 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 가이드북이 아주 멍청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역엔 공항버스는커녕 버스 정류장도 없었다. 덕분에 헐레벌떡 (역무원이 도대체 왜 여기로 왔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알려 준) 중앙역으로 돌아가 아슬아슬하게 공항버스를 잡아탔는데, 이러자 모든 진지함은 사라져 버렸다. 힘이 쭉 빠졌고, 아쉬움은 혼란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나는 가이드북을 욕하며 수중에 남은 체코 동전을 세보는 것 말고는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정도면 제대로 기분 전환을 한 셈이었다.


공항버스에서.

 

  지함도, 몰두도, 더불어 아쉬움도, 여행 안에선 그 반대의 속성과 즐겨 널을 뛴다.

그러니 Take it easy.


  항은 목을 잘못 잡은 쇼핑몰처럼 텅 비어 있었다. 두 장의 보딩 티켓을 받고 게이트를 넘자 물리적으로만 체코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처럼 소속이 불분명한 사람들이 면세 구역을 떠돌고 있었다. 코펜하겐, 취리히, 마드리드, 밀라노. 유럽 곳곳으로 뻗어나가는 단거리 항공기들이 에이프런에 서서 그들을 싣고 날아오르기를 기다렸다.


수많은 행선지.


  여남은 편의 운항 정보를 보여주는 모니터는 우리가 돌아가는 고국의 제품이었다. 이국땅에 첫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면 얼마나 반가운 상징이었을까. 그러나 지금은 고향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멸 신호처럼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릴 기다리던 KL3124편이 이제 때가 됐다며 수줍게 자신의 옆구리를 열어젖혔다. 프라하의 하늘이 낮아질 시간이었다.


가장 두근거리는 시간.


  암스테르담의 스히폴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체코 공항에선 볼 수 없었던 거대한 천장과 수많은 인파가 우리를 싸고돌았다. Arrivals 1에 도착하여 완전 반대편에 있는 Lounge 3까지 걸었다. 밖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공간, 그러나 누구도 하루 이상 머물지 않는 공간. 잠시 스쳐지나가는 정거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세상의 많은 공항들이 더 크고 화려한 모습을 갖추려고 애를 쓰는 건지도 모른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위하여, 거대한 터미널에서도 여행은 계속 된다고 느끼게 하기 위하여


암스테르담 스히폴 국제공항.


  그러나 나는 이곳을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장소로 삼기로 했다. 환승 수속을 밟고 거대한 통유리 너머로 꼬리에 왕관을 그려 넣은 파란 비행기를 보았을 때, 모든 걸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환승 터미널은 한국 사람들로 가득 차 벌써부터 요란한 고향의 분위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과 인천을 잇는 비행기는 지나치게 긴 지하철 통로 같았다. 반갑기도, 낯설기도 한 동향 사람들 속에서 고향은 이미 코앞에 있었다.


KLM.


  게이트가 열리길 기다리며 지난 여정을 떠올려 보았다. 파리, 베네치아, , 프라하. 각기 다른 이미지들이 뒤엉켜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내가 정말로 그 도시들에 있긴 했던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스히폴 공항에서 산 엽서를 꺼내자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새로 산 엽서엔 화려한 발색과 뛰어난 선예도로 사로잡힌 네덜란드의 풍경이 올라가 있었다. 풍차와 튤립, 암스테르담의 운하 위로 해가지는 아련한 모습들. 사진에서 피어오른 상상력은 경유하는 나라조차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아니, 사실이 그랬다. 떠난다는 게 거창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여행은 어딘가를 스쳐지나가는 과정이며, 몇 장의 엽서로도 우리는 그 황홀한 마차 위로 올라탈 수 있다. 이 땅을 거닐었던 선명한 시간들이 나는 만족스러웠다.


잊지 못할 기억들.

 

   곳으로 가는 것. 일정 시간 동안 장소가 바뀌는 것. 그저 똑같은 일상이 아닌 하루를 맛보는 것. 새로운 걸 보는 것.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것. 휴식을 취하는 것. 환경이 바뀌는 것. 다른 인종을 만나는 것. 다른 문화를 만나는 것. 다른 언어를 만나는 것. 오래 묵혀 왔던 생각이 바뀌는 것. 익숙지 않은 곳에 가는 것.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는 것. 잊거나 잊혀지기 위한 것. 진짜 무언가 달라졌다고- 달라지고 있다고 몸과 마음이 느끼는 것. 스스로 여행이라 생각하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언제나 객실에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진동과 함께 일단락을 맺었다. 짙은 남색 하늘과 8,000km 밖 평범한 일상이 작은 기체를 품에 안았다.

 


핑크색 캡션 사진은 fujifilm F50fd으로
푸른색 캡션 사진은 Canon A-1 + superia 200으로 촬영했습니다.
F50fd 사진은 필름과 느낌을 맞추기 위해 크롭 및 보정을 했습니다.
 


PS.

  그동안 이 한없이 길어지기만 했던 여행기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또 떠날 날을 기다리며, 아직 정해지지 않은 그곳에서 만나기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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