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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30. Day 3.
셋째 날에도 느즈막이 일어났다. 정오에 맞춰 놓은 알람에 정신이 들었다. 밤새 에어컨이 꺼지면 땀이 날 정도로 덥고, 에어컨이 움직이면 오싹오싹해져 여러 번 깼던 모양이다. 담배를 꽤 피운 탓에 목도 칼칼했다. 담배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지만, 이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 있으면 담배를 피우지 않을 수도 없다... 흡연만 하지 않아도 얼마나 건강한 몸으로 여행할 수 있을는지. 가지고 있는 것만 다 피우면 여행 중에 금연해 보는 건 어떨까 한다.
두 시쯤 호텔을 나와 유명한 쇼핑센터인 터미널 21로 향했다. 공항 터미널을 테마로 한 이곳은 각 층에 세계 각국의 도시 이름을 붙이고 그 도시에 맞게 실내를 꾸민 - 심지어 화장실까지 - 놀라운 콘셉트를 보여줬다. 동남아시아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에서야 발휘될 수 있는 뛰어난 아이디어였던 셈이다. 파리, 런던, 도쿄, 이스탄불, 샌 프란시스코도 - 맨 꼭대기 층에 금문교 모형도 있었다. - 있었으나 아쉽게도 서울은 없었다. 한 층 전체에 기와가 얹어지고 돌담이 세워지며 타이포그래픽으로 한글이 사용된다면 얼마나 멋질지 상상했다. 집을 떠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고국의 아름다움이 새롭기만 하다.
역시 D의 추천으로 후지란 이름의 일식당에서 도시락 세트를 먹었다. 제법 비싼 값이었고 그만큼 양도 푸짐하긴 했는데 다소 느끼했다. 여행을 와서 - 그것도 이렇게 이른 날에 - 그럴 줄은 정말 몰랐는데 결국 김치까지 주문했다. (정확히는 기무치였다. 젠장.) 한국의 김치보다 달고 익기는커녕 간도 안 밴 맛이었지만 밥을 먹는 덴 도움이 됐다. 하긴 일식당이니 일본식 김치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극장도 있길래 영화를 볼까 하다가 관두고 D와 게임을 했다. 총을 쏘는 게임이었는데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D는 손가락까지 까졌다. 게임에 몰두한 동안엔 내가 방콕에 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었음을 이 자리에서 고백한다.
쇼핑몰을 나와 코리안타운이 있는 스쿰빗 소이 12를 따라 걸었다. 콘도, 레지던스가 즐비한 이 좁은 거리에도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방콕엔 정말 나무가 많다. 가끔은 아주 거대한 나무 위에 지어진 도시, 그래서 땅을 뚫고 가지가 뻗어나온 도시 같기도 하다. 콘도 사이에 난 길로는 노천에서 벌어지는 현지인의 삶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여유롭기도 했다. 길을 음미하며 천천히 걸었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무방했다. 그냥 걷는 게 좋았다. 땀은 여지없이 솟아오르고 갈증도 났지만, 길 위에서 행복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일종의 시상 같은 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제 카오산 로드에서도 느꼈던 '말문이 막힌' 느낌. 단어의 우물이 바닥을 드러낸 기분. 그게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마 마음이 더 물렁물렁해지면 이 답답함도 사라지겠지. 언제고 이 도시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더 좋은 문장으로 옮길 상태로 올라가겠지. 반드시 그럴 수 있으리라고, 나는 나를 믿는다.
갈증을 풀기 위해 길 중간쯤 있는 도이창 커피에 들렀다. 커피값도 저렴했고 맛도 괜찮았다. 노트를 정리하면서 커피는 두 잔을 마셨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라바나가 유명한 스파 체인이라고 해서 그동안 D는 마사지를 받았다. 나는 해가 질 때까까지 바깥 자리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을 구경하며 글을 썼다. 끝내 모기에 쫓겨 실내로 들어왔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걷는 것 못지 않게 좋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항상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멈추거나 걷거나. 어쨌거나 느리게 사는 것. 그것이 방콕을 즐기는 최선의 속도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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