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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야간열차를 탈 시간이었다. 유럽 배낭여행 이후로 야간열차는 처음이었다. 몇 번 기차역을 오가며 보았던 기차들은 대체로 컨디션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D가 짐을 맡기고 받은 영수증을 잃어버려 약간의 헤프닝을 거쳐 짐을 찾은 후, 밤에 먹을 햄버거와 콜라, 비누와 수건 등을 샀다. 한 시간 전에도 탑승할 수 있길래 객차에 올라봤는데 이등석 에어컨 쿠셋을 예약한 덕인지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오히려 에어컨이 너무 세서 밤에 어지간히 춥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초록색 커튼을 걷어 위 칸에 짐을 올리고 시범 삼아 가만히 누워보았다. 유럽에서 탔던 위 칸보다 훨씬 넓고 아늑했다. 이건 거의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여행자들과 현지인들이 간식거리를 들고 하나씩 들어와 침대 위에 올라가더니 커튼을 치고 눕기 시작했다.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깊은 인상을 받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추웠다!
나와 D는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간단히 세수를 한 뒤 자리에 누웠다. 원래 술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더 일찍 잠들었던 것 같다. 하나씩 지급된 덮는 이불은 따뜻했지만, 까칠까칠하기도 했다. 다행히 건조하진 않았다. 추운 건 옷을 하나 덮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이 잘 오지 않는 건지 잠이 잘 오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 했던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열차가 너어어무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깜빡 잠들었다가 열두 시 반이 조금 넘어 깨어났는데 열차가 너무 흔들려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난기류를 통과하는 비행기를 탄 기분이었다. 이대로 옆으로 쓰러져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을 것도 같았다. 그렇게 삼십 분 정도 깨어있다가 다시 잠이 들었고, 다시 두 번 정도 더 추워서 깨긴 했지만 이후로는 아침까지 푹 잘 수 있었다. 술도 안 마시니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었다. 어찌 됐든 버스가 아닌 기차로 치앙마이에 가기로 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다만 시간이 문제였다. 저녁에 출발하는 기차는 12시간, 밤 10시에 출발하는 우리 기차는 무려 15시간에 걸쳐 치앙마이로 향했다. 그래도 밤중에 이동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니 손해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기차는 버스보다 낭만이 있으니까.


그 아침, 열차에서 본 것들. 색이 바래고 긁힌 둥근 천장. 무릎까지 닫혀있는 초록색 커튼. 진동에 따라 흔들리는 철재 고리. 이미 비어버린 침대. 어느새 누군가 들어간 침대. 이불을 개는 승무원. 느긋하게 아침을 먹는 승려. 탁자를 설치하는 아주머니. 뜯긴 채로 버려진 과자 봉지. 아무 일 없이 난간에 누워있는 내 파란색 가방. 얌전하게 나를 기다리는 내 파란색 신발. 조금의 밭은 기침.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출렁이는 아찔한 시선. 피부로 볼 수 있는 맹렬한 에어컨 바람. 창문 밖으로 흘러가는 울창한 산림. 노란 평원. 이름도 모를 어느 작은 역. 그 옆에 펼쳐진, 땅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의 삶. 저 멀리 덩그러니 놓인 오두막.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뿔이 난 소. 창밖의 모든 것을 쓰다듬고 있는 강렬한 아침 햇살.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리는 열차.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은 저렴한 객실에서 몸을 일으키는 서양 여행자들. 그들은 땀이 나지 않는 건지 궁금해 지는 나의 표정. 거대한 배낭, 육중한 몸들. 슈퍼맨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아이. 그 아이에게 "슈퍼맨"이라고 농을 던지는 승려. 그가 들고 다니는 아이폰과 캐논의 카메라. 이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승무원. 잠에서 깬 D. 에어컨 칸이 추운지 선풍기 칸으로 옮겨 간 호주 커플. 아직 도착 시각까지 한참 남았다고 선고하는 시계. 창문 없이 시원하게 밖을 볼 수 있는 화장실. 변기 아래로 스쳐지나가는 무명의 철로. 도대체 이 많은 양을 다 어디다 싣고 가는 건지 궁금할 만큼 콸콸 잘 나오는 물. 내가 손바닥에 일으킨 거품. 푸석푸석한 피부. 참 멋 없게 자라는 수염. 갑자기 떠오른 어제 사놓고 먹지 않은 KFC 햄버거. 반나절이나 지나 영 맛이 없던 그 햄버거.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덴버로 히치하이킹을 하는 샐의 여행. 그 여행에 비하면 편하고 풍족하기 그지 없는 나의 여행.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상상. 내가 잘 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의심. 그와 상관없이 창밖으로 지나가는 미지의 마을들. 드디어 가까워지는 치앙마이. 제대로 닦인 차도. 짐을 챙기는 승객들. 그리고 뜨거운, 정말 뜨거운 태국 북부의 햇살. 그 한낮, 열차에서 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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