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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딱 반이 되는 오늘, 루앙 프라방을 떠나 방비벵으로 향한다. 이젠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이곳에서의 생활은 한국에서의 그것보다 규칙적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몸은 제일 안 좋았다. 한 차례 감기가 몰려들고 체기도 스쳐 지나가더니 이제는 햇빛 알레르기가 남았다. 오히려 밤늦게까지 놀고 오후 늦게 일어나는 패턴이 더 잘 맞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밤부터 새벽까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렸다. 배를 타는 것보단 낫겠지만, 하필 버스를 타는 날 이렇게 많은 비가 내린다니. 그러고 보면 이번 여행에선 타볼 수 있는 교통수단은 다 타보는 것 같다. 비행기, 열차, 배에다가 버스까지.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씻고 짐을 정리하고 앉아있으니 툭툭이가 우리를 태우러 왔다. 정든 숙소 직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서늘한 아침을 달렸다. 버스 터미널은 그리 멀지 않았다. 툭툭이에서 내렸을 때, 어릴 적에 보았던 지방의 시외버스 터미널이 눈앞에 그대로 되살아났다. 행선지에 따라 나뉜 창구 앞에 쭉 늘어선 대기석. 그 위에 햇빛과 비를 막기 위해 쳐진 거대한 함석지붕.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낡은 현대 자동차의 버스가 대합실을 향해 비스듬히 코를 박고 있었다. 게다가 그 버스 위에는 오토바이 한 대까지 실려있었다. 눕히지도 않고 세워서 줄로 꽁꽁 묶어놓은 모습을 보고 저걸 어떻게 올리고 내리는지, 넘어질 위험은 없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9시 30분 출발이었는데 버스가 나타난 건 10시가 넘어서였다. 이층 버스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복층 버스라고 해야 맞겠다. 밑에는 운전석과 짐칸이 있고 승객은 모두 위에 앉는다. 날이 흐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버스 천정에 달린 환풍구 문은 닫혀있지도 않았다. 유심히 지켜본 바로는, 버스 유리창이 깨진 차량이 대부분이었는데 다들 그걸 고치겠다는 생각보다는 총알을 맞은 것 같은 스티커를 붙여 위트로 넘기고 있었다. 낙천적인 심보였다. 그런데 버스가 출발하고 십여 분 달려보고 나서야 나는 그 모든 허술함의 이유를 알게 됐다.
루앙 프라방에서 방비엥까지 VIP 버스를 탔을 경우 걸리는 시간이 7시간에서 9시간이다. 얼핏 표지판을 보니 수도인 비엔티안까지의 거리가 350km가 채 안 되는데 그 중간에 있는 방비엥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리나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유가 있었다. 꼬불꼬불한 산길에다가 도로는 2차선이었고, 그마저도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도를 낼 이유가 전혀 없었고, 창문의 균열이 더 커질 일도 없었다. 버스는 슬로우 보트보다 느리게 달렸다. 그리고 그렇게 달려주는 데 고마웠다. 강원도의 산길, 마치 여섯 시간 넘게 진부령이나 미시령을 계속 오르내리는 기분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커다란 뱀이 기어가고 난 흔적 같은 산길은 분명 끔찍한 코너의 연속이었다. 길 옆은 낭떠러지고, 비는 추적추적 내렸다. 도로가 얼마나 미끄러울지 만져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게다가 상황이 더 나아지기는커녕 누런 안개까지 끼면서 늪지대를 헤매고 다니는 착각마저 일었다. 부디 1층 운전석에서는 바깥이 잘 보이기를.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대충 닫아둔 환풍구에선 비가 조금씩 새기 시작했다. 와우, 슬로우 보트를 타면서도 느끼지 않았던 생명의 위협을 버스에서 느끼다니. 잠들지 않은 다른 승객들 역시 불안한 눈초리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저 까마득한 산길 아래로 글러 떨어지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어느 고산지대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나자 해가 떴다. 그나마 미끄러운 길을 달리는 것보단 다행이었지만, 롤러코스터 레일 같은(아니 가장 위험한 롤러코스터조차 이렇게 레일을 설치하진 않을 것이다.) 도로 상황은 여전했다. 그렇게 오후 서너 시가 넘어가야 겨우 일직선으로 달릴 수 있었다. 좌우로는 알프스에 온 듯한 거대한 산맥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오두막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나마 고도가 낮아지자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차도 위를 돌아다니는 소도 보고, 거의 발가벗은 채로 뛰어다니는 천진난만한 아이들도 본다. 우리가 탄 차에는 뭔가 이상이 있는 게 분명했다. 평지로 와도 속도를 내지 않는 건 마찬가지고, 에어컨의 강도는 턱없이 낮아져 해가 떨어져도 실내는 후끈했다. 분명 라오스 내에서 움직이는 모든 교통수단 중 만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걸 참작하고 이 낙후된 지역을 다니기에, 보이는 마을은 한국의 시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룬다는 점만 추가됐을 뿐이랄까. 그게 솔직한 감상이었다. 한 가지 미소를 짓게 하는 게 있다면 거리에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마냥 즐거운 그들의 표정이 나에게 힘이 되었다. 팔에 난 땀띠 같은 두드러기는 점점 심해지고, 얼른 차가운 물로 몸을 식히고 싶다. 방비엥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는 순수한 감상으로 뭔가를 이야기할 수는 없겠다. 그건 현재의 내 감상을 배반하는 짓이다. 아마 한참 나중에야, 집에 돌아가고 나서야 이곳에서의 시간을 제대로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까지 나는 더위에 지친 개처럼 헥헥거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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