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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와 늘어지게 낮잠을 잔 후, 오랜만에 저녁 산책을 나섰다. 손님이 아주 많은 식당에서 그저 그런 식사를 비싼 값에 먹고 나오는데, 꽝시 폭포에서 만났던 홍콩 친구 데이지가 팬 케이크를 먹으며 걸어오는 걸 보았다. 우린 즉시 서로를 알아보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오늘 루앙 프라방을 떠나 방비엥에 도착한 그녀는 스위스 친구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자는 숙소보다 훨씬 비싼 우리의 숙소 때문에 그녀는 항상 우리를 '리치 가이'라 부른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고,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이다. 그녀는 아베크롬비 앤드 피치 매장에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벌었고, 우리 역시 각자의 직장에서 경비를 마련했다. 하지만 학생인 그녀와 직장인인 우리 사이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도 내가 번 돈을 탈탈 털어 이 여행을 떠나왔고, 당장은 그녀에 비해 내가 가진 돈이 많을지는 모르나 결정적으로 나에게 부족한 건 시간이다. 이제 겨우 열아홉, 우리 나이로 스무 살인 그녀다. 내가 스무살 때, 해외여행은커녕 국내 여행조차 꿈꾸지 못했던 걸 기억한다. 하지만 그런 차이를 굳이 그녀에게 이해시키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직장인인 내가 학생인 그녀보다 돈이 많은 건 사실이고, 한국에 비해선 훨씬 저렴한 숙박 비용(게다가 둘이 나눠 낸다. 그 점이 중요하다.) 때문에 눕는 자리라도 편하게 정하자는 게 우리의 모토이니, 나는 그녀의 농담에 쓴웃음만 지었다. 무엇보다 나 또한 집으로 돌아가면 그녀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빈털터리가 되고 말 테니까. 하지만 어떠랴.
그녀의 룸메이트가 그녀에게 연락을 하기 전까지 우린 함께 다니기로 했다. 주변을 둘러보려다가 오후 8시에서 9시까지 사쿠라 바에서 무료로 술을 나눠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곳으로 갔다. 거기엔 우리와 데이지를 포함해 꽝시 폭포로 가는 길에 만났던 한국 청년들도 있었다. 오늘 카약을 타며 팔이 새카맣게 탄 대학생들은 다른 한국 친구들과 춤을 추다가 우리에게 인사했다. 이때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세상은 넓지만, 사실 세상은 좁다. 결국 만날 사람들은 모두 만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한 시간 후에 만날 또 다른 친구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사쿠라 바는 역시 호황이었다. 어제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무리가 술잔을 들고 어슬렁거리며 흥분해 있었다. 한편으로 여기엔 애처로운 면이 있다. 마치 이 도시에 오면 파티를 즐겨야 한다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만나고 또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그런 의무감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비극을 신경 쓰지 않고, 우리 역시 개똥만큼도 개의치 않는다.
어제 이미 서로의 맥주잔에 탁구공을 던져 넣어 그 잔을 마시게 하는 핑퐁 비어에 대해 설명했던 것 같다. 우리도 그 게임을 하기로 했다. 맥주 한 병을 사서 테이블에 컵을 세팅하는데 태국에서 온 한 무리가 겨루자고 도전해 왔다. 여섯 잔의 플라스틱 컵에 각자 준비한 맥주가 담겼다. 우리는 서로의 진영을 향해 탁구공을 던졌다.
이 게임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 장본인은 역시 D였다. 상대의 여섯 잔 중 무려 네 잔에 탁구공을 넣었다. 한 잔은 데이지가 넣었고, 결국 우리가 역전패를 당했기 때문에 나머지 한 잔은 해치우지 못했다. 난 더럽게 못 했다. 비참할 정도였다. 연방 플라스틱 컵의 매끈한 모서리만 맞췄을 뿐, 단 한 번도 성공시킨 적이 없다. 중간에 한국 동생들이 참여해 공을 던졌으나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우리는 패배했고, 어차피 벌칙으로 각자의 맥주는 다 마셨으니 악수를 하며 키가 크고 잘생긴 태국인들에게 패배를 인정했다. 그거 좀 던졌다고 몸에서 열이 다 났다.
한 잔씩 다 비우자 이번엔 아이리쉬 펍에 가고 싶어졌다. 춤 추는 걸 좋아하는 데이지는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아직도 그녀의 룸메이트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쿠라 바를 나오려는데, 이럴 수가, 입구 바로 앞에서 라오스까지 슬로우 보트를 타고 오는 도중에 만났던 브라질 청년 앤더슨(이제야 이름을 알게 되었다.)을 만났다. 필연이나 다름없는 우연에 우린 또 반갑게 인사했다.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마치 오랜 친구를 타지에서 만난 기분이었다. 데이지는 워낙 붙임성이 좋아 그와도 금방 친해졌고, 우리보다 훨씬 영어가 뛰어난 그이기에 오히려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앤더슨은 오늘 함께 튜빙을 하며 만난 태국인 여성과 함께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도도한 그녀는 남들과 섞이고 싶지 않은 기색이었다.
키가 크고 마른 앤더슨은 사쿠라 바처럼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는 곳보다 우리가 가려던 아이리쉬 펍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다섯 명이 된 우리 일행은 그곳으로 향했다. 내일 일찍 비엔티안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 태국 여성(이름을 듣긴 했으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과 앤더슨은 술을 마시지 않았고, 칵테일 두 잔을 마시면 한 잔을 공짜로 주기 때문에 나와 D가 진토닉을 시키고 추가 한 잔을 데이지에게 줬다. 이후로는 태국 친구를 제외한 네 명만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의 언어로 간단한 표현을 배우고("멋있어요", "예뻐요.", "사랑해요.", "죽이지 마세요(?)." 등등), 서로의 여정이 얼마나 긴지, 지금까지는 어땠으며 앞으로는 어떤 곳으로 갈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새침하게 아이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태국 여성을 제외하고 몇 살인지도 들었다. 앤더슨은 스물일곱, 데이지는 열아홉(!)이었다. 한국 나이로 치자면 스무 살인데 작년에는 남아프리카를 다녀왔을 정도로 여행을 많이 다니는 모양이었다. 와우, 그 나이에 난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인데! 앞으로의 일정도 재미있었다. 나와 D는 라오스에서 그녀가 여행을 시작한 베트남 하노이로 갈 예정이고, 그녀와 앤더슨은 곧 라오스 남부에 있는 4000 아일랜드에 갈 예정이었다. 여기서 헤어져도 두 사람은 또 그곳에서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넓지만, 사실 세상은 좁다.
약간 술에 취한 데이지가 게임을 하나 제안했다. 일종의 진실게임이었다. 각자 세 가지씩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두 가지는 진실이어야 하고, 한 가지는 거짓("bullshit")이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세 가지 중 무엇이 거짓인지 맞추는 게임인 것이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데 효과적인 게임이었다. 첫 타자는 나였다. 나는 스포츠를 싫어하고, 여자친구가 두 명이 있으며, 고수만 빼면 타이 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물론 두 번째가 거짓이었다. 반응이 좋았다. 앤더슨은 당연히 두 번째가 거짓일 거라고 했고, 데이지는 세 번째가 거짓일 거라고 했다. 아니, 이 양반이! 사실 웃겨보자고 한 이야기였으니까 효과는 있는 셈이었다. 난 당연히 여자친구는 M 한 명이고, 난 바람둥이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내 이야기를 하고 나자,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서로를 알았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다음은 앤더슨 차례였다. 그는 개를 좋아하고, 이번 여행에서 두 번의 키스를 했으며, 세 번째로 형제 한 명이 있다고 했다. 나는 세 번째를 고르려다가 두 번째가 거짓이라고, 당신이라면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네 번은 했을 거라고 농담을 했다. 이럴 수가. 진짜로 두 번의 키스를 했다는 그의 말이 거짓이었다. 키스를 하긴 했는데 한 번이었던 것이다. 그는 카오산 로드 근처에서 한 미국 친구와 종일 함께 다니다가 키스했다고 털어놓았다. (칠레 여성분하곤 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었다.) 이야, 대단한데. 다음은 데이지 차례였다. 그녀는 독일 남자와 사귄 적이 있고, 이번 여행에서 두 번의 키스를 했으며, 세 번째로 스포츠를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역시 두 번째가 거짓이었다. 그녀는 벌써 세 번의 키스를 했던 것이다. 베트남에서 두 번, 루앙 프라방에서 한 번. 역시 남미와 홍콩 스케일은 다르다. 대단한 친구들이다. 그리고 데이지가 독일 사람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과 (그들의 문화가 좋다고 한다.) 작년에 남아프리카로 여행을 갔을 때 만난 독일 남자와 잠깐 교제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남자는 심지어 홍콩까지 찾아와 일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겐 부담이 됐고, 그가 독일로 돌아가자 아무래도 장거리 연애는 녹록지 않아서 결국 헤어졌다고 했다. 이제 스무 살인데 참 많은 경험을 했다 나에겐 진정 그녀야 말로 '부자'로 보였다. (D는 세 가지 이야기 중 자신이 게이라는 거짓말을 섞었는데 모두가 '일부러'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아 곤혹(?)을 치렀다. 하지만 그의 여자친구 L을 여행 중에 사귀었다는 이야기로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한 바퀴가 돌자 앤더슨에 관해서도 꽤 많은 걸 알게 됐다. 삼 년 반 정도 사귄 여자와 이 년 전에 헤어진 이후로 아직 누구도 사귀지 않은 그는, 브라질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그리고 주짓수를 삼 년 동안 배웠다고 한다. (점점 그가 멋있어 보였다. 그는 우리에게 간단한 호신술도 알려주었다.) 문무를 겸비한 반듯한 청년인 것이다. 그는 이번 사 개월의 여행을 위해 일을 때려치우기까지 했다. 그 이후는, 글쎄, 자기도 모르겠다고 한다. 스물 일곱. 이십 대 중반. 그도 뭔가를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내 이야기도 하게 됐는데, 작가가 되는 것이 내 꿈이라고 밝혔다. 무엇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으냐는 물음에 소설과 에세이라고 답하자, 이번엔 무엇에 대해 쓰려느냐는 물음을 받았다. 삶, 사랑, 꿈. (사실 절망, 상실, 고독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곧, 무슨 이야기를 썼느냐는 질문도 받아서 난 더듬더듬 최근에 쓰고 있는 단편 소설의 시놉시스를 조금 알려주었다.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질문이라 당황하긴 했으나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주는 것이 새삼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느끼게 됐다. 그것도 생판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이다. 집으로 돌아간 그들이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한 재미있는 한국 남자로 기억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다음으로는 각자 중요하게 생각하는 다른 사람의 '성격' 다섯 가지를 대보기로 했다. D는 예의 바르고 사교적이면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꼽았다. (미안, 나머지 두 가지는 기억나지 않아.) 데이지는 열정적이며 사교적이고, 잘 웃는 사람을 꼽았다. 앤더슨 역시 친화력이 있고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며, 무엇보다 정직함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물을 좋아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분명 마음을 터놓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반면 데이지는 동물을 아주 싫어한다고 해서 모두를 웃겼다. 그 냄새와 털이 싫다나? 확실히 앤더슨과 데이지는 많은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확실히 기억하건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생각이 깊지만 어딘가 미친 구석이 있고, 책 읽기를 좋아하며 자신감이 있는, 그리고 끊임없이 추구할 수 있는 꿈이 있는 사람이 좋다고. 단순한 질문에 나 스스로 어떤 인간상을 중요시 여기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격 다섯 가지를 묻는 이 질문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음에 또 누군가를 만나면 나도 꼭 그 질문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자,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상 다섯 가지는 무엇인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야 솔직한 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턱없이 먼 대양을 건너기 위한 작은 가교 하나 정도는 놓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일상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 것과 여행 중에 이런 질문을 받는 것 사이엔 차이가 있겠지만, 같은 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다섯 가지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열두 시가 되자 바가 문을 닫았다. 다시 거리로 나온 우리는 팬 케이크를 사서 나눠 먹었다. 거리는 훨씬 어두워져 있었지만, 여행자든 방비엥 주민들이든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은 많았다. 그 삼거리에서 앤더슨과 데이지는 왼쪽으로 우리는 오른쪽으로 향했다.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했고, 아마 우린 또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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