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 식당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 기쁘다. 터미널 21 건너편 쪽 골목길 안에 자리 잡은 이곳은 태국 음식을 저렴하고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이름 높다고 한다. 시설은 낡고 그리 위생적으로 보이지도 않지만, 종업원들이 친절했고 영어도 곧잘 했다. 이곳 역시 현지인보다 외국인이 훨씬 많은 장소이기도 했다. 거의 빈자리가 없었지만, 운 좋게 안쪽으로 안내를 받았다. 팟타이와 푸 팟 퐁커리, 그리고 태국 위스키인 쌩쏨과 소다수를 주문했다. 물론 고수는 넣지 않았다. 고수만 빼면 나는 태국 음식이 꽤 잘 맞는 편이다. 특히 특유의 길쭉하고 찰기 없는 쌀이 좋다. 진밥보단 된밥을 좋아해서 그럴까. 팟타이는 달지 않고 오히려 시큼한 편이었고, 푸 팟 퐁커리는 입맛에 잘 맞았다. 오히려 D가 태국 음..
15.3.30. Day 3. 셋째 날에도 느즈막이 일어났다. 정오에 맞춰 놓은 알람에 정신이 들었다. 밤새 에어컨이 꺼지면 땀이 날 정도로 덥고, 에어컨이 움직이면 오싹오싹해져 여러 번 깼던 모양이다. 담배를 꽤 피운 탓에 목도 칼칼했다. 담배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지만, 이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 있으면 담배를 피우지 않을 수도 없다... 흡연만 하지 않아도 얼마나 건강한 몸으로 여행할 수 있을는지. 가지고 있는 것만 다 피우면 여행 중에 금연해 보는 건 어떨까 한다. 두 시쯤 호텔을 나와 유명한 쇼핑센터인 터미널 21로 향했다. 공항 터미널을 테마로 한 이곳은 각 층에 세계 각국의 도시 이름을 붙이고 그 도시에 맞게 실내를 꾸민 - 심지어 화장실까지 - 놀라운 콘셉트를 보여줬다. 동남아시..
어스름 즈음에 바를 나와 우리는 카오산 로드 주변을 걸어 다녔다. 우리에게도 목적은 있었다. 해가 떠 있을 때는, 그러니까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보며 꼭 먹어야 할 것을 먹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던 것이다. 맥주를 마셔서 그리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천천히 저녁거리를 생각할 때였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온갖 식당과 펍과 카페와 숙소가 즐비했고, 왜 사람들이 카오산 로드에서 몇 주, 몇 달씩 체류하는지 알 것 같았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거리 전체가 보물 창고나 다름없었다. 골목 골목은 여러 구획으로 나뉜 창고의 저마다 다른 열쇠였다. D의 능력을 다른 글에서는 여러 번 밝혔긴 했으나 여기서 다시 한 번 언급하자면, 그는 현재 위치에서 우리에게 꼭 맞는 장소를 ..
카오산 로드의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밀림 속의 거리, 밀림에 온 도시인들의 축제, 그리고 선명, 선명, 또 선명한 원색의 향연. 그 이상의 표현은 나에게 오랫동안 숙제가 될 것 같고, 그래도 실마리가 풀리지 않으면 다시 오면 그만일 것이다. 우리가 걷는 곳은 정확히 말하자면 카오산 로드의 옆길, 그보다 훨씬 모든 것이 밀집한 거리였다. 수십 년 넘게 자란 듯한 나무가 가지로 건물을 쓰다듬고, 덩굴은 건물에 달라 붙어 공생하며, 음악은 스피커로 스며들고 사람들은 고향에선 노출하기 힘든 부위까지 드러내며 열기를 흡수한다. 펍이나 카페 의자에 앉아 길을 바라보며 앉은 사람들은 지나가는 다른 여행자를 구경하거나 책을 읽거나 멍한 시선으로 사색(또는 무념)에 잠겨있다. 비가 그치고 요란한 등장음과..
차툭착 시장이 주말에만 열리다기에 첫 행선지로 잡았다. 고가 철도로 달려 방콕을 순식간에 미래 도시로 탈바꿈시키곤 하는 BTS를 타고 마지막 역까지 가자 어마어마한 인파를 만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씩 옷이나 가방이든 비닐 봉지를 들고 있고, 거진 치진 표정이었다. 많이 덥진 않았지만, 햇살과 그 햇살을 반사하는 얼굴 때문에 나도 익어가는 기분이었다. 골치가 아플 정도로 많은 물감을 짜놓은 것 같은 녹음과 남대문 시장이나 홍콩의 스탠리 마켓을 연상케 하는 재래 시장의 부조화가 기가 막혔다. 인도를 따라 노상 식당이 진을 쳤길래 아무 자리에나 앉아 점심을 먹었다. 고수가 들어간 것만 빼면 갈릭 포크 라이스는 아주 먹을 만했다. 고수를 갈아넣지는 않은 덕분에 심혈을 기울여 한 잎 한 잎 씩 걸러낸..
새벽녘 각자 침대에 들기 전, D가 한 가지 제안했다.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호텔이 있는 골목길 건너,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오자는 거였다. 대체로 집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여행 중에 하려고 하지만, 나와 D는 평소 하던 일들을 타지에서도 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 봤자 거창한 건 없고, 맥도널드에 간다거나 스타벅스에 간다거나 하는 일들이 - 음주를 포함하여 - 그렇다. 국가별 물가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주는 코카콜라 지수라던가 맥도널드 지수 따위를 실제로 체험해 보려는 것이다. 한국과 몇백 원 단위로 미묘하게 가격이 다른 메뉴판을 올려다 보면 그 반사작용으로 이곳이 고향과는 다른 땅이라는 실감이 나곤 한다. 동시에 맛만은 기가 막힐 정도로 똑같다는 데 놀라면서 말이다. 앞으로 태..
공항에 누가 배웅을 나온 건 처음이었다. 공항철도 개찰구에서 친구 Y가 전날 과음으로 인한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나는 그도 우리와 함께 떠나는 줄로만 알았다. 나와 나의 동행자 D는 친구의 등장에 감격한 나머지 진심으로 같이 떠나자고, 비행기 삯은 우리가 댈 테니까 당장 출국 준비를 하라고 부추겼다. 좀 더 강하고 달콤하게 밀어 붙였다면 거의(?) 설득할 수도 있었겠지만, 신혼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부인의 존재감을 넘어설 순 없었다. (아니, 넘어설 수 있었다고 해도 Y에겐 일단 여권부터 없었다.) 꼭 오지 않아도 될 배웅길을 한 시간 반 씩이나 걸려 와준 그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공항 내 바에서 파는 모히또와 퀘사디아를 대접했다. 남국의 정취가 그대로 담긴 대나뭇살 의자..
서울에 봄이 오고 있다. 강변에 잠들었던 가지에선 아주 천천히 하품을 하는 사람처럼 꽃이 핀다. 이 도시는 이제 한해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시민들을 매혹할 것이다. 사람들은 한결 가벼워진 외투를 입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강으로, 산으로, 공원으로 나아갈 것이다. 기상 캐스터는 스크린에 펼쳐질 봄꽃에 지지 않으려고 밝은 원색의 옷을 입을 것이고, 그 어떤 정치적 쟁점이나 끔찍한 사고 소식보다도 중요하다는 듯 벚꽃의 개화 시기를 점칠 것이다. 이 도시의 봄이 아름답다는 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점점 짧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 봄은 더 강렬하다. 그 봄을 만나지 못하고 나는 이제 우기가 시작되는 도시로 떠난다. 한낮의 기온은 이십 도나 더 높고, 습기에 묶여 열기가 빠지지 않는 도시로 이동한다. 그곳..
그렇다. 여행 카테고리가 또 생겼다. 맺음 하지 못한 이야기가 수두룩한데 또 꾸역꾸역 판을 벌여놓았다. 무책임한 처사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내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도 비슷한 짓을 반복하고 있으니까 사실 개의치도 않을 것이다. 스스로 지적하고 아무렇지 않게 그 목소리를 무시한다. 그게 나의 일이다. 28일간의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그랬다. 거의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세 나라(그마저도 확실하진 않다)를 가는데도 알아본 건 비자 문제뿐이었고, 대충 무비자로 다닐 수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나서는 나 몰라라 했다. 오히려 가서 읽을 책(M이 사준 책이다), 가서 글을 쓸 노트(이것도 M이 사줬다), 가서 들을 노래를 고르는 게 더 고민스러웠다. 아니,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아니면 가기 전에 ..
책을 읽으면 그것의 제목과 저자, 그리고 다 읽은 날짜를 적어두곤 한다. 한해의 마지막 즈음에 목록을 훑어보면 그해 내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한눈에 들어오고, 그 책을 읽던 시기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떠오른다. 책으로 기억을 환기하는 일은 즐겁다. 몇 개월 동안 한 작가의 책만 줄창 읽었던 시기는 당시 내가 어떤 골칫거리를 안고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작가들은 나를 철저하게 벽으로 밀어붙였고, 나는 정신에 세게 몇 대 얻어맞으면서도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다. 주제 사라마구, 알랭 드 보통, 버트런드 러셀과 조지 오웰, 프란츠 카프카,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김연수,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와 밀란 쿤데라. 물론 여기에 다 적지 못한 다른 작가와 시인, 여행가들도 모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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