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앙 프라방에서 삼 일째를 맞이하자, D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쭉 돌면서 가다 서기를 반복하자, 마침내 이곳에 길이 드는 것 같다. 어제가 스쿠터의 날이었다면, 오늘은 스쿠터를 빼앗기는 날이었다. 오늘 오후 7시에 반납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제 오후 7시까지였고, 아침 열한 시쯤 직원이 스쿠터를 찾으러 온 것이다. 아침부터 스쿠터를 타고 시내를 크게 한 바퀴 돌고 오겠다던 D의 꿈은 무너졌다. 기름을 단 한 칸도 쓰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라니. D가 직원에게 기름이 꽉 채워놨다고 말하자 그 직원은 내일 이 스쿠터를 빌리는 사람이 럭키라며 농담을 했다. 그래, 좋겠다, 그 누군가는. 그래서 오늘은 D도 자전거를 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쿠터를 타다가 많이들 다친다는 어제..
본격적인 루앙 프라방에서의 일정을 쓰기에 앞서 난감한 마음뿐이다. 우리가 루앙 프라방에서 머문 시간은 4박 5일로 방콕만큼이나 길었지만, 한 일이 거의 없을 정도다. 조식이 포함이라 매일 아침을 먹고, 조금 뒹굴다가 마실을 나가고, 저녁이 되기 전에 들어와 쉬다가 다시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그리고 밤 10시도 되지 않아 들어오길 반복했던 것이다. 루앙 프라방 둘째 날인 오늘의 특별 행사라면 D의 스쿠터와 나의 자전거라고 할 수 있겠다. 어제 좀 다녀봤더니 도저히 걸어 다녀선 체력이 안 될 상황이라 리셉션에 말해 스쿠터를 한 대 빌렸다. 난 한 번도 스쿠터를 타 본 적이 없고, D는 중학생 시절에 이미 배워뒀다고 한다. 위험하지는 않을까 좀 망설여지긴 했지만, 이 도시의 주요 교통수단은 스쿠터다. ..
그렇게 우리는 루앙 프라방에 도착했다. 오히려 예상보다 빨라 7시간 반 정도 걸린 모양이었다. 갑자기 배가 멈추더니 뒤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이곳이 루앙 프라방이라고 알려주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드디어 라오스 여행의 시작이 아닌가. 부푼 가슴을 안고 선착장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처음부터 우리를 맞이한 건 도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송태우 티켓을 사는 작은 석재 건물이었다. 일인 당 2만 낍에 티켓을 사야 하며, 도저히 걸어갈 수는 없는 거리였다. 원래 선착장이 중심지에서 가깝다고 알고 있었던 우리는 당황스러웠고,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보였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라오스 돈도 부족해 일부는 달러로 계산했다. 턱없이 낮은 환율을 적용 받았다. 안 그래도 화폐 단위가 우리나라보다..
배가 9시쯤 출발한다고 해서 오늘도 일찍 일어났다. 머리가 좀 아프긴 했지만, 교복을 입고 스쿠터를 타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내려다 보니(방이 2층에 있었다.) 이곳이 천국이구나 싶었다. 라오스는 스쿠터를 몰 수 있는 연령 제한이 매우 낮은 모양이었다. 집과 학교가 꽤 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간밤에 어디서 잤는지 모를 여행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선착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대열에 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미리 바게트 샌드위치를 주문해 점심 대비를 하고, 물을 샀다. 오늘은 더 긴 슬로우 보트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끝에 루앙 프라방이 있기도 했다. 오늘 탄 슬로우 보트는 전날보다 더 작은 배였다. 여정이야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침엔 쌀쌀하더니 정오에 가까워지면서 겉옷을 벗..
전편에서 "몇 시간 동안 계속될 항해가 몹시 기대됐다."라고는 썼지만, 결론적으로 슬로우 보트 여행은 어마어마한 여정이었다. 일단 너무 더웠다.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바람이 번갈아 불어왔고, 때로는 공기가 미동조차 하지 않아 온실로 들어온 비참함을 느끼기도 했다. 의자도 그리 편하진 않았고, 사람들은 무지막지하게 많았다. 게다가 뒤에 앉았더니 모터 소리가 무진장 요란했다. 소리는 시속 100km인데 그에 비해 효율이 너무 적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후미에서 담배는 마음껏 피울 수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서양인 동양인 할 것 없이(서양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시간이 갈수록 지쳐 간다는 게 느껴졌다. 의자에 드러눕고, 발을 난간에 올리고, 끊임없이 차가운 맥주를 사 마시고, 아예 후미에 모여 앉아 라오..
어제 일정 중 가장 일찍 일어났다고 했지만, 오늘 그 기록을 경신했다. 무려 여섯 시 반에 일어난 우리는 국경을 넘어 배를 탈 준비를 했다. 아침은 시원했지만, 정오 이후에 몰아칠 더위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배를 타고 내려가며 몸으로 느낄 열기였다. 고수가 들어간 토스트를 아침으로 먹은 후, 어제 만났던 사람들과 다시 인사를 했다. 간밤에 새로운 일행도 와 있었다. 스위스에서 온 남자와 영국에서 온 여자. 꽤 붙임성이 좋고 잘 생긴 스위스 남자는 무려 7개월 동안 여행을 한다고 했다. 아마 그가 여행할 많은 나라 중에는 한국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라오스에서 15일간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는 우리를 제외하고 모두 도착 비자를 받을 준비를 했다.대단하다. 스위스를 제외하고는 심지어..
한국의 전원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은 길을 세 시간쯤 달려서 드디어 치앙콩에 도착했다. 치앙콩은 아주 작은 마을로, 다음 날 태국 국경을 넘어 라오스로 들어가는 여행자들이 주로 머문다. 밴은 우리를 치앙콩 주거리에서도 꽤 떨어진 게스트하우스에 내려줬다. 방 키를 배정하고, 내일 일곱 시 반에 아침 식사를 한 후 국경을 넘어 훼이싸이로 이동한다고 알려주었다. 운전자는 인내를 갖고 모든 이의 짐을 내려준 후, 담배를 한 대와 맥주 한 병을 집어삼키곤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갔다. 게스트하우스는 빌라 두 동이 붙은 구조였으며 아주 낡은 시설을 자랑했다. 키를 배정해 주거나 물과 맥주를 파는 아저씨는 굉장히 느린 속도로 일 처리를 했는데 약간 몸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무뚝뚝하긴 했지만, 이상하게 정이 가는 ..
책을 읽으면 그것의 제목과 저자, 그리고 다 읽은 날짜를 적어두곤 한다. 한해의 마지막 즈음에 목록을 훑어보면 그해 내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한눈에 들어오고, 그 책을 읽던 시기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떠오른다. 책으로 기억을 환기하는 일은 즐겁다. 몇 개월 동안 한 작가의 책만 줄창 읽었던 시기는 당시 내가 어떤 골칫거리를 안고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작가들은 나를 철저하게 벽으로 밀어붙였고, 나는 정신에 세게 몇 대 얻어맞으면서도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다. 주제 사라마구, 알랭 드 보통, 버트런드 러셀과 조지 오웰, 프란츠 카프카,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김연수,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와 밀란 쿤데라. 물론 여기에 다 적지 못한 다른 작가와 시인, 여행가들도 모두. 그..
나는 롯데리아에 앉아 반숙 계란 버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에 마신 술 때문에 늦잠을 잤고, 덕분에 아침도 먹지 못했다. 세상은 심심한 모양인지 때때로 빙글빙글 돌았다. 해도 거의 중천에 떠 있었지만, 내 눈엔 새벽이 막 지난 것처럼 거리가 푸른빛으로 코팅돼 있었다. 여행 첫날의 숙취가 떠올랐다. 도대체 인간이란 학습할 줄 모르는 동물인가 보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좀 자다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건 나 자신도 웃을 수 없는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숙취를 해소한답시고 햄버거를 먹는 버릇이 있다. 고기에 야채, 빵까지 다 들어있으니 몸에 좋지는 않을지언정 영양소 구색은 다 갖췄다고 믿어서다. 특히 햄버거엔 리코펜이 함유된 토마토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토마토가 없으면 최소한 토마토케첩이라도 들어..
생생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은 달콤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방을 복제하는 커다란 집에 모여 어울렸고, 매일 밤 새로운 손님을 맞아 포옹과 악수를 나눴다. 그곳에 들어가려는 희망자들이 입구에 장사진을 이뤘다. 그곳에는 꿈 밖에서 알던 사람, 꿈속에서 알던 사람들이 전부 있었다. 나는 생면부지이나 사실 생면부지가 아닌 이들을 차별 없이 대했다. 누군가는 방 하나를 꽉 채운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의미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표정도 가물가물하지만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끝없이 생성되는 방 안에 가득했다. 흥미진진해 죽겠는데 페이지가 한참 남아 든든한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술을 마셨다. 꿈에서 깰 시간이 되어도 이곳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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