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갔는데 에펠탑을 못 보고 왔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이 좁은 도시 안에선 어디를 가든 기어코 고개를 내밀어 자신을 드러낸 에펠탑을 볼 수 있으니까.사실 한국에서도 너무 쉽게 에펠탑의 모형이나 사진, 그림을 볼 수 있으니이만큼 친숙한 파리의 상징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파리를 다녀온 여행담에서 에펠탑은 그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일단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봤을 게 분명한데다가가까이 가면 너무 커서 제대로 보이지 않고,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파리의 전경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으며,매 정각 깜빡이는 조명도 몇 번 보다 보면 질리게 마련이니까."에펠탑 진짜 크고 예쁘더라."그 이상의 감상을 우리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인정해야겠다.사진만큼은 정말 많이 찍게 된다고.굳이 에펠탑이 ..
:: 재회 공항과 도심을 잇는 전 세계 공항 철도의 공통점은 두 가지다.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 그리고 다른 대중교통에 비해 비싸다는 것. 그들의 도시를 찾은 이가 쉽고 빠르게 시내로 들어와 호텔에 체크인하거나 회의에 참석하거나 관광을 시작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가 최신 기술과 미래의 디자인을 만나 탄생한 것이 바로 공항 철도다. 그런 점에서 홍콩의 에이이엘은 공항 철도의 대표주자라 할 만하다. 빠르기는 한국의 공항 철도도 만만치 않지만 감사할 정도로 저렴하기 때문에 좋은 의미에서 실격. 반면 에이이엘은 공항 버스보다 두 배 가까이 비싼 가격으로 제 권위를 유지한다. 두 번 타 봐서 익숙하다는 이유로 이번에도 철도를 이용했다. 캐리어를 안전하게 넣어둘 수 있는 보관대도, 흠 하나 없는 세라믹 코팅 벽면도..
고흐의 그림을 통해 가보지도 않은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교회가 친숙해졌지만 정작 캔버스에 그려진 인상적인 외관 때문에 교회 내부는 어떤 곳일까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불안한 길을 따라 걷고 있는 한 여인에 대해 더 궁금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곳은 아직도 마을의 종교적인 성소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며 익숙한 방식으로 인식되던 어떤 대상에게서 전혀 다른 면을 발견한 듯한 신선함을 느꼈다. 강압적이고 깐깐한 상사가 가정에서 다정한 태도로 아이를 대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나 매일 지나치던 골목길 안쪽에 관리가 잘 된 작은 공원이 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의 느낌처럼 말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저절로 몸과 마음이 차분해지며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으..
:: 전야제 종로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전집에 오늘따라 사람이 없다. 언제나 일 층은 물론 지하까지 만석이었는데 원하는 자리를 골라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와 Y는 가운데쯤에 자리를 잡고 D를 기다렸다. 평소 야근은 내 앞에 앉은 Y의 몫이지만, 여행 전날엔 불운의 여신이 항상 D의 편이 된다. 언제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D와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D는 홍콩 여행은 비행기를 타는 순간이 아니라 떠나기 전날 오후, 여기 서울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라 정의하곤 했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나와 Y의 상황에 입력한다면, 우린 지금 여행의 동반자가 짧은 휴가를 가는 와중에도 일거리를 잔뜩 챙겨 나온 꼴을 지켜보고 있는 셈이었다. 작년 9월에 홍콩으로 뜨기 전에도 셋이 술을 마셨다. 그땐..
아침 햇살이 비껴 반짝이는 우아즈 강변엔 어떤 특별한 장면이 있는 게 아니었다. 조깅을 하는 마을 사람들을 한둘 지나쳐 보내고 나면 다시 찬 바람과 정적이 그 자리를 채웠다. 너무나 한가해서 이대로 마을 어딘가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 늦잠을 청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천박한 간판도 없고 지나친 도태도 없이 오랜 세월 이대로 쭉 이어져 왔을 모습은 우리네 시외 작은 고장이 배웠음직한 미덕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빈센트 반 고흐가 마지막 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공동묘지에 동생과 함께 눕지 않았다면, 이 작은 마을은 이토록 널리 알려지지 못했으리라. 고흐의 엄청난 팬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의 수많은 그림과 그 만큼 수많은 편지를 보고 읽은 사람으로서 그가 걸었던 길 중 하나를 걷기로 했다. 작은..
그림은 실제로 눈앞에서 볼 때가 제일 좋지만 사진에 담아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 가지 각도로 고정되고 색온도에 따라 색감이 틀어져 원본과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림을 잘 못 그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림을 찍음으로써 위안을 삼자는 심산이기도 하지만. 피그말리온 효과까진 아니어도 가까이에서 찍은 그림은 그 자체로 한 장의 사진을 그림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액자 주변의 실사조차도 누군가 붓으로 그려낸 듯한 결과물로 바뀐다. 그 비현실적인 느낌이 좋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노력에 비하면 셔터를 누르는 건 턱없이 쉬운 일이라 무임승차를 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몽마르트 언덕에선 건물의 벽이 유화 물감을 바른듯 진득한 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거리 전체가 거대한 회화로 보이기도 했다. 그림 ..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외국에서 생일을 맞이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파리에서라니. 반은 그것 참 느낌 있는 일이라고 했다. 나머지 반은 혼자 생일을 보내야 한다니 쓸쓸하겠다고 했다. 막상 내게 어느 쪽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고민이 되긴 하지만 나 역시 반반이었다고 답하고 싶다. 너무 정신 없던 하루라 그 어느 쪽도 온전히 느끼질 못했으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에선 어디에 있든 온전히 혼자로 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침에 날아오던 페이스북과 메신저의 메시지로 생일 축하는 충분히 받았으니 새삼 놀랍고도 감사한 일이었다. 물론 메시지는 메시지일 뿐,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직접 축하 인사를 받아보진 못했다. 그래서 하루가 다 가기 전에 내가 대신 축하해 주기로 했다. 황량..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제외하고 파리에서 그림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몽마르트 언덕의 테르트르 광장일 것이다. 마침 늦겨울의 햇살이 광장 안으로 곧장 떨어지는 시간이었다. 자연광과 어우러진 화폭의 색채에 눈이 부셨다. 만물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주광의 영역에 있었음에도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느낌이었다. 하긴 이렇게 많은 화가들이 이렇게 좁은 공간에 모여있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긴 하다. 화가들의 실력이 어떻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뭐라 대답할 말이 없다. 테르트르 광장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념품 매장이니까. 그림의 주제는 대체로 관광객인 당신이거나 사진으로 미처 담지 못한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 그 두 가지로 한정돼 있다. 여기에선 뛰어난 예술 작품보단 파리를 기념할 수 있는 뭔가를 얻어가기..
혼자서 뭘 하는 걸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면 혼자 하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일을 좋아한다. 글쓰기가 그렇고, 사진 찍기가 그렇다. 여행은 아직 잘 모르겠다. 여행은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제일 중요한 만큼 죽이 잘 맞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인 편이 낫겠지. 하지만 난 나를 꽤 좋아하니까 혼자, 나와 함께 여행하는 것도 좋다. 그러면 글과 사진은 절로 따라오니까. 예전엔 그러지 못했는데 언젠가부터 식당에서 혼자 밥먹는 게 어색하지 않다. 죽이 잘 맞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면 식사도 여행만큼이나 고역이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회성이 아주 좋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마저도 다 깎여나간 모양이다. 툭하면 몸도 마음도 체한 것처럼 무거워지기에 십상이니까. 어쩌다..
빅 아일랜드의 볼케이노 내셔널 파크 정상에 올랐다가 마그마가 굳어 만들어진 검은 땅을 달렸다. 좌우로 쫙 펼쳐진 흑색 사막이 파괴된 후의 세상을 연상케 했다. 여행안내서에선 “우주적인 풍경”, “달에 온 듯한 기분”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정도로 이질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젠간 벌어질 거대한 사건의 예고편을 보는 것에 가까웠다. 마그마가 얼마나 많이, 그리고 멀리 흘렀는지 빅 아일랜드는 간척사업을 하지 않아도 절로 영토를 늘려가는 곳이다. 1970년대 깔아 놓은 아스팔트 도로가 1983년 분출 때 묻혀 일부만 드러난 광경을 봤다. 딱딱하고 단단해 보이는 아스팔트가 이토록 쉽게 잘려나갈 수 있다니, 재난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감정은 두려움보다는 경외감이었다. 그런데 만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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