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평범한 갤러리인 줄 알고 걸음을 멈췄다. 하와이 미술계의 동향을 파악할 만한 감식안이나 취향은 없지만, 그냥 한번 기웃거려 보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오며 가며 보았던 하와이의 그림은 자연이나 원주민을 주제로 한 강렬한 색채의 작품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실내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작업실과 전시장을 겸하는 공간인가 했더니 캔버스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공동 작업인가? 그런데 정작 붓을 들고 있는 사람은 처음으로 아기 기저귀를 가는 부모처럼 어색해하고 당혹스러워하는 티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캔버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뭔가를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붓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작업실이자 전시장이며 동시에 미술 학원이었던 ..
72번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오하우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마카푸우 포인트가 나온다. 오하우의 모든 곳을 가보진 못했으니 그 말이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확 트인 전망을 보면 굳이 반대할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겠다 싶다. 오하우 섬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나와 대동소이할 다른 사람들도 마카푸우 포인트에 거는 기대가 컸다. 최소한 렌즈를 꽉 채울 멋진 풍경 하나 정도는 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비가 왔다. 해변에서 멀어질수록 연청색에서 남청색으로 바뀌는 바다는 먹구름이 끼기 전 딱 몇 분 동안만 제 빛깔을 보여주었다. 그 명암과 채도와 색조는 사람의 힘으론 재현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는데, 구름이 해를 가리면 조용히 사라질 정도로 겸손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
옷에는 문명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부와 권력을 뽐내기 위해 사람은 옷을 입었다. 의복이 필수품에서 사치품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생존의 문제를 걱정하던 인간이 자아실현과 명성, 지위에 대해 고민하게 된 역사의 흐름을 반영한다. 극한 상황에 도전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죽지 않기 위해 옷을 입는 사람은 없다. 죽음만큼 견디기 어려운 사회적 사망 선고를 피하기 위해 입을 뿐이다. 다양한 디자인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지만, 여전히 옷은 우리를 한정 짓는다. 이것은 얼마나 제 몸에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는지, 얼마나 개성 있고 세련된 옷을 입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에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나를 일관성 있게..
1.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하나는, 때로는 그것이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 되기도 하는데, 책이나 영화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장소에 실제로 가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로맨스나 자극을 받은 누군가의 경험담, 한 번 스쳤을 뿐인데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가 우리를 먼 곳으로 이동하게 한다. ‘비포 선셋’의 만남을 떠올리며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방문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선 데보라 카를 기다리던 캐리 그랜트의 모습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세대가 다른 나는 만나자마자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을 찾게 되겠지만). 성지순례를 떠나는 사람들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발상지와 경전 속 일화가 벌어..
하와이 여행기라면, 최소한 하와이 가이드북이 소개하는 몇 군데 정도는 언급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눈으로 직접 보고 왔다는 사실 증명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두 시간 동안 오하우의 명소 세 군데를 돌아보고 남은 건 메모 열 줄과 사진 몇 장뿐이었다. 그럼에도 물 먹인 소처럼 부풀려 스케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나 자신에게 그곳들을 잊지 말라고 환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특별한 의미나 감상을 끄집어내긴 어렵지만 가끔 남국의 정서를 되살리고 싶을 때 꺼내보기 좋은 기억으로서 말이다. 햇살은 아침나절부터 강렬했다. 가이드는 일정이 제대로 시작되기 전에 마음이라도 가다듬으라는 듯, 해안 도로에서 툭 튀어나온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바다를 감상할 시간을 줬다. 선글라스를 준..
만약 당신에게 많은 돈이 있다면 이런 곳에서 사는 건 어떨까? 오하우 섬 일주는 호놀룰루에서부터 시작해 반시계방향으로 섬을 도는 투어다. 가이드는 15인승 밴의 가속 페달을 밟으며 처음이니까 흥미로운 곳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하와이 카이. 섬 남동쪽에 위치한 부촌으로 하와이의 비버리 힐즈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이 그에게 흥미로운 곳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밝혀지기 전, 호놀룰루 시내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하게 닦인 도로로 접어들었다. 금과 옥과 대리석으로 장식한 휘황찬란한 궁궐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저택이라 불러줘야 예의겠다 싶을 정도로 커다란 단독 주택들이 이어졌다. 하와이에서도 알아주는 부자들이 모인 하와이 카이 커뮤니티에 참여하려면 못해도 270만 달러 이상의 집을 사야 한다고 한다. 그것도..
처음으로 유럽을 다녀왔을 때 왜 여행기를 쓰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사진을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대답했을 거야. 그때의 기억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려는 마음도 있다고 덧붙였을 테고. 아마추어 사진가는 자기 작품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하는 법이거든. 다른 사람도 나의 시선에 동감을 해 줄까? 사진이 그들에게 아주 미세한 변화라도 일으킬 수 있을까? 가끔이라도 오, 하는 감탄사를 끄집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복권 번호를 맞추는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기대 때문에 몇 번씩 사진첩을 들추며 괜찮은 놈들을 추렸어. 그리고 세세한 부분까지 쓸어담은 글에다가 붙여 넣은 거지.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여행기. 팔라우와 두 번째 유럽 여행 - 출장 - 을 다녀오자 여행만큼 글로 쓰기 좋은 소재가 없다고 대답이 달..
하와이에서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자동차 번호판이다. 그 네모난 금속판 위엔 항상 알록달록한 무지개가 떠있다. 시선을 이리 돌려도 보이고, 절로 돌려도 보인다. 어쩐지 귀여운 장난 같아서 속 안의 심각한 매듭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다. 물론 이곳이 꿈과 희망에 가득 찬 섬이라 그 상징으로써 그려놓은 건 아니다. 국지성 비가 자주 내리는 하와이에선, 하루에도 몇 번씩 무지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 무지개를 처음 본 건 도착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내로 진입할 즈음 빗방울이 차창을 때렸다. 해가 멀쩡히 떠있어도 꿋꿋하게 내리는 여우비였다. 남국의 섬에선 흔히 있는 일이겠거니 하는데, 저 멀리 아치형의 프리즘이 반짝였다. 빨. 주. 노..
"하와이에 혼자 오셨어요?" 의아한 눈빛과 함께 이런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그러면 대답할 구실이 있으면서도 입 열기가 망설여졌다. 어째서 "혼자 오셨어요?"도 아니고 "하와이에 혼자 오셨어요?"일까. 남자 혼자 하와이에 온 걸 이상하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이해할 순 있다. 신혼부부, 가족, 동창 모임 등 하와이행 비행기를 타는 다양한 사람 중에서도 이만큼 희박한 경우의 수가 없으니까.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으면, 문득 함께 차를 탄 이 남자가 같이 온 일행이 한 명도 없다는 걸 깨달으면, 그들은 어디까지 추측하고 어떤 상황까지 상상하게 될까. 외톨이 여자는 눈빛에서 사연을 읽을 수 있지만 외톨이 남자는 의뭉스러워 보이기만 한다. 돈 많은 한량으로 치부하려 해도 지갑이 두툼해 보이는 행색은 아니다. 사..
낮 처음 호놀룰루 시내로 들어갈 땐 곳곳에 콘크리트 젠가가 쌓여있는 줄 알았다. 도시 자체가 급하게 성장하고 급하게 지어졌다는 인상이어서 섬 어딘가에 성장 촉진제가 꽂혀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문화의 개성이나 건축적 미학보다 실용성과 유용성에 무게를 두는 경향 때문일까. 이국적인 느낌은 팔라우나 로마의 외곽도로, 아니 몇 시간 전 떠나온 인천 공항만도 못했다. 우선 차에서 내려 거리를 걸어 보아야 차창 너머로는 보이지 않았던 대상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야자수들은 늙고 성급한 도시에 활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도맡고 있었다. 서너 그루씩 옹기종기 모여서 웬만한 건물 높이만큼 뻗어 올라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드는 그네들은 마치 익살스럽게 조각된 토템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 위에서 춤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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