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시간도 채 자질 못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남부터미널에서 6시 30분경에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달렸다. 버스를 타러 가며 전날 홍콩행을 기념한답시고 들이부은 술의 양을 가늠해 보았다. 다행히 두통이 아니라 속 쓰림의 형태로 찾아온 숙취는 기념주로 테킬라를 마셨던 선택이 탁월했음을 증명했다. 부족한 잠은 공항으로 가면서 보충하면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버스에 올라도 잠이 오지 않았다. 텅 빈 새벽 도시는 잠들기보단 저를 봐주길 원했다. 푸른색 필터를 끼운 것처럼 선명한 날 빛을 등진 건물들이 감은 눈 저편에서 끝없이 아른거렸다. 그나마 풍경이 단조로워지는 올림픽대로에 진입하고 나서야 비로소 잠들 수 있었다. D는 이번 여행의 동반자다. 누군가와 둘이 여행을 하는 게 참 오랜만인데, 그 마지막..
그저 주립공원일 뿐인데, 도시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는지 이곳은 마치 밀림의 한가운데 같다. 고사리 같은 양치류부터 기괴한 열대식물까지 일정한 패턴 없이 모인 다양한 나무들이 대지를 덮고 있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나무가 자란 곳에선 식물의 축축한 숨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잘 닦인 산책로를 따라가고 있음에도 원시의 숲을 헤매는 기분이다. 눈앞에 늘어진 거대한 나무줄기는 나를 정서적으로 먼 곳으로 데려가려고 손짓하는 중이고, 어딘가에서 원시 생명체가 어슬렁거릴 거라는 무책임한 상상력도 여기에 동참한다. 문명의 힘으로 편하게 걷고 있지만 여기선 문명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리라는 착각을 피할 길이 없다. 그리고 숲이 보물처럼 감추고 있던 아카카 폭포가 나타났다. 그것은 물안개를 허리에 두르고 간극이..
어떤 음악을 다른 사람과 함께 듣고 싶어지는 이유는자신의 감정을 전이시키는 데 음악만큼 빠르고 효과적인 매개체가 없기 때문이다.여기에는 전하고 싶은 이야기나 정서가 한껏 담겨있기도 하고,지금 상황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음악이 저 자신 안에선 일종의 화학작용을 일으켜현재 상태를 묘사할 단 하나의 표현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공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우릴 움직인다.그것은 블로그의 배경음악을 신중하게 고르게 하고,에스엔에스를 통해 듣고 있는 음악을 공유하게 한다.그도 아니면 옆 사람에게 이어폰 한쪽을 건네게 하거나.이는 참 매력적인 수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여행을 떠나 멀리 있는 누군가와 함께 듣고 싶은 음악이 생겼다면그 노래는 여행 중의 당신을 정의할 것이다.훗날 그 음악을 다시 들었을..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종종 뚜껑이 열리는 기분을. 글자 그대로 카메라 뚜껑(사실 뚜껑이겠지만)이 열리는 바람에 감겨 있던 필름이 홀라당 타버릴 때의 그 기분을. 오 년이면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닌데 아직도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그런 실수를 한다. 그것도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씩 저지른다. 필름을 교체할 때 물려있던 놈을 감지도 않고 필름실을 여는 경우가 제일 흔하고, 노출 보정 다이얼의 노브가 가방 끈에 걸려 빠지는 바람에 뒤판을 덜렁덜렁 열고 다닐 때도 있었다. 물론 여분의 필름을 몇 통씩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디지털만 사용해 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몸은 피곤하고 정신은 딴 데 팔리기 일쑤인데 꼭 중요한 순간에만 물려있던 ..
빅 아일랜드로 떠나는 이른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네 시 반에 눈을 떴다. 하늘이 아직 짙은 남색을 게워내지 못한 시각이었다. 헐레벌떡 준비를 마치고 호텔 로비로 내려오자 지나치게 부산을 떤 탓인지 갑자기 힘이 쭉 빠지고 울적해졌다. 마우이 섬이나 빅 아일랜드로 떠나는 낯선 이들과 함께 15인승 밴에 구겨 앉아 공항으로 향했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사람이 이런 기분일 거란 생각이 들자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워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새로운 장소에 대한 막연한 기피는 이렇게 약속이라도 한 듯 여행 당일 아침에 찾아온다. 이런 곤혹스런 증후군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할 수 있는 만큼 빨리 터미널에 들어가 할 수 있는 만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2층짜리 낡은 건물이 길게 이어진 호놀룰루..
8번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적당한 에어컨 바람 덕에 기분이 좋았고, 하차하고 싶을 때 잡아당기면 되는 줄을 보며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손잡이를 당기면 버스 위에 달린 굴뚝에서 나팔 소리와 함께 뽀얀 김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런 상상을 하자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라도 벨을 울리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충동을 이겨내고 책을 펼쳤을 땐 이미 버스 안이 꽉 차 있었다. 하지만 진작 자리를 차지한 나는 여유를 즐기는 중이었다. 몇 번이고 읽은 책이 오늘도 흥미로웠다. 이국적인 장소를 탐색하는 화자의 이야기를 또 다른 이국적인 장소에서 읽고 있자 나 역시 먼 곳에 왔다는 현실감이 선명해졌다.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여행을, 정서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진행 중이었다. 그래..
커피로 아침을 때우고 물로 연명하다가 점심시간이 지났다. 오전 내내 땡볕 속을 걸어 다녔더니 힘이 없다. 뭘 먹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뭘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스팸 무스비조차 땡기지 않는다. 그냥 아무거나 대충 밀어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집에서 혼자 휴일을 보낼 때와 똑같다. 음식을 먹는다기보단 최소한의 열량을 공급한다는 느낌에 가까운 바로 그 순간 말이다. 알라 모아나의 푸드코트에 들어섰지만 메뉴 고르기가 어렵다. 일단 종류가 너무 많다. 한식, 양식, 중식, 일식에 태국식까지.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세계 음식의 바이블을 보는 기분이었다. 전체를 세 바퀴를 돌고 나서야 마음이 선다. 오늘의 정답은 하치바 상 - 일본식 그릴요리 전문점 - 이 요리해 주는 치킨 데리야키 플레이트다...
오하우 섬엔 수많은 쇼핑센터가 있지만, 그중 가장 인기 있는 두 곳을 꼽으라면 아마 첼시 그룹에서 운영하는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웃렛Waikele Premium Outlet과 알라 모아나 센터Ala Moana Center가 아닐까 한다.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웃렛은 우리나라에선 여주와 파주에 자리 잡은 신세계 첼시의 아웃렛과 형제라고 할 수 있고, 알라 모아나 센터는 오하우 섬에선 가장 크고 미국 내에서도 손으로 꼽힐 만큼 거대한 아웃도어 쇼핑몰이다. 특히 알라 모아나 센터는 와이키키 중심가에서 불과 2km 거리에 있으니, 쇼핑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놀이 공원을 방불케 하는 규모의 쇼핑센터라면 그건 그냥 관광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바다로 가는..
무엇으로부터의 피로인지도 모른 채 그냥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날을 거듭할수록 늘어가는 욕심과 날이 거듭되어도 변할 줄 모르는 두려움이 공모하여 빚은 피로일 것이다. 나무 그늘에 몇 시간씩 누워있는 오후를 상상한다. 책을 읽다가, 무거운 눈꺼풀 아래 쓰인 꿈을 읽다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 분명 읽긴 했을 텐데 생소하기만 한 문장을 다시 읽어도 좋겠다. 실수로 한 곡 반복을 하는 바람에 한 시간 내내 같은 곡을 들어 놓고선 눈을 뜨자마자 앨범이 한 바퀴 돌았구나 착각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잔뜩 달궈진 아스팔트 위를 달려온 바람이 나한테 걸려 넘어지길 기다린다. 그러면 길고 뾰족한 잎이 몸을 흔들며 그늘의 가장자리를 흩트린다. 사라락 옷깃 스치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이파리와 이파리..
"술을 홀짝이며 생각할 시간을 가져. 내가 어디에 있었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6층에서 맞는 바람은 엄청났다. 호텔 사이로 달려드는 바람, 운하를 스쳐 바다로 불어가는 바람, 정신없이 건물을 오르내리는 바람. 폐쇄된 수영장을 따라 건물 한 바퀴를 돌면서 머리카락이 멋대로 춤을 추는 느낌을 즐겼다. 이대로 날아오른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매일 밤 난 너에 대해 갖가지 생각을 해." 밤은 화려하지 않았다. 호텔방마다, 을씨년스러운 주차장마다, 건물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간간이 소음이 들려오는 거리마다 백열등 몇 개가 섬처럼 반짝일 뿐이었다. 커튼이 쳐진 건너편 호텔 창문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누군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들은 뭘 먹었을까? 창밖을 보며 마시고 있는 술은 맥주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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