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나를 유혹하지 못한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야겠다. 음식 사진을 잘 찍진 않지만 먹는 건 좋아한다. 꽃 사진도 잘 찍지 않지만 그렇다고 꽃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꽃의 이름을 외우지도 못하고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해 본 적도 없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으로서 경의를 표하기는 한다. 벚꽃을 좋아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뭇가지 위에 흐드러지게 핀 전체를, 바람에 연분홍빛 물결로 흔들리는 그 군집 자체를 좋아한다. 메마른 사람이라 탓해도 할 말은 없다만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돌덩이 취급받는 건 조금 억울한 일이다. 나이가 들면 달라질지도 모른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며 예전엔 싫어했던 게 좋아지기도 하니까. ..
휑뎅그렁한 도로에 컨테이너로 만든 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 접시 대신 도시락 용기를 주고, 열 가지 중국 요리 중 세 가지를 마음껏 고를 수 있으며, 거기에 음료수까지 포함이다. 홀로 앉아 코코넛 소스에 빠진 새우를 포크로 찌르고 있으려니 끝없이 이어진 황야를 달리다가 외딴 휴게소에 차를 세우는 기분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이 식당 건너편에도 컨테이너로 만든 가게가 하나 있는데 둘 다 황량한 대지와 잘 어울렸다. 내 취향이 그렇다. 컨테이너로 만든 단층 건물을 보고 있으면, 더군다나 그것이 식당이나 잡화점으로 쓰이고 있다면, 가슴 한구석에 작은 구멍이 뚫려 마음이 그쪽으로 쓸려 들어가듯 아득해진다. 마치 아름다운 회화 앞에 선 것처럼 그런 풍경을 오래 두고 보게 된다. 빅 아..
:: 휴일 낮의 센트럴과 월요일 저녁의 센트럴은 확연히 달랐다. 지금껏 별로 본 적 없는 정장 차림의 남녀가 빌딩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문득 홍콩을 묘사하는 많은 표현 중 '세상에서 가장 바쁜 도시'가 떠올랐다. 금융업이 발달한 도시는 왜 삶의 속도까지 빨라져야 하는 걸까? 오직 숫자로만 존재하는 실체 없는 이상을 잡기 위해 쉼 없이 뜀박질을 해야 하기 때문일까? 이 도시가 그나마 진취적으로 발을 구르는 곳이라고 한다면, 그저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각박하게 사는 한국은 얼마나 처참한 곳인 걸까? 아니다, 분위기를 바꾸자. 오늘은 밤을 새워 기념해도 부족할 여행의 마지막 날이니까.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한다. 홍콩 남자의 헤어 스타일을 두고 흉을 본 적이 있지만, 그들은 실로 정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 셋째 날엔 몇 시에 일어났는지도 잘 모르겠다. 세 번의 아침 중 제일 늦게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간밤에 침사추이를 싸돌아다닌 여파가 밀려오는지 어디 한 군데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창문을 열자 어제보단 덜 뜨거운 공기가 얼굴에 닿는다. 흐린 날씨였다. 비가 올까? 한국의 여름이라면 우산을 준비했겠지만 피곤했던 우리는 방수 코팅된 천 뭉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방을 정리하고(워낙 좁아서 정리랄 것도 없었지만) 우리의 몰골도 정리를 좀 했다. 홍콩에 와서 찍은 필름을 세어보니 고작 세 통이었다. 하루에 한 개 반. 여행을 가면 가져간 필름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마구 찍는 편인데 홍콩에선 셔터를 누른 횟수가 턱없이 적었다. 아무래도 너무 더워 금방 지치고 아침 일찍 나다닌 적이 없어..
::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스타 페리에서 내리자 스타의 거리가 코앞이었다. 스탠리 여행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재야에서 도시(?)로 나온 느낌이 들어 얼떨떨했다. 물리적으론 가까울지 몰라도 정서적으론 아주 먼 곳을 다녀왔기 때문이리라. 심포니 오브 라이츠까지 시간이 꽤 많이 남아서 저녁을 먼저 먹기로 했다. 어제 늦게 왔을 때와는 대조적으로 스타의 거리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일곱 시도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의 인원이 모여있다니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홍콩에 놀러 온 여행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싶다면 저녁 여덟 시에 스타의 거리로 가보자. 아마 절반은 빅토리아 피크의 정상에 올라가 있을 테고, 나머지 절반은 이곳에 모여있을 것이다. 먹을 걸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빅..
:: 홍콩, 런던, 밴쿠버, 두바이. 이런 주요 도시엔 오픈 탑 투어를 책임지는 빅 버스가 포진해 있다. 빅 버스에 탄다는 건 "저 관광객이에요."라 쓰인 커다란 전광판을 들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오히려 그게 초심자의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 여력만 된다면 누가 빨간색 이 층 버스에 올라 도시를 누빌 기회를 마다하겠는가. 언젠가 런던에서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빅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생판 모르는 보행자에게 손을 흔들고 사진을 찍고 환호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모형 자동차 같은 버스 안에선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여기 홍콩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D가 빅 버스 티켓 두 장을 얻어 왔던 것이다. 홍콩의 빅 버스엔 총 세 개 노선이 있는데 그 중 ..
:: 여기가 어딜까? 여행의 둘째 날 아침엔 곧잘 그런 의문과 함께 눈을 뜨곤 한다. 깨어나기 직전까진 분명 내 방 침대 위에서 이 괴상망측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떴을 때 보이는 풍경은 낯설기만 하다. 그래, 난 지금 홍콩이지. 이 좁아터진 방은 우리가 술을 마시다 쓰러진 호텔방이고. 에어컨을 그대로 켜놓고 잤구나, 목이 칼칼하고 몸이 으슬으슬하군. 그런데, 난 언제부터 자고 있었던 거지? 의식을 찾으며 하나씩 상황을 이해해 가는 과정은 수여 개의 전등을 차례대로 켜는 느낌과 비슷하다. 상황이 좀 정리가 되자 머리가 무겁고 입안에 술 냄새가 가득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지만, 얇은 천조각은 자비 없는 햇살을 막기에 역부족이다. 저건 아침 햇살이 아니다 싶어 시계를..
:: 내가 사겠다며 D를 끌고 간 곳은, 사실 무슨 대단한 곳이 아니라, 그냥 스타벅스였다. 스타의 거리로 들어서기 전에 이 층짜리 스타벅스가 하나 있었는데, 딱 봐도 야경이 끝내줄 것 같은 명당이었다. 주문을 하고 혹여나 앉을 자리가 없을까 전전긍긍하며 이 층으로 올라갔지만 의외로 빈자리가 많았다. 처음엔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금방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고스란히 몰려오는 더위와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절대 시원하진 않다.) 지칠 줄 모르는 모기떼 때문이었다. 온종일 카페인 섭취도 못 했고 갈증도 났다는 표면적인 동기를 떠나서, 내가 굳이 스타벅스를 찾은 이유는 외국에 가서 꼭 한 번은 맥도널드를 찾는 이유와 같다. 스타벅스와 맥도널드 같은 거대 프랜차이즈 기업의 매장들은 문명화된 ..
:: 한 번 고생해서 그런지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특히 밤에 더 날카로워지는 D의 감각이 큰 도움이 되어 낮 풍경을 뒤집어 놓은 듯한 요지경을 지나면서도 길 한번 헤매지 않고 몽콕 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퇴근 시간은 피한 것 같지만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거나 시내로 나가는 인파가 엉켜있는 모양이었다. 이 많은 사람이 낮에 보았던 아파트에 포개져 들어가는 상상을 하자 인간 피라미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현기증이 일었다. 제대로 된 열차를 타는 것은 제대로 된 출구를 찾는 것보단 훨씬 쉬었다. 몽콕도 두 가지 노선이 겹치는 환승역이지만, 각 노선이 한국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위아래 층으로 나누어져 있어 헷갈릴 일이 없었다. 이처럼 홍콩 지하철을 몇 번 ..
:: 공항철도를 기다린다. 스크린 도어에는 휴고 보스 정장을 입은 주윤발 선생께서 "살 만하냐?"라는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보고 계신다. 승차장은 한가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승무원 한 명,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 그리고 비즈니스맨 몇 사람이 전부다. 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렸기 때문에 아수라장을 각오했었는데 생각보단 한가한 도시라고 지레짐작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가 도착했고, 현대 문명의 지향점을 상징하는 듯한 실내 - 깨끗하고 단단해 보이는 세라믹 코팅의 내장재, 우주선에 달려있으면 어울릴 듯한 기다란 창문, 웅웅거리는 낮은 소음만으로 움직이는 차체 - 가 우리를 맞이했다. 하지만 내·외관보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바깥세상과 칼로 그은 것처럼 차가운 실내 공기였다. 에어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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